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실록<2부>, 초현실 비상계엄 (29)] 운명의 날 12월 3일 심야의 재구성

민병두 입력 : 2025.03.22 06:57 ㅣ 수정 : 2025.03.2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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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선포를 실록으로 엮어본다. 윤석열은 언제부터 쿠데타를 계획했을까? 윤석열은 무슨 일을 계기로 확신범이 되었을까? 12월3일은 우리나라가 처한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최고권력자 1인의 독단으로 나라가 형편없이 흔들렸는가 하면 국회와 시민들의 용기있는 대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위대한 서사시였다. 12월3일을 전후해서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이 역사적 순간에 무슨 역할을 했는지 초현실적 계엄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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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편집=연합뉴스]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박정희의 5.16쿠데타에는 3500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윤석열의 12.3 쿠데타에는 군인 1500명이 동원되었다. 특수전사령부는 1139명, 수도방위사령부는 211명을, 방첩사령부는 국회의원 체포조 49명을 포함하여 200여명을 투입했다. 정보사는 북파공작을 수행하는 HID 30여명을 보냈다. 육본과 합참 인원 그리고 국회 외곽을 통제한 경찰 병력까지 합치면 그 수는 2000여명을 넘어선다.

 

이 숫자는 표면적인 것이다. 만약 계엄이 두시간 반만에 끝나지 않고 지속되었다면, 국회 장악에 성공했더라면 계엄군의 증원이 예정되어 있었다. 제7공수특전여단과 제13특수임무여단은 12·3 내란사태에서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서울로 올라오게 예정되어 있었다. 곽종근 전 육군특수전 사령관은 국회 국방위원회(12월10일)에서 두 여단이 출동 대기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두 부대 인원을 합치면 내란 당일 작전에 투입된 계엄군 1139명의 두 배에 달한다. 이 부대들이 언론사 장악 등에 동원되었을 수도 있다. 윤석열이 계몽령이라고 했던 12.3 비상계엄의 총 병력은 박정희가 목숨걸고 감행했던 5.16쿠테타의 동원규모와 맞먹는다.

 

긴박했던 12월 3일의 계엄일지를 재구성해 본다. 실록 옴니버스의 취지에 맞춰 그날의 주요 장면과 인물 중심으로 서술한다. 바지사장 박안수 계엄사령관에게 법대로 해야한다고 한 권양현 계엄과장, 이진우 수방사령관의 국회의원 끌어내라는 지시를 거부한 조성현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장(대령), 중앙선관위 서버 복사를 명령한 여인형 방첩사령관에게 불법이라고 말한 윤비나 법무실장(대령) 등이 12월 3일의 빛나는 인물들이다. 곽종근의 설사도 계엄의 밤에 변수가 되었다.

 

(1) 박안수 계엄사령관이 되다

 

12월 3일 오후 4시 김용현이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불러 밤 9시 40분에 장관실로 와서 대기하라고 명한다. 밤 10시 20분 김용현이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한다. 이 자리에서 박안수는  계엄사령관 지위를 부여받는다. 김용현은 밤 10시 28분, 계엄이 선포되자 마자 군단장급 이상 지휘관과 화상회의를 한다. “대통령님의 뜻을 받들어 임무 명령을 하달한다”며 모든 군사활동은 장관인 자신이 책임진다고 했다. 명령에 불응할 경우에는 항명죄로 다스린다고 엄포를 놓는다.

 

국군조직법이 1991년 개정되면서 군 서열 1위인 합동참모의장이 국군 전체의 작전지휘관이 됐다. 전시에 대비한 계엄사령관의 직책도 합참의장이 맡게 되었다. 따라서 육군 본부에 있던 계엄과도 합참으로 옮겼다. 육군 총장인 박안수가 계엄사령관을 맡게 되면 합참의 지원을 받기 어렵게 된다. 윤석열과 김용현은 이런 직제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안수를 계엄사령관으로 낙점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서 고속 승진한 박안수가 비상계엄의 바지사장에는 적격이었다고 보았던 것 같다.

 

해군 출신인 김명수 합동참모의장은 사전에 계엄 관련 정보를 공유받지 못했다. 밤 10시 30분. 급히 합참 청사로 출근한 뒤에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계엄 업무의 수장이 되어야 할 합동참모의장이 계엄 선포 전까지 전혀 몰랐다.

 

밤 11시 00분. 비상계엄 포고령 1호가 박안수 육군참모총장 명으로 공포되었다. "자유대한민국 내부에 암약하고 있는 반국가세력의 대한민국 체제전복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2024년 12월 3일 23:00부로 대한민국 전역에 다음 사항을 포고한다“

 

박안수는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9조(계엄사령관 특별조치권)에 의하여 영장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14조(벌칙)에 의하여 처단한다"고 밝혔다. 박안수는 윤석열의 지시로 국회 봉쇄 업무를 지휘하게 될 조지호 경찰청장에게 포고령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박안수는 국회에 출석해서 계엄령 발동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 군대 이동은 김용현의 지시로 이뤄졌고 언론 보도를 통해 알았다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는 포고령도 자신이 작성하지 않았다며 ”계엄 관련 전문성이 없어서 합참 계엄과장 등을 불러 토의하고 있는데 계엄군이 투입되고 포고령이 발령됐다“고 발뺌했다. 

 

권영환 계엄과장은 국회 국정조사 특위 청문회에서 ”군인 복무 기본법 222조 ‘정직의 의무’에 따라 있는 알고 있는 사실을 용기를 내서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겠다“며 증언을 했다. 12월 4일 국회에서 계엄 해제 요구안을 의결하자 그는 계엄실무편람을 펼쳐서 ”계엄법에 따라 지체없이 계엄을 해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박안수가 ”일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일머리가 없다“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박안수는 계엄이 유지되도록 하는 방법은 없는지, 일(계엄)이 되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했는데 그는 법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권영환 과장은 2017년 11월 13일 오후 3시 15분 판문점, 군용 차량을 몰고 내려온 북한군 1명을 구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북한군은 차에서 내려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뛰어내려오다가 북에서 쏜 총을 맞고 군사`분계선 이남인 자유의 집 서쪽 담장 아래 쓰러졌다. 오후 3시55분 권영환 경비대대장(중령)은 중사 2명과 함께 낮은 포복으로 부상당한 북한군에게 접근하여 구출했다. 그는 “북한군을 구하기 위해 부하를 보내지 않고 왜 직접 들어갔냐”는 물음에 “차마 아이들(병사들)을 보낼 수는 없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박안수는 2013년 6월 MBC예능 ‘진짜 사나이’ 해룡연대편에 출연했다. 박안수 연대장이 연예인 출연자들의 전입 신고를 받았다. 누가 ‘진짜 사나이’이고 누가 ‘진짜 군인’인지 계엄 상황을 통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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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2) 수방사 합동방공작전통제소의 헬기 비행 허가 지연

 

12월 2일부터 특전사 707특수임무단 외부훈련이 모두 취소되고, 주둔지 대기명령이 하달됐다. 3일 낮엔 합동훈련과 전술평가가 모두 취소됐다. 계엄군으로 출동하기 위한 출동 군장검사 등의 준비가 시작됐다. 모두 군장검사를 마쳤다고 707부대 텔레그램방 단체방에 보고된다. 헬기를 통해 투입이 가능한 경기도 이천의 707특임단은 국회의사당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1공수 여단(서울 강서구)과 함께 계엄군의 주력으로 편성되었다.

 

김용현은 비상계엄 3일 낮 1~2시 곽종근에게 "헬기를 사전에 특전사에 가져다 두라"고 지시했다. 곽종근은 계엄령이 발동하기 전에 부대를 움직이는 것에 심리적 부담을 느꼈다. 김세운 특수전항공단장에게 "내 지시 없이는 헬기를 띄우지 말라"고 연락했다. 혹시라도 성질 급한 김용현이 직접 지시를 내려서 항공단 헬기가 움직일까봐 내린 조치이다.

 

3일 오후 5시 육군특수전사령부 소속 13특수임무여단과 707특수임무단이 ‘격리 지역 활동’에 들어갔다. 작전에 투입되기 직전에 격리된 지역에서 준비, 대기하는 활동을 뜻한다. 작전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국방부 장관과 사령관이 북한 동향이 심각하다며 헬기를 타고 실제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고 지시한 것으로 고지했다. 텔레그램 단체방에도 떴다. 당장 출동을 준비하라고 했다. 오후 5시 10분쯤, 특전사령부 연병장에 헬기가 병력을 태우기 위해 내려야 하니 축구 골대 등 체육시설을 다 치우라는 지시가 내렸다. 가로등 불이 있으면 헬기가 밤에 내리기 어렵기 때문에 주변 가로등도 다 소등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밤 8시 707특수임무단 단원들에게 문자메시지 등을 통해 실제 출동 예고와 대기명령이 하달됐다. 밤 10시 30분에 바로 휴대전화 회수가 이뤄졌다.

 

밤 10시 27분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김용현은 방송이 나가는 중에 10시 25분 곽종근에게 전화를 걸어 "사령관,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부대가 어딘가? 헬기로 빨리 국회로 이동시켜라"라고 지시했다. 곽종근은 5분 후 특수전항공단의 헬기 12대를 이천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천에서 특전사를 태운 헬기가 서울 항공(수도권 비행제한구역 R75)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수방사의 비행 허가를 받아야 한다. 만약 즉각적인 비행 허가가 떨어졌다면 국회가 계엄해제요구안을 결의하기 훨씬 전에 의사당에 도착했을 것이다.

 

밤 10시 48분 특수전항공단 602항공대는 수방사에 비행 승인 요청을 했다. 수방사는 계엄령이 발동된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계엄 하에서도 부대의 비행목적을 설명해야 승인할 수 있다. 그것이 규정이다. 602항공단은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니 목적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국회를 진압하러 가는 것인지, 국회에 침투한 테러범들을 체포하러 가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헬기 투입이 늦어지자 김용현이 곽종근을 닦달했고, 곽종근은 10시 50분부터 7차례나 김세운 특수전항공단장에게 독촉을 했다.

 

계속된 요청에 수방사는 최상급 부대인 합동참모본부에 보고를 했다. 판단을 구했다. 하지만 윤석열과 김용현은 계엄사령관을 박안수로 내정했다. 김명수 합참의장은 계엄에 대한 지휘권이 없었다. 김명수의 지휘를 받는 합참은 수방사에 “관련 사항이 없다”고 통보했다. 계엄 작전 내용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므로 접수된 관련 사항이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602항공단의 요청이 거듭되자 수방사는 육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에 판단을 구했다.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니 번지수가 맞다고 생각했다. 이진우가 조정에 나섰다. 내용을 파악하고 정보작전참모본부가 비행 승인을 한 것이 밤 11시 31분이다. 최초의 비행 승인 요청에서 43분이 지났다. 그 사이에 국회는 경찰이 봉쇄하고 있었다. 계엄의 주력인 특전사는 비행 명령을 거의 한시간 가까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천에서 밤 11시 31분에 이륙한 특전사는 11시 43분 국회 운동장에 도착했다.

 

1년 가까이 삼청동 안가와 한남동 공관에서 윤석열의 소폭 고문에 토하기까지 하며  충성을 맹서하던 곽종근과 이진우. 이들은 정작 계엄에 필요한 도상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원래가 소심하던 곽종근의 태업도 작용했다고 본다.

 

(3) 곽종근의 설사, 김현태의 단전

 

12월 3일 밤 11시 40분 윤석열은 헬기로 이동 중인 공수부대 상황도 점검했다. 그는 곽종근에게 전화해 ”아직 국회 내에 의결정족수가 안 채워진 것 같으니 빨리 국회 안으로 들어가서 의사당 안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와라”고 했다.

 

블랙호크 헬기 3대가 줄지어 한강을 가로질러 국회의사당 뒤편 운동장에 착륙했다. 현장에 있던 시민들은 진짜 계엄임을 실감했다. 착륙한 헬기에서 군인들이 하나 둘씩 내렸다. K1 기관단총과 야간 투시경, 단검으로 무장했다. 1980년 5월 광주가 연상되는 순간이었다. 빠르게 국회 본청으로 이동하는 만큼 국회 보좌진과 사무처 직원, 그리고 시민들도 기민하게 대응했다. 두렵고 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제1전선에  위치해 있었다.

 

국회 바깥에선 버스를 타고 군인들이 도착했다. 스타렉스와 코란도 차량, 한국군 험비인 소형 전술 차량 등이 동원됐다. 전술차량이 도착하는 순간, 시민들이 막아섰다. 나를 밟고 가라고 했다. (12월 3일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은 제30화에서 서술)  12월 3일 밤 11시 48분, 국민의 군대가 민의의 전당 국회를 포위했다.

 

특전사 예하 707특임단은 최정예 대원들로 구성된 대테러 부대다. 검은색 유니폼에 위장 무늬 전술 조끼를 입고 나타난 그들은 그믐달로 어둠이 짙은 국회의사당 정문을 향해 전진했다. 그들의 임무는 본청에 진입하여 국회의원들을 연행하는 것이다. 녹색 계열 전투복을 착용한 1공수여단은 의사당 본청 차단 임무를 수행했다. 707특임단의 업무 수행을 엄호하는 것이다. 1공수여단은 특전사 부대들 중 최초로 창설돼 특전사의 모체라고 할 수 있다.

 

12월 4일 새벽 0시 30분. 윤석열은 상황이 다급하게 돌아감을 알 수 있었다. TV는 국회 본회의장을 비추고 있었다. 국회에 들어온 의원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의원들은 어느 정도가 본회의장에 모였는지 계엄군이 알 수 없도록 적당한 곳에 흝어져 있었다.

 

윤석열이 곽종근에게 비화폰으로 전화를 걸어 “국회 안에 빨리 들어가서 의사당 안의 사람들을 빨리 데리고 나와라“ “도끼로 문짝을 부숴서라도 끌어내라”, “전기를 차단하라”고 연달아 지시를 했다. 곽종근은 "알겠습니다, 충성"이라고 대답했다. 사실 국회 본회의장 정문은 도끼로 부수지 않는 한 열리지 않을 정도로 탄탄하다. 중세시대에 공성전을 할 때 동원되는 무기 같은 것이 있어야 열린다. 밖에서 수십명이 밀어봤자 소용없다. 발길질 같은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윤석열은 이같은 상황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헌법재판소에서 국회 쪽 대리인이 “(대통령이) 증인에게 데리고 나오라고 지시한 대상이 국회의원이 맞는가”라고 묻자, 곽종근은 “정확히 맞는다”고 답했다. 윤석열과 김용현의 지시를 번갈아 받았으며 지휘관들이 모인 화상회의 중 켜둔 마이크를 통해 예하 부대원들도 청취했다고 설명했다. 들은 사람이 수십명인데 거짓으로 답을 할 수는 없었다.

 

이어 “당시 707특임단 인원이 국회 본관에 가서 정문 앞에서 대치 상황이었고, 본관 건물 안 쪽으로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 상태로 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대통령이) 말씀하신 ‘의결정족수 문제’, ‘안에 인원 끌어내라’는 부분들이 당시 본관 안에 작전요원이 없어서 당연히 의원이라고 이해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김용현은 윤석열 탄핵심판에 증인으로 나와 당시 ‘곽종근에게 끌어내라고 지시한 대상은 의원이 아닌 요원이었다’고 주장했고 윤석열도 이에 동조했는데 지시를 직접 받은 곽종근이 이런 주장을 정면 반박한 것이다.

 

군사전문가인 박성진 전 경향신문기자는 ‘용산의 장군들’에서 이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곽종근은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에 윤석열과 김용현의 지시를 부하 지휘관에 전달하는 걸로 대신했다. 곽종근은 이상현 1공수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님이나 장관님 이런 상부에서 화상회의를 하고 있는데, 국회의원들이 의결하려고 하는데 ‘문을 부숴서라도 국회의원들을 끄집어내라. 안되면 전기라도 끊어라’라고 말씀하셨다“고 전달했다. 이상현 여단장은 ”사령관님, 상부에서 지금 국회의원들을 의결 못 하게 문을 부숴서라도 끄집어내라고 지시하셨단 말씀이냐“고 되물었다.  (군대에서는 상관이 명령을 하면 그대로 복창을 해서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확인한다) 곽종근이 ”아 그런데...“하며 말을 흐리던 차에 전화기는 꺼졌다. 곽종근은 명령을 하는 대신에 전달을 했다. 이런 경우 군 간부들은 ‘설사했다’는 은어적 표현을 사용하다. 지휘관이 사후 있을지 모를 책임 논쟁을 피하기위해 확실한 지침을 주는 대신 면피성으로 명령 전달만 한다는 것이다.”

 

모호한 지시가 전달되는 가운데 도끼를 들고 행동에 옮길 대원은 없었다. 곽종근은 김현태 단장이 이끌던 707특임대원들이 본회의장 안으로 진입하여 의원들을 끌어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숫자도 턱없이 부족했다. 1층 창문을 깨고 들어간 특임대원들은 불과 20명도 안되었다.

 

대안으로 국회의 전기를 끊는 방법을 논의했다. 곽종근은 지휘통제실에 모인 참모들에게 "국회 전기를 끊어 표결을 못 하게 하는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고 지시했다. 대원들은 야간투시경을 장착하고 있어 단전 상황에서도 작전이 충분히 가능하다. 전기를 끊으면 국회 본회의장에서 표결을 진행할 수 없다고 보았다. 

 

계엄 5개월 전인 2024년 7월 3일 특전사 1공수여단은 원활한 대테러 작전 임무 수행을 위해 필요하다며 국회 사무처에 설계도를 요구했다. 국회 사무처는 이를 거부했다. 김현태 707 특수임무단장은 헌법재판소에 나와  “단전은 특전사령관께서 12월 4일 0시 30분에 대통령 전화를 받고 스스로 무언가 하기 위해 생각해 낸 여러 가지 중의 한 가지”라고 답변했다.

 

12월 4일 새벽 0시 49분 우원식 국회의장은 본회의 개의를 선언했다. 0시 50분경 곽종근은 김현태에게 전기라도 끊을 수 있겠냐고 물었고, 김현태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답했다. 7명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새벽 1시 1분. 국회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재석 190인 중 190인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새벽 1시 6분 26초. 계엄군은 분점함을 열고 일반조명 차단기 및 비상조명 차단기를 내려 국회 본관 지하 1층 전력을 차단했다. 본회의장은 2층에 있었다. 단전은 5분 48초 지속되었다. 국회 사무처 직원이 비상계엄해제 결의안의 가결되었음을 고지하자 이들은 차단기를 다시 올린 뒤 철수했다.

 

새벽 0시 28분. 김용현은 곽종근에게, 곽종근은 이상현 1공수 여단장에게 민주당사로 출동할 것을 지시했다. 특수전 병력 112명은 4일 새벽 0시 56분께 국회의사당 맞은 편에 있는 민주당 중앙당사로 출발했다. 새벽 2시 35분까지 당산역 근처에서 대기했다가 철수했다. 3공수여단은 전시 계엄지휘소로 예정된 경기 과천 B1벙커로 출동했다. 유사시 북한 지휘부 제거를 주 임무로 해 ‘참수 부대’라 불리는 특전사 13특임여단은  작전 대기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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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4) 이진우와 조성현, 누가 진짜 군인인가

 

윤석열은 TV로 국회 상황을 지켜보면서 전체 상황을 지휘했다. 사실상의 계엄사령관이었다. 이진우 수도방위사령관에게 수시로 전화해 독려했다. 입에 침이 마르고 있었다.  “아직도 (국회에) 못 들어갔냐” “본회의장으로 가서 4명이 1명씩 들쳐업고 나오라고 해”, “문 부수고 들어가서 끌어내라” “총을 쏴서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끌어내라”며 구체적으로 국회를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국회의원들을 모두 제압하라는 윤석열의 명령은 국회에서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된 이후에도 계속됐다. 12월 4일 새벽 1시 3분께 이진우에게 전화해 “국회의원이 190명이 들어왔다는데 실제로 190명이 들어왔다는 것은 확인도 안 되는 것”이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 해제됐다 하더라도 내가 2번, 3번 계엄령 선포하면 되는 거니까 계속 진행해”라고 지시했다. 이 정도면 이성이 마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윤석열은 헌법재판소에서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거짓이라고 부정했다. 이진우는 검찰에서 했던 진술을 헌법재판소에서는 형사재판중이라 답변이 제한된다며 피해나갔다.

 

계엄의 밤에서 가장 주목되는 인물 중의 하나가 조성현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장(대령)이다. 조성현 대령은 12월 3일 오후 6시쯤 퇴근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진우가 밤 9시 48분, 밤 10시 5분, 밤 10시 24분 이진우가 계속해서 전화를 했다. “상황이 있는 것 같으니, 수호신 TF(대테러 특수임무 TF)를 소집하고, 사령부로 들어오라”며 전 간부를 소집하라는 지시였다.

 

이진우의 명령에 따라, 제1경비단 소속 136명에게 국회 출동을 지시했고 이 중 38명을 국회 경내에 투입시켰다. 비상계엄과 국회가 어떤 관계인 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국회에 시민들이 많이 몰렸다는 이야기도 보고를 듣고, 밤 11시 19분 ‘첫째는 시민 안전 확보에 중점을 두고 민간인과 접촉이나 충돌을 주의하라. 두 번째는 민간인과 충돌 우려가 있으면 보고하라. 세 번째는 가지고 간 총기는 다 차량에 두고 방탄 헬멧과 방탄복만 착용하라’고 지시했다.

 

밤 11시 51분 진입작전이 시작되었다. 이진우는 조성현에게 ‘경찰의 협조를 받아 국회 울타리 내부로 진입해, 국회 본청에 출입하는 인원을 통제하라’고 지시했다. 김용현 이진우는 양재응 국회협력단장에게 7번이나 전화를 걸어 길 안내를 부탁했으나, 양재응은 협력하지 않았다. 12월 4일 새벽 0시 10분이 되어서야 35특임대대 선발대 중 15명이 국회 담을 넘었으나 그 안에도 국회의원 보좌진 등이 너무 많아서 상항을 장악할 역량이 되지 않았다. 조성현은 적극적으로 군사 작전을 전개하지 않고 대치를 피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보고 의사당 뒤편 충전소 인근에 모여 대기하도록 했다.

 

새벽 0시 40분경, 이진우가가 조성현에게 전화를 했다. ‘국회 본청 내부로 진입해 국회의원을 외부로 끌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알겠다’고 답을 했으나, 부하에게는 하달하지 않았다. 5분쯤 지나, 이진우에게 “단독으로 할 수 있는 작전이 아니다. 특전사령관과 소통해달라”고 재고를 요청했다. 조성현의 건의를 받고 이진우는 “너희는 들어갈 필요 없다. 이미 특전사가 국회 본청 내부로 진입했으니, 너희는 외부에서 지원하라”고 명령하면서,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철회했다.

 

조성현은 탄핵심판정에서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진술했다며 ”“나는 의인이 아니다. 내가 거짓말을 해도 내 부하들은 다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일체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조성현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사후적이지만 우리가 잘못한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는 걸 뼈아프게 느끼고 반성하고 있다. 나의 미성숙한 판단 때문에 부대를 위태롭게 한 부분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책임감을 통감한다. 부하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그것이 걱정이다.”고 답했다. 

 

(5) 여인형의 중앙선관위 서버 탈취를 막은 윤비나 대령

 

12월 3일 오후 6시경 문상호 정보사령관과 김봉규 대령, 북파공작원 5명, 정보사 특수임무요원 20여명이 정보사령부 100여단 판교 사무실에 모였다. 밤 10시 30분 정보사 계엄군 10여명이 과천 중앙선관위에 진입한다. 밤 10시 43분 계엄군이 약 2분 동안 선관위 행정 보안 서버 등을 촬영한다.

 

여인형은 정성우 방첩사 1처장에게 "전산센터 통제, 서버 커피, 어려우면 서버 자체를 떼어 오라"고 지시했다. 정성우 방첩사 1처장은밤 11시 50분 "사령관님 지시로 너희들은 내 지시를 받는다. 장관님께서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항명죄로 조치한다"며 100명의 대원은 4개팀으로 나누어 과천 중앙선관위, 관악 중앙선관위, 수원 선관위 연수원, 여론조사 꽃등에 대원들을 파견했다, 하지만 영장이 발부되었는지, 포고령에 따른 압수 수색이 가능한지 등에 대한 자체 논의가 있었다. 

 

법무관 7명에게 선관위 서버 복사 및 반출에 대해 위법한 증거인지 물었다. 윤비나 방첩사령부 법무실장과 7명의 법무관들은 “기본적인 법적 절차도 준수하지 않는 명령”이라고 입을 모으며 강력히 반대했다. 정성우 1처장은  대원들에게 선관위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지시했다. 선관위 서버 확보 임무를 맡은 송제영 대령은  부대원들을 인근 편의점에서 대기하도록 했다. 

 

윤비나 대령은 국회 국방위에서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는 게 주요 이유였다", "포고령 발령 전의 행위로 압수 등 수사를 해서는 안 된다", "압수 절차 등을 위해서는 최소한 범죄 혐의를 특정해 정식 입건해야 한다"라고 발언했다. 박범계 민주당의원은 윤비나 대령을 포함해 불법적인 지휘 명령에 반대한 7명의 법무장교에게 “기관 내 정직하고 정의로운 직원에 대해서 경의를 표한다”고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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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TV 캡처]

 

(6) 조지호 경찰청장의 망설임

 

윤석열은 ‘2200 국회, 2230 민주당사’ 등의 메모가 적힌 지시서를 조지호 경찰청장과 김봉식 서울경찰청장에게 식사 자리에서 교부했다. 윤석열은 종북세력을 처단해야 한다는 취지로 계엄선포 계획을 말했다. 윤석열과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온 조지호 경찰청장과 김봉식 서울경찰청장이 필요한 조치를 논의했다.

 

논의 결과 국회 출입을 전면 차단하기로 한다. 목현태 국회 경비대장은 밤 10시 30분경부터 국회의원의 의사당 진입을 통제한다. 김봉식은 10시 46분 서울청 경비안전계장에게 국회를 전면 차단할 것을 지시했다. 5개 기동대가 동원되었다. 10시 48분 국회 출입이 전면 차단되었다. 밤 10시 55분 국회경비대는 의사당으로 진입하는 모든 출입문을 봉쇄하고 5m 간격으로 병력을 배치했다. 몸 싸움이 벌어졌다. 국회의원에 한해서 일시 통로를 열어주었다. 밤 11시 38분 경찰이 국회 출입을 전면 통제한다.

 

윤석열은 조지호 경찰청장에게 전화해 ”국회 들어가려는 국회의원들 다 체포해, 잡아들여, 불법이야, 국회의원들 다 포고령 위반이야, 체포해”라고 명령했다.  조지호는 검찰 조사에서 "대통령이 굉장히 다급하다고 느꼈다. 그 뒤에 다섯번의 통화 역시 같은 내용이었고, 여러 번 전화에서도 똑같은 내용과 톤으로만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10시 38분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가 전 국회의원을 국회로 집결하라고 명한다. 10시 40분에는 우원식 국회의장이 공관을 나와 국회로 향한다. 우원식 의장은 밤 11시쯤 “모든 국회의원은 지금 즉시 본회의장으로 모여달라”고 공지했다. (이재명의 유튜브, 한동훈의 선택, 우원식의 월담은 다음 제30화에서 다룬다)

 

윤석열은 국회에서 계엄 해제를 의결한 후 두차례 더 조지호 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봉쇄 해제 지시를 하지는 않았다. 12월 4일 새벽 5시 마지막 통화에서 윤석열이 "조 청장" 이라고 하자 조지호는 "죄송하다"고 했다. 윤석열은 "아니야, 수고했어. 덕분에 빨리 끝났어"하고 전화를 끊었다. 조지호는 "뼈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제대로 봉쇄를 하지 않아 이렇게 됐다는 비아냥으로 들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 헌법재판소 진술에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정했다.

 

이렇게 계엄의 밤은 끝났다. 어김없이 새벽은 왔다. 12월 4일에는 12월 4일의 태양이 떠올랐다. 윤석열은 긴장과 초조로 밤을 꼬박 세웠다.  윤석열 정부가 무너지는 방아쇠가 된 명태균은 이날 숙면을 취했다. 명태균은 11월 15일에 구속 수감되어 12월 3일에 기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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