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선포를 실록으로 엮어본다. 윤석열은 언제부터 쿠데타를 계획했을까? 윤석열은 무슨 일을 계기로 확신범이 되었을까? 12월3일은 우리나라가 처한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최고권력자 1인의 독단으로 나라가 형편없이 흔들렸는가 하면 국회와 시민들의 용기있는 대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위대한 서사시였다. 12월3일을 전후해서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이 역사적 순간에 무슨 역할을 했는지 초현실적 계엄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왼쪽부터) 홍정원 전 국정원 1차장, 곽종근 전 육군특수전 사령관, 류혁 전 법무부 감찰관. [사진 편집=뉴스투데이]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윤석열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계몽령이라고 했다. 국회의원을 체포하라고 지시한 적도 없고, 구금해야 할 정치인 명단을 불러준 일도 없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홍장원 국정원 1차장과 곽종근 계엄사령관이 만든 프레임이라고 했다.
계몽령이란 조어는 처음에는 인터넷 사이트에 떠돌던 것인데 스카이데일리가 2025년 1월에 기사에서 쓰면서 윤석열의 언어가 되었다. 계몽령이라는 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윤석열이 처음부터 각본을 다시 써야 한다.
애초에 계몽령이었다면 윤석열은 2024년 3월부터 시작된 장군들의 모임에서 비상한 수단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장군들은 그렇게 긴장을 하고, 마신 술을 토하고, 박정희 전두환 장군 같은 사람이 왜 없는지 탓하는 글을 읽어 볼 필요가 없었다. 6월에는 장군들이 충성을 맹서할 이유가 없었다. 쇼를 하는데 무슨 맹서까지 필요하겠는가.
윤석열은 9월에 국방부 장관을 교체할 이유가 없다. 신원식이 계엄을 반대했을 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계몽연극을 하는 것이라고 설득을 하면 되었다. 노상원은 점집을 다니면서 자신과 윤석열의 운명을 알아 볼 필요도 없었다. 김용현은 북한의 오물풍선 대응으로 원점 타격을 논의할 이유가 없었다.
윤석열은 한덕수 최상목 조태열이 계엄을 말릴 때, 걱정하지 말라고 날이 밝으면 끝날 일이라고 이해를 구했으면 되었다. 김건희도 모르게 하는 일이라고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계엄이 실패로 끝난 심야에 김용현과 결심지원실에 둘이 앉아 한숨을 쉴 이유가 없었다. 김용현의 사의를 수용하지 않고, 등을 두들기면서 계몽연극이 잘 끝났다고 했으면 될 일이었다.
12월 3일 윤석열의 몽상적인 계엄을 폭로한 이들이 있다. 홍장원 국정원 1차장은 윤석열의 정치인 구금 지시를 공개했다. 곽종근 특전사령관은 회심을 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윤석열의 국회의원 연행 지시를 폭로했다. 윤석열은 이 두 명의 진술을 흔들려고 했다. 두 명은 일관되게 윤석열로부터 체포 지시를 직접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어 본인이 살려면 역공을 해야 했다. 하지만 홍장원 곽종근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진술이 차고도 넘쳤다. 류혁 법무부 감찰관은 법무부와 검찰에서 유일하게 계엄의 심장에 정의의 칼을 꽂았다.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제1차장이 지난 2월 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5차 변론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헌법재판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첫 번째 이야기. ‘보수의 품격’ 보여준 홍장원
“저 대통령 좋아했습니다. 시키는 거 다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명단을 보니까 그거는 안 되겠더라고요. 예를 들어서 위원장님 집에 가셔서 편안하게 가족들하고 저녁 식사하고 TV 보시는데 방첩사 수사관과 국정원 조사관들이 뛰어들어서 수갑 채워서 벙커에 갖다 넣었다. 대한민국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 게 매일매일 일어나는 나라가 하나 있습니다. 어디? 평양. 그런 일을 매일매일 하는 기관 어디? 북한 보위부. 이상입니다”
2025년 1월 22일, 윤석열정부의 비상계엄선포를 통한 내란혐의 진상규명 국정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 중에서 안규백 위원장의 질의에 대한 홍장원의 답변이다. 홍장원 국정원 1차장의 국회 진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평생을 군과 국정원에서 보낸 사람의 입에서 저런 발언이 나온 것이 충격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져서는 안될 일이라는 일갈은 원래 야당 시민사회 재야의 몫이었다. 그런데 국정원에서도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신념인 사람이 있구나 하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 것이다.
윤석열은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58분 경 홍장원에게 전화를 했다. 국정원장이 해외 출장 중인 것으로 잘못 알고 1차장에게 지시를 했다. “이번 기회에 싹 다 잡아들여, 싹 다 정리해, 국정원에도 대공 수사권을 줄 테니 우선 방첩사령부를 지원해. 자금이면 자금, 인력이면 인력 무조건 도우라"라고 했다. 목적어가 없었다.
홍장원은 '국정원도 모르는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져서 계엄령이 발동됐구나'라고 생각했다. 국내 장기 간첩단 사건을 적발했는가 긴급하게 추정했다. 북한 관련이거나 테러 기도가 적발되었을 수도 있는데 국정원이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면 그것도 큰 문제였다. 홍장원은 밤 11시 6분 육사 후배인 여인형 방첩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인지 물었는데 여인형이 답변을 망설이자 V(대통령) 지시로 전화한 것이라고 답을 했다. 뭐든 도우라고 해서 전화한 것이라고 했다.
홍장원 증언에 따르면 여인형이 체포 대상 명단을 불러주었다. 이재명 우원식 등의 이름이 나왔다. 홍장원은 이를 받아적다가 전 대법원장이나 대법관까지 나오는 걸 보고 '미친놈인가?'라고 생각하며 더 이상 받아적기를 그만두었다. 뒤이어 여인형이 1차, 2차 대상을 순차적으로 검거할 예정이며 방첩사에 있는 구금시설에서 조사한다고 하자 통화를 끝냈다. 나중에 기억까지 더듬어서 보좌관에게 명단을 정리하라고 했다. 여인형은 그 시간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어서 무슨 통화를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12월 6일 국회 정보위가 소집되었다. 홍장원은 기억하는 순서대로 여인형이 불러준 명단을 공개했다. 이재명 우원식 한동훈 김민석 박찬대 정청래(법제사법위원장) 조국 김어준(딴지일보 총수) 김명수(전 대법원장) 권순일(전 대법관) 김민웅(촛불행동 상임공동대표) 그리고 이름과 소속이 기억나지 않는 노총위원장 1인 등이라고 한다. 윤석열 측은 이 명단이 민주당과 내통한 작품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려고 했다.
“장원이의 어머니께서 내가 고등학생일 때 해 주신 말씀이 있다. "장원이가 육사가 아니라 창성이와 함께 서울대(이 친구는 두 곳에 모두 합격)로 갔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우리집 살림은 평생 장원이 아버지가 소위시절이나 장군시절이나 똑같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러나 내 친구는 육사를 택했고, 지금까지 조국에 헌신해 왔다. 문재인 정권시절 30여년 동안 근무한 국정원에서 7000원짜리 영수증이 하나 없었다고 2주동안 조사를 받기도 했고, 몇 해 지난 후 결국 정권이 끝나기 전에 해임 당했었다. 그런 그가 지금 민주당에 잘 보이려고 국회에서 그런 증언을 했다고? 정말 웃기는 소리다.”(홍장원의 평생의 친구라는 홍창성 미네소타 주립대 교수 페이스북 글)
1964년 경상남도 진해에서 태어난 홍장원은 아버지는 해군 제독으로 예편했고 어머니는 간호장교 출신이다. 1983년에 육군사관학교 입교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수 및 훈육장교가 선발하는 대표화랑상을 수상했다. 대표화랑상은 가장 장래가 기대되는 육군사관생도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대통령상을 받은 생도와 함께 육사의 백년탑에 이름이 새겨진다고 한다. 1992년 국가정보원으로 옮겼다. 누군가 홍장원 본인에게 '너 40년동안 뭐하고 살았니?'라고 묻는다면 평생 빨갱이 때려잡는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사명감이 강하다. 블랙요원으로 30년을 근무했다. 홍콩 시장통에서 반바지를 입고 다니며 은밀히 임무를 수행했다.
대위 진급 후 육군특수전사령부 예하 제707특수임무대대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했다. 당시 부하 중엔 1980년 광주에 다녀 온 대원들이 있었다. 나이를 먹으며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에 12.3 계엄사건이 발생했을 때 예민했다고 한다. 그는 헌법재판소와 CBS 인터뷰에서 "(비상계엄 당일) 707 요원들은 그날 헬기에 탑승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헬기에 탈 때 국회에 간다고 알려주지 않았다. 아마 특전요원 한 사람은 무기를 가지고 탄을 싣고 공격용 헬기에 오를 때 드디어 우리가 작전을 하는구나. 평양에 내릴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으로 탑승하지 않았겠느냐. 무슨 뜻이냐면 내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내가 전투에 나가는 거야. 작전하러 나가는 거야 그런 마음으로 탑승한 이들을 정치권이 이용한 것이니, 군인을 미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홍장원은 "국민들께서 군복 입은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실망을 하셨겠지만 그 순간 많은 군인들의 마음속에는 진정된 부분에서의 충성심이 있었다는 부분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공소장과 관련자들이 진술을 종합하면 윤석열은 김용현에게, 김용현은 여인형에게, 여인형은 홍장원과 조지호 경찰청장에게 구금해야 할 정치인 명단을 순차적으로 불러주었다. 여인형이 김대우 방첩사 수사단장에게 불러 준 명단은 순차적으로 하달됐다.
여인형은 3일 저녁 7시 30분경, 정성우 방첩사 1처장에게 “경찰청장의 연락처를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린다. 여인형은 밤 10시 30분경, 조지호 경찰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명단을 불러주며 정치인 체포에 대한 경찰의 협조를 구한다. 조지호는 이재명, 우원식, 한동훈이 포함돼 있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여인형은 김대우 단장에게도 명단을 불러줄 때 정성우 방첩사 1처장도 있었다. 정성우는 검찰에서 그 광경을 그대로 진술했다. 김대우는 곧바로 구민회 방첩수사단 수사조정과장에게 14명의 명단을 불러주었다. 이 인원들을 인수받아 구금시설로 이동한다는 임무도 받았다. 김대우가 미심쩍었던지 "그런데 혐의가 뭐냐. 영장없이 구금 할 수 있나. 법무실에 문의해보라"고 구민회에게 지시했다.
구민회는 밤 11시 5분 경 국방부 조사본부 소속 대령과 통화해 수도권 내 구금시설 12개, 병력 10명의 지원을 답변받았다. 그리고 경찰 국가수사본부 관계자와도 연락해 그때부터 병력 명단, 접촉 장소 등을 논의했다. 여인형은 노영훈 방첩사 군사기밀수사실장에게 수방사 벙커를 답사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정치인 구금 시설로 활용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현장에 나간 요원들은 “미친 짓”이라며 작전을 멈췄다. 국회 현장에서 시민들이 격렬하게 항의해 움직일 수도 없었다.
위의 흐름은 홍장원의 메모에 적힌 명단과 1조, 2조 축차검거와 일치된다. 노상원의 수첩에 기재되어있는 '수거대상'의 상당수와도 일치된다. 여인형의 검찰조서가 헌법재판소에서 공개되었다. 여인형은 14명의 명단과 위치 추적해 줄 것을 요청한 사실 등을 인정하였다. 다만 체포조 운영은 부정했다. 여인형에게서 전달받은 체포조 명단은 다음과 같다.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이 지난 해 12월 10일 오후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두 번째 이야기 곽종근
곽종근 특수전사령관은 다른 계엄 참여 사령관들과 달리 양심고백 차원에서 일관된 증언을 했다. 12월 10일 국회 국방위원회와 국정조사특위, 헌법재소에 출석해 윤석열의 지시를 그대로 공개했다.
윤석열은 12월 4일 0시 30~40분 쯤에 곽종근에게 전화를 했다. “아직 국회 내 의결정족수가 안 채워진 것 같다. 빨리 국회 안으로 가서 의사당에 있는 인원들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상현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장(준장)도 청문회에 출석해 곽종근으로부터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대통령 지시를 전달받았다고 증언했다. 당시 현장과 특전사 지휘통제실에 있었던 특전사령관 참모들도 ‘대통령 지시’ 관련된 진술을 쏟아냈다.
곽종근은 본회의장으로 작전팀이 들어가야 하는데 많은 민간인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두고 고민이 많았다. 김현태 707특임단장에게 “150명이 넘으면 안된다는데 들어갈 수 있겠냐? 가능하냐”고 물었다. 김현태가 “더 이상 진입이 안됩니다. 무리하시면 안됩니다”고 하여 작전을 중지시켰다. 김현태는 이때의 상황에 대해 홀로 기자회견을 열어 눈물을 흘리며 대국민사과를 했다. 내용을 모르고 명령을 이행했던 부하들을 용서해달라고 했다가 나중에 입장을 바꾸었다. 하지만 곽종근은 그날 김현태의 현장 판단이 있어서 부대 이동을 중지시킬 수 있었다며 그에게 여전히 고마운 마음이라고 했다.
국회에서 계엄령 해제안이 의결되고 난 후에도 김용현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4일 새벽 2시 13분경 곽종근에게 중앙선관위 재투입을 지시했다. 곽종근은 힘없는 목소리로 “장관님, 이미 국회에서 병력이 빠져나왔는데 선관위에 다시 들어가는 것은 안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답을 했다. 특전사 방첩부대장 김영권 대령은 당시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이것은 꼭 기록해야겠다며 볼펜을 들었고 검찰에서도 진술했다.
상황이 종료된 후 여인형이 곽종근에게 TV보고서 계엄을 알았다고 거짓 진술을 제안했다. 맨 처음에는 그렇게 말을 맞추었다. 12월 5일 김용현이 “비화폰 전화는 녹음되지 않으니 당당하게 하라“며 회유를 했다. 12월 6일 김병주 민주당 의원 조사 방문이 예정된 가운데 윤석열 김용현 전화가 왔으나 받지 않았다. 그는 마음 정리를 하고, 이날 민주당 의원들에게 일부를 그리고 후에 국방위 등에 출석해 그가 알고 있는 진실을 공개했다.
그는 마음을 바꾼 이유를 두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투입되기 전까지 비상계엄 선포를 몰랐던 부대와 부하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솔직하고 정직하게 사실을 얘기하고 반성하는 것이 군이 받은 상처를 빨리 치유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시사IN>과의 서면 인터뷰(2025년 3월) 에서 ”지금도 당시 투입됐던 부하들의 불안한 심리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고 했다.
그는 옥중에서 세차례의 입장문을 냈다. 2025년 2월 14일 검찰에 낸 자수서에서는 김용현의 회유를 받고 자수를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평생을 정직하게 살아왔다고 자주 말해왔는데 정직하지 않는 행위를 강요하는 상관을 보면서 모멸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수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이용, 회유 등등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기준과 방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털어놨다. 그는 윤석열이 전화로 한 말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교정을 했다. ”문을 부수고서라도 의원들을 끄집어내라“고 했는데 도끼를 사용하라는 지시는 없었다고 한다. 그는 자수서를 이렇게 끝맺었다.
※ 저의 생각 정리
1. 가장 본질은 12.3 당시 비상계엄의 상황과 사실을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제가 말씀드린 대통령님의 2차 통화시 지시하신 사항은 그대로다. 저는 이를 수정하거나 철회하거나 한 일체의 그런 생각이 없다.
2. 본질을 흐리기 위한 여러 가지 생각, 말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 본질(중심)은 변하지 않는다.
3. 제가 자수서를 쓴 이유와 목적이기도 하다.
곽종근은 2024년 3월 25일 중앙지역군사법원에 변호인 의견서를 통해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한다. 또한 피고인의 잘못에 대해 국가와 국민께 사죄하고 용서를 청한다"고 했다.
그는 "저는 대통령님께 이 자리에서 묻고 싶습니다"라며 "대통령님, 그날 밤 정녕 저에게 의사당의 의원들을 끄집어내라고 지시한 적이 없으십니까. 문을 깨서라도 들어가 의원들을 끄집어내라고 지시한 적이 없으십니까"라고 물었다. 곽종근은 "대통령님이 그날의 진실을 가리고 저와 부하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면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군인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질타했다.
다음은 곽종근이 법원에 제출한 '반성의 요지' 전문
존경하는 재판관님,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대한민국 군인입니다. 국가에 충성하고 명예를 존중하는 군인이자 최정예 부대인 특전사령부와 그 예하 여단 병력을 지휘한 대한민국 육군 3성 장군 곽종근입니다.
저는 1987년 2월28일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1991년 3월5일 소위로 임관하여 지금까지 34년의 기간 동안 영예로운 군인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2024년 12월3일 비상계엄 작전에 참가함으로써 되돌릴 수 없고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비상계엄 작전에 참여하면서 그것이 위헌인지, 위법인지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이 저의 과오였습니다. 적어도 병사를 지휘하는 사령관이라면 위법 부당한 명령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위법 부당한 명령이라면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그것을 거부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지 못하고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의 위법 부당한 명령에 따라 부하를 사지로 몰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국회의 기능을 저해하고, 선거관리위원회, 민주당사, 여론조사 꽃 등 총 6군데에 저희 휘하 병력을 출동시켜서 건물 확보와 경계임무를 이행하도록 하여 국헌 문란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부하들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저는 저의 과오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법적 책임도 달게 받겠습니다.
저는 어리석은 지휘관으로서 대통령의 지시와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군인의 본분으로 여기고 2024년 12월1일 계엄 발표 이틀 전에 공소외 김용현으로부터 비상계엄과 관련된 임무를 부여받았고 그 이후 이틀간의 고민 끝에 2024년 12월3일 그날 밤 부하들에게 국회 진입 및 미리 정한 총 6군데에 출동하라고 지시하고 명령했습니다. 다행히 부하들은 이 명령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헌정 질서가 무너지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하면 부하들이 나라를 살렸습니다. 그들이 현명했습니다. 저의 부대원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하들은 당시 현장 상황이 처음에 생각한 것과 너무나 다르고 또 국민들을 상대로 작전을 하는 것이 힘든 상황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저의 명령에 최대한 따르면서도 문제 되는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의 지시에 대하여 안됩니다라고 계속하여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저의 부하들이 소극적이라도 제 명령에 따른 것이 죄가 된다면 이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제 명령으로 그리되었으니 책임은 오로지 제가 지겠습니다.
저는 대통령님께 이 자리에서 묻고 싶습니다. 대통령님, 그날 밤 정녕 저에게 의사당의 의원들을 끄집어내라고 지시한 적이 없으십니까. 문을 깨서라도 들어가 의원들을 끄집어내라고 지시한 적이 없으십니까. 또한 제가 계엄해제요구의결이 된 것을 확인한 다음 2024년 12월4일 오전 1시9분경에 707 특임단과 1여단에게 이에 안전하게 국회에서 나오라고 한 지시를 대통령 본인이 저에게 하였기 때문에 따른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까?
대통령님이 그날의 진실을 가리고 저와 부하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면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군인들을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그것은 제 개인의 명예와 대한민국 군인의 명예를 짓밟는 일입니다. 군인은 명예로 사는 존재입니다. 명예를 짓밟는 행위는 군인의 생명을 뺏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아무리 어리석은 군인이라도 이것만은 참을 수 없습니다. 저는 어리석은 군인이지만 명예로운 군인으로서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헌정 질서를 문란한 죄를 참회하면서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곽종근은 3월 중순경 옥중 일기에 이렇게 썼다 윤석열이 구속 취소로 풀려난 직후에 작성한 메모이다.
"우리 군은 의리를 원하는가? 정직한 것을 원하는가? 계엄 당시 상황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 했다. 평생을 정직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 정직하게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보통 사람으로 존경 받지 못하고 이용 당하고, 바보처럼 보이고, 비참해 보이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지금까지의 나의 군 생활, 신념, 가치는 무엇이 되는가?"
류혁 전 법무부 감찰관이 지난 3월 9일 JTBC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사진=JTBC캡처]
세 번째 이야기 – 류혁
" 차를 타고 청사를 빠져나가는데 제 차 하나만 나가는 방향이었고 수많은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켜고 일렬로 줄을 지어 청사 쪽으로 들어오고 있더라고요. 다 공무원들이었겠죠. 정말 비현실적인 장면이었어요. 이게 뭔가 싶고… 그때 저는 제 차가 청사 출구에서 막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12. 3 윤석열의 초현실적인 비상계엄을 접하고 법을 지키는 법무부와 검찰에서 유일하게 사표를 던진 이가 있다. 검사 출신의 류혁(58) 법무부 감찰관이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밝힌 그날 밤의 표정은 아주 인상적이다. 불법적인 계엄에 종사하기 위해 동굴 속으로 몰려오는 차량 행렬, 유일하게 계엄에 저항하여 동굴 밖을 빠져나가는 단 한 대의 차량. 류혁은 그날 밤 계엄에 저항한 유일한 검사였다.
류혁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들이 깨웠다. 가짜 뉴스인가 했는데 TV로 보니 실제 상황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법무부에 남아있으면 계엄에 종사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출근을 안하고 그만두기로 결심을 했다. 그런데 TV를 보니 윤석열이 '일거에 척결한다'고 하는 등 조악한 언어를 반복해서 뱉어냈다. 법무부 청사에 직접 가서 항의하고 사표를 내기로 했다. 과천 법무부 청사에 밤 12시 직전에 도착했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김석우 차관과 실국장 등 15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장관의 발언을 끊고 ”혹시 계엄 관련 회의입니까?하고 물었다. 박성재가 아주 언짢은 표정으로 “네 그래요"라고 했다. 곧바로 '‘그러면 저는 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계엄과 관련한 일체 지시나 명령에 따를 생각 없습니다”라고 하자 박성재가 큰 소리로 불만이 가득해서 “그렇게 하세요'”라고 했다.
'법과 질서의 확립'이란 구호가 있는 법무부 메모지에 사직서를 썼다. 그만두어야 할 사람들은 저들인데 공연하게 자신이 그만두어야 하는 현실에 화가 났던지 그는 회의실로 돌아갔다. 회의실로 다시 들어가서는 “아무리 여야가 극한 대립을 해도 그렇지 계엄이 뭐냐”고 소리를 질렀다. 윤석열의 계엄에 어퍼컷을 날린 셈이다.
그는 4일 새벽 2시경 경향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윤석열은 반란 수괴“라고 못박았다, 1997년 검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1995~1997년 12.12 군사쿠데타에 대한 기소와 재판 자료를 정독했던 기억이 있다. 내란죄에 대한 대법원의 판례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회의에 참석해 부화뇌동할 수가 없어 그냥 사표를 내고 나와버렸다. 이번 계엄은 헌법 위반이자 내란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윤석열의 계엄 선포는 전두환의 12.12사태 보다 악질적이다. 당시에는 국가 소요 사태, 폭력 사태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다. 계엄 선포는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해야 하는데 국회에 군을 진입시키는 범죄 행위가 이미 실현됐다“며 내란죄가 성립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찍소리는 하고 죽자 싶었어요. 사직서를 내고 난 뒤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있고요.”(오마이뉴스 인터뷰)라고 당시의 심정을 기억했다.
그는 매일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한 시간씩 운동을 한다. 일주일 중 5일은 한강을 뛰고, 나머지 이틀은 자전거를 타거나 트레이닝을 한다.
“저는 바른 판단을 하는 데에는 건강한 몸,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감찰관으로 일하면서도 15년째 운동을 하고 있는데 가끔 불가피한 일이 생겨 운동을 못 하고 출근하게 되면 그날은 판단력이 무뎌지는 게 확실히 느껴져요. 자연스럽게 술이나 과한 회식은 줄이게 됐죠. 저도 젊을 땐 조직에 어울리면서 술을 많이 마셨지만, 나이 들면서도 사람이 깨어있으려면 그런 식으로 술을 많이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술로 한몸이 돼서 뒤엉키고, 사람이 곧게 서지 못 한 상태에서 조직 논리에 포섭되면 올바른 판단은 요원하다고 생각해요."(오마이뉴스)
저속 노화 전문가 정희원 교수는 술이 권력자의 판단을 그르친다며 윤석열이 계엄을 일으킨 원인 중의 하나가 알콜 중독이라고 지적했다. 류혁 전 감찰관의 얘기는 법무부와 검찰의 조직문화를 에둘러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