[민병두의 실록<2부>, 초현실 비상계엄 (28)] 미국은 정말 몰랐다? 골드버그 미국 대사의 분노
민병두 입력 : 2025.03.20 16:34 ㅣ 수정 : 2025.03.21 13:36
12월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선포를 실록으로 엮어본다. 윤석열은 언제부터 쿠데타를 계획했을까? 윤석열은 무슨 일을 계기로 확신범이 되었을까? 12월3일은 우리나라가 처한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최고권력자 1인의 독단으로 나라가 형편없이 흔들렸는가 하면 국회와 시민들의 용기있는 대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위대한 서사시였다. 12월3일을 전후해서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이 역사적 순간에 무슨 역할을 했는지 초현실적 계엄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필립 골드버그 전 주한미국대사. [사진=연합뉴스TV 캡처]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1972년 10월 16일 박정희의 친위 쿠데타 하루 전, 정권의 2인자 김종필은 주한 미 대사 필립 하비브에 계획을 통보했다.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의 쿠데타를 뉴스를 보고 알게 된 필립 골드버그 대사는 조태열 외무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응답이 없었다.
첫 번째 장면. 박정희의 쿠데타와 윤석열의 쿠데타
김종필에게서 10월유신 선포 계획을 들은 하비브 대사는 12장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한다. 미 국무부 장관에게 타전하는 비밀 전문의 제목은 ‘한국 비상계엄령 선포와 정부 변화 계획’이다. 전문은 곧바로 국방장관과 태평양사령관에게도 전달된다. 계엄령은 자국의 군인을 한국에 파견하고 있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다. 그들의 안위와 관련된 문제이다.
신동아는 2000년 4월호에서 비밀해제된 전문을 입수해 공개했다. “10월 16일 18:00 시에 김종필 총리 사무실을 방문했음. 놀랄 만한 소식이 있어 만나자고 했다면서, 계엄령 선포를 통보했음. 김종필은 조치가 취해지기 전에 미국 측에 통보하는 것이 예의라고 믿어 24시간 전에 통보하는 것이라고 말했음”
미국에 알리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 김종필은 국회 해산과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대통령 선거인단 구성 계획등을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3선을 한 박정희의 임기는 1975년까지인데 유신쿠데타를 통해 김대중이 예언한대로 영구집권, 사실상의 총통제를 향한 길을 열었다.
미국은 불쾌해 했다. 특히 미국의 아시아 정책(미·중수교, 베트남 철수 움직임) 비판이 포함된 것이 닉슨 행정부를 자극했다. 박정희는 10월유신 선포문에서 미국이 불편해 하는 문장을 빼고 특수외교활동비를 편성하여 미 의회 등을 설득하도록 했다.
이보다 앞서 1961년 한국에서는 통일 논의와 광범위한 반미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4월혁명으로 분출된 민주화 열기는 전국 거의 모든 대학교에서 통일 운동으로 발전했다. 자주를 내세우는 통일 논의는 미국의 입장과 배치되었다. 군부의 이익과도 충돌했다. 장면 총리의 민주당 정부를 뒤엎기 위한 쿠데타 움직임이 여러 곳에서 감지되었다.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 지부는 1961년 4월 21일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을 보고했다. “정부를 뒤엎으려는 두 개의 쿠데타 중 하나는 2군사령부 박정희 소장이 주도...계획은 사단장들을 포함해 한국 육군 전체에서 논의되고 있음” CIA 요원들이 박정희의 측근 참모를 통해 입수한 정보라고 한다. “적극적이고 진지하게 쿠데타를 논의하고 계획하는 중요한 집단이 있음”(4월 23일) “만약 쿠데타가 4월 26일 시도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 좋은 때를 기다릴 것임”(4월 25일) “장면 총리는 육군 내의 불만 집단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소문을 알고 있음. 이러한 소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상황이 결코 위험하지 않다고 믿음”(4월 26일) CIA 한국 지부는 매일 같이 보고서를 올리다시피 했다.
이 보고서는 덜레스 CIA 국장의 책상 위에 방치되어 있다가 5.16쿠데타가 발생하고 나서야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고됐다.(‘은근히 5.16쿠데타를 원했던 미국’ 프레시안 2018년 5월 16일. 이재봉 원광대 교수 기고문에서 재인용) 박정희는 쿠데타 후에 적극적인 친미노선을 표방했고, 결국 미국은 그 해 8월에 공식적인 지지를 표명함과 동시에 경제 및 군사 원조를 지속하겠다고 발표했다.
필릴 골드버그 대사는 미국 국무부의 최고위직 경력대사(Career Ambassador)다. 엽관제 외교관이 대부분인 미국에서 전문외교관 출신으로는 최고위직에 올랐다는 의미이다. 그는 버락 오바마 정부 시절에 유엔 대북제재 이행 담당 조정관(2009-2010)을 지내서 한반도 이슈에 익숙해 있다. 2022년 7월 한국 대사로 부임해서 23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석했다. “이번 주 막 한국에 도착했지만, 이 행사에 참여하고 싶었다. 차별을 반대하고, 모든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를 위한 미국의 헌신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축사를 하여 보수 개신교계의 반발을 샀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피습(2024년 1월 2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SNS를 통해서 “충격과 슬픔을 느끼며 그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여 입장문을 올린 것이다. 1956년생인 그는 은퇴를 고민했었는데 한국 대사로 일하게 되자 결정을 미루었다. 그는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보람된 결정 중의 하나였다고 했다.
계엄 선포 당일, 골드버그 대사는 조태용 국정원장과 고별 저녁 식사를 했다. 2025년 1월 7일 임기를 마치고 한국을 떠날 예정인 대사는 지인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느라고 연말 일정이 꽉 차 있었다. 골드버그 대사는 “한국 근무하며 좋은 기억이 많았다”고 지난 시간을 기억했다. 조태용 원장에게서 몇 시간 후에 계엄령이 발동될 것이라는 언질을 받지는 못했다. 조태용은 만찬이 끝나고 귀갓길에 윤석열의 전화를 받았다. 어디에 있냐고 묻는 질문에 내곡동 공관이라고 답했다. 이후 대통령실 관계자가 용산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가보았더니 국무총리와 몇 몇 장관이 와 있었다고 한다.(제27화 참조) 조태용은 계엄 전날 김건희에게서 문자 두 통을 받았고, 당일에 한 번 답장을 보냈다.
골드버그 대사는 계엄 뉴스를 접하자마자 조태열 외교부 장관과 통화를 시도했다. 미국도 모르는 대북정보가 있었던 것인지, 그렇다면 주한미군과 그 가족 그리고 한국에 와있는 수많은 미국인들의 안전 문제 등에 대한 1차적 판단을 해야 하는 책임이 그에게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으나 접촉이 되지 않았다.
조태열은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낙화),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승무) 등을 쓴 조지훈 시인의 아들이다. 조태열은 2024년 12월 11일 국회 긴급현안질의에서 그날 전화를 안받은 이유에 대해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고, 잘못된 정세 판단과 상황 판단으로 해서 미국을 미스리드(mislead)하고 싶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위성락 민주당 의원은 “미국이 전화를 했던 것은 계엄에 대한 입장을 밝히려는 거고 그것을 받아서 전하는 일은 간단한 일이다. 그 일은 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조태열이 전화를 받게되면 윤석열에게 미국의 입장을 전달해야 하는데 그런 곤란한 상황을 피하려고 한 것이 아니냐는 질책이었다.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은 “그 당시에는 한미동맹에 대한 생각을 먼저 하고 공인으로서 설명을 했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골드버그 대사는 그날 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과 통화했다. 김태효는 “대통령 담화문 이외에 관련 사항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없으며, 추후 상황을 지켜보면서 정부 간 소통을 이어가려고 했다”고 보도자료를 통해 밝혔다. 골드버그 대사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실 인사(김태효)에게 “어떻게 대통령이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느냐”며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며 설명을 요구했지만 통화 상대가 계엄에 대해 아는 게 없어 보였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실 인사에게 고함쳤다는 게 맞느냐는 질문을 받고서는 10초 간 머뭇거리다가 ‘조금 그랬다“며 인정했다.
골드버그 대사는 이런 상황을 본국에 그대로 보고했다. 미국 국무부의 베단트 파텔 부대변인은 2024년 12월 3일(한국시간 12월 4일) 정례브리핑에서 윤석열의 결정을 사전 통보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처럼 가까운 동맹이라면 비상계엄 선포에 앞서 사전 통보가 이뤄졌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같은 대답을 했다.
골드버그 대사는 12월 31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계엄 선포 당일 어떤 생각이 들었냐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처럼 민주주의가 잘 확립된 나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첫 반응은 충격이었다고 생각한다. 비상계엄을 엄청난 실수라고 느꼈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 충격을 받은 것 외에 분명히 비민주적인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골드버그 대사는 그렇게 한국에 대한 기억을 뒤로한 채 1월 7일 임무를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두 번째 장면. 전두환의 쿠데타와 윤석열의 쿠데타
윤석열의 미국 패싱은 2025년 1월 있었던 중앙정보국(CIA) 국장 인사청문회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수전 콜러스 미 상원의원(정보위원회)은 한국의 계엄령 선포를 정보국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문제삼았다. 존 랫클리흐 CIA국장 지명자는 “그런 뉴스를 보면서 정보 수집의 실패나 실수라고 할 수 있는 일들이라고 생각했다”고 실패를 인정했다.
미국은 1979년 전두환의 12.12 내란은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있지 못했다. 12. 12 쿠데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당시 지미 카터 행정부는 이란 아프가니스탄 니카라과에서의 외교 실패로 곤경을 겪고 있었다. 한국에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인권을 제1의 가치로 내세운 카터 행정부는 결국 광주에서의 무혈 진압을 용인했고, 레이건 행정부 들어서서 전두환을 승인했다. 이로인해 한국에서는 광범위한 반미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미국은 1987년 6월항쟁 때에 전두환과 손절을 했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는 1979년 12월 19일과 28일 박동진 외무부 장관을 만나 강력한 항의의 뜻을 전달했다. “한국군이 미국 측과의 협의를 완전히 무시하고 대대와 사단병력을 자의로 이동해 한미 연합군의 군사적 유효성과 행동의 자유를 지극히 훼손했다”, “연합사의 작전통제권 위반 및 위계질서의 문란은 놀라울 정도이다. 금번 사태는 앞으로 연합사의 운영에 많은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대사는 자신의 입장이 미 합참의장을 거쳐 백악관의 최고위층(지미 카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1980년 1월, 전두환의 하나회가 일으킨 항명 쿠데타를 보면서 일군의 장교들이 존 위컴 주한미사령관을 접촉했다. 전두환 일당을 제거하려고 하는데 미국이 지지해주기를 바란다고 했으나 위컴은 그들이 전두환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위컴은 전두환 일당이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유혈진압을 할 때 20사단 출동에 동의했다. 그는 광주에서 시민들이 쓰러지고 있던 1980년 5월 19일 해럴드 브라운 국방부 장관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서 “우리는 전두환과 그 동조자들에게 권력의 통제권이 넘어간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전두환에 의해 정부가 움직이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협조해야 한다”며 이것이 미국의 중대한 안보 이익을 지키는 길이라고 했다. 하지만 국가보위입법회의 형식을 통해서 권력을 찬탈한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몰랐다. 미국에서는 이때도 정보 실패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위컴은 8월 7일 익명의 고위관계자로 보도하는 것을 전제로 기자회견을 해서 전두환 국가보위상임위원장이 한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경우, 미국은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 위컴은 8월 미국 언론 인터뷰에서 전두환이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며 “각계 각층 사람들이 마치 레밍(lemming. 나그네쥐)떼처럼 그 뒤에 줄을 서며 추종하고 있다”고 해 한국인의 반미감정에 불을 당겼다.
1987년 전국에서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을 외치는 목소리가 요동쳤다. 전두환은 강경 대응하기로 기조를 정했다. 4월 13일 호헌조치를 발표하기로 했다. 하루 전날 전두환은 미국에게 사전 통보했다. 박정희가 10월유신 하루 전에 김종필을 통해 미리 알리는 예의를 차린 것처럼 전두환도 예의를 차렸다. 7년 사이에 미국의 입장이 확 바뀌었다. 최광수 외무부 장관은 제임스 릴리 주한미대사를 만나 설명을 했다. 비밀 해제 문건에 따르면 릴리 대사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민주화라고 생각한다”며 반대했다. 전두환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도 친서를 보냈다. 하지만 레이건은 “민주적 제도에 기반한 정치적 안정성이 국가 안보 보장에 매우 중요하다”며 정치범 석방과 언론의 자유를 강조했다. 1987년 6월 항쟁때는 전두환에 등을 돌렸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가 있고 난 후 MBC는 브래드 셔면 미 연방 하원의원과 인터뷰를 했다. 진행자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이번 비상계엄 선포 일주일 전에 남북 간 국지전 유도하려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북한 원점을 타격하라고 지시했지만 합참의장이 이를 거부했다고 하는데 한국 군 당국의 이런 움직임 어떻게 보나"라고 질문하자 셔면 의원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건 분명히 조사해 볼 일이다. 이런 시도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미군은 DMZ에 수만 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있고 이 병력은 싸우다가 희생할 준비가 돼 있다. 그러나 북한의 도발이 없을 때 위장 작전으로 발발한 전쟁으로 인해 병력이 죽는 것을 미국은 원치 않는다.... 미국 역시 미국만의 정보 수집 능력이 있다. 그리고 만약 대한민국 국군이 남한 내 한 장소를 공격해서 사건이 발생했다 해도 미국은 북한의 공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이를 공개하여 북한이 당시 그러한 공격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한국과 미국 국민들에게 분명히 알렸을 것이다. 그렇다고 북한이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만약 대한민국의 어느 장소가 북한에 의해 공격당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면 미국은 진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이를 공개했을 거라는 얘기다."
이 인터뷰가 미국이 국지전 유도 등의 작전을 미리 감지하고 있던 것으로 많이 인용되기는 한다. 하지만 가정을 전제로 한 질문에 대해서 일반론적인 답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 13일, 방송인 김어준씨가 국회에 나와서 증언을 했다. 그가 받은 제보가 ”워낙 황당한 소설 같은 일”이라며 사실 관계를 전부를 다 확인한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깔고 진술을 했다. 군 암살조가 북한군으로 위장하여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를 사살하는 계획을 계엄군이 세웠다고 증언했다. 북한군으로 위장한 암살조가 미군을 사살해 미국의 북한 폭격을 유도한다는 임무도 있었다고 했다. 김어준씨는 이같은 정보를 우방국을 통해서 입수했다고 했다. 나중에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이 소지하고 있는 수첩에 비슷한 계획이 있었다. 대북 군사 동향과 한국군을 감청하는 주한미군 501 정보여단과 NSA 한국지부 서슬락(SUSLAK)이 사후적으로 이를 입수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세 번째 장면. 이승만의 쿠데타와 윤석열의 쿠데타
윤석열 탄핵 반대를 외치는 진영에서는 트럼프가 윤석열을 구할 것이라는 믿음이 강하게 퍼져있었다. 그들이 볼 때 트럼프는 윤석열과 대한민국의 구세주이다. 트럼프와 윤석열이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해야 한다는 소망을 전파하기도 했다.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린 ‘전한길이 트럼프 대통령께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재임 기간 노벨평화상을 우리 윤석열 대통령과 나란히 수상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유튜브채널 ‘전광훈TV’는 ‘트럼프 대통령이 윤석열을 구출한다’는 제목의 영상을 게시했다. 이들이 볼 때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하고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한 인물이 ‘국부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하나님과 미국이 보낸 메시아다. 그들이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흔드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들이 믿는대로 트럼프가 윤석열을 구하기 위해 행동할까?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윤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주요하게 등장한 것은 지난해 12월 말부터다. 구글 트렌드, 네이버 데이터랩 등을 통해 추이를 살펴본 결과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한 미국 부정선거론을 상징하는 구호인 ‘STOP THE STEAL’(표 도둑질을 멈춰라)의 국내 검색량이 지난해 12월31일을 기점으로 폭증했다.
이들의 이런 주장에 힘을 보탠 것은 한국계 영 김 미국 공화당 하원의원(동아시아 태평양 소위원장)이다. 그는 ‘더 힐’(The Hill) 기고와 ‘미국의 소리’(VOA)와 인터뷰에서 “탄핵 주도한 세력은 한미동맹 흔들려는 집단”, “종전 선언 추진한 세력이 탄핵을 주도”한다고 했다. 그리고 탄핵에 반대하며 항의하는 한국인들이 서울 중심부인 광화문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는데 서방언론들이 이를 외면하고 있다고 했다. 명백히 태극기 부대를 부추키는 발언이다.
그는 또 “중국 공산당의 악의적인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대담하고 뻔뻔해지고 있으며, 우리는 이에 대응하고 동맹을 지원해야 한다“고 하여 윤석열의 중국음모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미주 한인 유권자단체인 미주민주참여포럼(KAPAC)와 한인 여성 커뮤니티인 ‘미시 USA’는 이에 항의하는 서한을 보내고 성명을 발표했다.
태극기 부대들 사이에서는 2017년 11월 박근혜가 탄핵되었을 때에 트럼프가 구원하러 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하고 잘 지냈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쟁, 그린랜드, 관세전쟁을 치르느라고 정신이 없다. 게다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더 이상 부정선거론을 제기할 이유가 없어졌다. 트럼프 정부의 1인자격인 일론 머스크는 X에서 한국인들이 ”STOP THE STEAL“ 손팻말을 들고 있는 사진을 링크하면서 ”Wow”라는 반응을 보였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반응이라고나 할까?
쿠데타를 둘러싼 한미간의 갈등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승만의 욕심으로 원래 내각제였던 제헌 헌법의 권력구조가 대통령제로 바꾸었다. 내각제를 주장하는 국회의 다수와 대통령제를 고집하는 이승만이 타협했다. 국회에서 간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하기로 했다. 결국엔 다수당의 대표가 행정 수반이 되는 내각제 형태를 절충한 것이다. 이승만은 1948년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2년후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참패했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되면 이승만은 연임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승만은 전시 체제의 특성상, 국민 직선으로 하면 중임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승만은 5월 25일 0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전시 수도인 부산에 공산잔비의 출동이 잦다며 이를 명분으로 삼았다. 출근버스를 탄 국회의원 47명을 헌병대가 통째로 끌고갔다.이들이 국제공산조직에 연루되었다고 발표했다. 국회가 계엄해제안을 의결했으나 거부했다.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은 군 동원을 거부했고, 김성수 부통령은 항의하는 차원에서 사직했다. 이승만은 친위 쿠데타로 재선에 성공했고 4선까지 가는 등 독재의 길을 걸었다.
자국의 군대를 전쟁터에 파견해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있던 미국은 크게 당황했다. 무초 대사는 이승만에게 그만 쉬시라고 사퇴권고를 했다. 계엄령을 해제하라고 압박했다. 트루먼 대통령도 직접 나섰다. “우리는 한국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원조를 하고 있는 것이지 독재를 위해 원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육군본부 이용문 작전국장 등은 이승만을 암살하겠다는 쿠데타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야당과 접촉했다. 미국은 이승만을 하야시킬 계획을 검토했다. 이승만을 제거할 유엔군 차원의 계엄령도 검토했다 하지만 트루먼은 친미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을 대체할 인물이 마땅치 않다고 보고, 정국 수습의 희생양을 찾았다. 이범석 내무장관이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으로 사태는 정리되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시민들의 시위가 격화되었다. 4월 19일,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며 시위대가 경무대(청와대)로 향했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83명이 사망했다. 이승만 정부는 이날 오후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런데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한 계엄군은 경찰과는 대조적으로 중립을 지켰다. 계엄군은 시위 현장에 전차를 출동시켰으나 그뿐이었다. 시위대는 박수와 환호로 그들을 맞았고, 시민들은 전차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었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이 이승만에게서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CIA 한국지부장 실바는 4·19 직전, 백선엽 합동참모의장)에게 이승만 정부 전복을 위한 군사 쿠데타를 제안했다(「백선엽의 6·25 징비록」①)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제24화 참조)이 있고나서 W.C. 매카나기 대사는 4월 26일 경무대를 방문, 이승만 대통령에게 “국민은 오랫동안 무거운 짐을 져온 각하께서 이제는 젊은 사람에게 정부를 물려주고 쉬기를 바라고 있다”라고 하야를 권유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권고를 한국을 돕고자하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다.
태극기 부대가 국부로 추앙하고 있는 이승만은 이처럼 미국에게서 철저히 외면 당했다. 보수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는 윤석열은 어떨까? 바이든 행정부의 토니 불링컨 국무부 장관은 2024년 12월 4일 “윤석열 대통령이 심각한 오판을 했다...정당화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한국 민주주의는 활력이 넘치고 복원력이 강하다”며 국회가 계엄해제를 의결하고 시민들이 나선 것을 높이 평가했다.
뉴욕타임스는 계엄 발동 1년 전 12월 6일, 윤석열과 뉴진스를 ‘2023년의 가장 스타일리시한 인물’ 71인으로 꼽았다. 신문은 “그의 흠잡을 데 없는 ‘아메리칸 파이’ 백악관 공연은 아메리카 아이돌에 필적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미국 국가나 다름없는 ‘아메리칸 파이‘ 열창은 바이든과 미 의회 지도자들을 감동하게 했다. 지난해 중후반에 골프 라운딩을 하면서 트럼프와 정상회담을 열심히 준비했다는 윤석열. 그가 다시 한번 ’아메리칸 파이‘를 부를 기회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