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200)] 재활위해 발버둥치는 영어반의 DJ(상)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3.09.07 09:11 ㅣ 수정 : 2023.09.07 09:11

연음으로 발음하는 강사들 강의를 전혀 이해 못해 벙어리가 되어 고문 받던 지팡이맨 DJ
영어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옆의 동료들이 활짝 웃으면 그냥 따라 웃는 것도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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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4월25일 새벽에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건강이 회복되어 대대장으로 먼저 취임했던 김종완과 이재준 동기[사진=연합뉴스]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유난히도 폭염이 기승을 부렸던 1994년이 막을 내리고 신년이 되면서 필자는 6개월 기간의 ‘영관영어반’ 과정을 다니기 위해 당시에 성남에 위치한 종합행정학교로 출근했다.

 

집이 원거리인 학생장교들은 독신자 숙소가 제공되어 필자는 매주 토요일에는 동두천으로 향하는 주말부부 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했고 얼마뒤에 아이들이 중학교 시절부터는 전역할 때까지 계속됐다.

 

대대장반 교육과정중인 지난 4월25일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던 이재준과 김종완 동기는 완전하게 회복되어 이미 대대장으로 취임하여 멋있게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고, 영관영어반 과정을 다니는 필자는 아직도 지팡이에 의지하여 절뚝거리며 걸어야하는 실정이라 영관영어반에서는 DJ로 불리웠다.

 

당시에는 재활치료를 병행하면서 영어반 교육을 마치고 충북지역 37사단으로 배치될 즈음이면 2년 가까이 재활치료를 끝내고 지팡이도 던져버리며 완전하게 회복된 상태가 될 것이지만 동기생들보다 매우 늦게 대대장 근무가 시작될 것으로 예상했다.

 

한편 영관영어반 과정은 입교시의 소양시험 성적순으로 총 7개 학급으로 편성했는데 필자는 가장 수준이 낮은 7반에 소속되어 영어 학습에 임했다.

 

동기생들은 대대장직을 수행하는 까닭에 학생장교로 포함된 동기생이 없었지만 다행히도 과거 승리부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양태수, 나대일, 김형배 선배 등을 포함하여 많은 선배 동료들을 다시 만나는 해후의 시간도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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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반 교육 모습[사진=군사영어학교]

 

 ■ 외국인 강사의 강의와 대화실습에서 벙어리가 되어 고문을 당하던 DJ

 

필자는 가장 수준이 낮은 학급에 편성되어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영어 수업을 받았는데도 영어 강사들이 연음으로 발음하자 첫 강의 시간부터 벙어리가 되는 고문이 시작됐다.

 

외국인 강사인 앤드류피킨스, 제니카 등의 수업 시간에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한광주 중령 등 한국인 교관들은 답답한지 가끔 한국어로 이야기를 해주어 다행이었지만 수업 시간에는 일체 한국말을 못하도록 통제했다.

 

심지어는 외국인 강사가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필자를 보고 김대중 대통령 같다며 DJ라고 별명을 지어주었는데 도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고 옆의 동료들이 활짝 웃어서 필자도 그냥 따라 웃었다. 휴식 시간에 옆 동료에게 물어보니 그때야 강사가 필자에게 DJ라는 별명을 붙혀주었다는 것을 알고 창피했지만 부족한 자신에게 더욱 책찍질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발표를 시키면 더 큰 고문이었다. 강사들은 발음 하나하나를 지적하며 다시 말하게 했고, 퇴근후 독신자 숙소에서 큰 소리로 발음 연습했고, 문장도 통체로 암기하며 다음 수업시간을 준비했다. 

 

답답해하는 필자를 지켜보던 박종래(육사34기) 선배가 어깨를 툭 치며 “Well Begun is Half Done”라고 했는데 그것도 이해 못해 다시 물어보니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이었다. 창피함이 반복되면서 영어반 입교는 필자 자신의 부족함을 절실하게 깨닫는 기회였고,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남다른 학습 방법이 필요함을 느꼈다. 우선 만만한 외국인 강사를 물색했다. 마침 53세의 비교적 고령에 배가 불뚝 튀어나온 브래그돈(Bragdon)이 포착됐다. 서투른 영어로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냐고 제안했고 주중 수업후 저녁시간이나 토요일 집으로 귀가하기 전에 그와 항상 식사를 같이했다.

 

그는 형편이 어려운지 몰골이 초라했고 중국집의 볶음밥을 너무 좋아했다. 게다가 소주 한잔을 들이키면 어색함이 사라지며 서투른 영어가 필자의 입에서 마구 쏟아졌고 그도 맞장구를 쳐 주었다. 

 

브래그돈도 가끔 한국어로 이야기하며 점점 가까워졌는데, 심지어는 본국에서 살기가 힘들어 한국에 왔지만 돈을 벌기가 어렵다며 안타까움도 토로하며 조촐한 한끼 식사 대접마저도 고마워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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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제복은 영원한 애국이다(오색필통,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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