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 깃발 든 중국혐오, 2025 조기대선의 변수가 되나 빨강부족의 숭미혐중(崇美嫌中) vs 파랑부족의 연미협중(聯美協中)
민병두 뉴스투데이 회장.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윤석열은 2024년 내란을 일으키면서 중국의 주권침해행위 때문이라고 선동을 했다. 급기야 탄핵반대집회 현장에서는 중국인 혐오가 일상화되었다. 주한중국대사관 앞에서 ‘CCP(중국공산당) 아웃’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극우유튜브에서 생성하는 온갖 혐중뉴스가 국민의힘을 통해 미디어에 전달되고 있다.
1992년 수교 이후 반중 혐중의 역사는 몇가지 사건을 거쳐 발전했다. 맨 먼저 중국의 동북공정(2002-2007)이다. 이때의 반중은 역사전쟁이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시기였다. 따라서 반중정서도 제한적이었다. 2단계는 사드 배치로 인한 경제제재(2016-)와 한한령이다. 반중은 경제 문화이슈였다. 중국의 부상에 대한 위기의식이 생겼다. 경쟁에서 경계로, 경계에서 위기의식으로 반중정서가 발전했다.
3단계는 팬데믹(2020)과 베이징동계올림픽(2022)이다. 이때부터 반중은 혐중이 되었고, 진영논리에 편승하면서 정치화되었다. 청년층의 혐중정서가 게임 및 인터넷 공간을 통해 확산되었다. 2020년 총선거, 2021년 보궐선거, 2022년 대통령선거에서 적지 않은 비중의 선거 이슈가 되었다. 2024계엄령으로 이어지면서 이제는 이른바 ‘애국보수세력’이 결집하는 정치적 자원이 되었다. 대한민국을 중국공산당에 바쳐서는 안된다고 호소하고 있다.
'정치적 부족주의' 등에 따르면 부족사회는 사라졌지만 부족본능은 인간에게 남아있다. 고독한 개인은 집단에 대한 소속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부족은 신앙 가치 정서 이념 등으로 세력을 키운다.
빨강부족은 급격히 극우화하고 있다. 6.25세대의 반공주의, 박정희 전두환시대의 기득권 지역주의, 정치세력화된 개신교 보수주의(+번영신학), 20대 30대 남성들에게 퍼진 안티페미니즘이 이들의 이념이다. 여기에 혐중이 MSG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민주평화를 내세우는 파랑부족은 40대 50대의 민주주의, 독재정권하에서 핍박을 받으면서 형성된 저항적 지역주의, 20대 30대 여성들의 페미니즘, 강남좌파를 포함한 자유주의를 구성요소로 하고 있다. 지금은 빨강부족과 파랑부족이 정치적으로는 대등한 기반을 갖고있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SNS와 유튜브가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강력한 중독미디어가 되면서 두 개의 부족이 공고해졌다.
극우화된 애국보수는 애국을 표방하지만 민족주의와는 거리를 두었다. 그들에게 미국은 ’신‘이고 힘의 원천이다. 미국은 신의 은혜로 선택된 국가이고, 그 나라와 동맹을 맺은 것은 그에 버금가는 은혜이다. 기독국가 건설을 표방한 이승만의 국부 만들기도 여기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종속하면서,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들었다. 미국을 숭상하면서 자연스럽게 친일적인 부족이 되어버렸다.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 중심으로 하여 중국포위전략을 수립해왔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 기간을 제외하고 일관된 입장이다. 그래서 박정희는 굴욕적인 한일협정(1965)를 맺었고, 박근혜는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2016)를 체결했고, 윤석열은 한·미·일 삼각동맹에 합의했다. 이런 맥락에서 식민사관의 뉴라이트가 등장했고, 거리에서는 성조기와 함께 일장기도 흔드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파랑부족으로부터 ’토착왜구‘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찝찝하던 차에 혐중을 발견하면서 중국을 악마화하여 우파민족주의적인 요소를 보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공산화될 것이라며 공포를 확산시켰다. 새로운 애국의 소재를 만든 것이다. 공포가 강할수록 대중은 더 결집하게 되어있고, 경멸이 심할수록 대중의 뇌는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빨강부족의 혐중은 20대 키보드워리어(컴퓨터 자판 전사)들이 가세하면서 힘을 키웠다. 이들은 생래적으로 반중이다. 기성세대의 반일이 역사적 경험이라면, 이들의 반중은 현실적 경험이다. 어릴 적부터 게임을 하면서 부딪힌 중국 게이머들의 비 매너(불법 프로그램인 핵을 이용한 반칙. 이들을 핵쟁이라고 멸칭한다), 중국 유학생들과 수업을 함께 하면서 느끼는 피해의식, 중국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 있다는 위기의식 등이 그들의 감정을 만들었다.
이들에게 혐중은 놀이문화가 되었다. 초기 단계에서는 대륙에서는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다는 식의 대륙시리즈가 유행했다. 수만명이 함께 모여 미대 입시를 치르는 밈 등이 중국 희화화의 소재였다. 한·중관계가 악화되면서 더 감정적인 유희로 발전했다. “짝한 짱깨는 죽은 짱깨”(중국인 중에 착한 중국인은 없다는 말)이라는 인터넷 언어가 일반화되었고 “중국인 발작 버튼 눌러보았습니다” “중국인 앞에서 시진핑 욕하면 생기는 일” 등의 유튜브 콘텐츠가 인기를 모았다.
극우유튜버의 혐중컨텐츠는 산업이 되었다. 혐중정서를 자극할수록 조회수가 늘어나고 돈벌이가 되었다. 극우유튜브에서 동북공정은 북한에 중국이 진주하기 위한 것이고, 타이완 병진은 남한을 고립시키기 위한 것이 되었다.
국민의힘도 여기에 가세했다. 중국인 영주권, 중국인 투표권, 중국인 의료보험, 중국인 토지 소유 등등을 선거 이슈로 만들었다. 윤석열은 여기에 더해서 중국인 간첩, 중국인 드론, 중국인 해커, 중국인 부정투표까지… ‘중국인’만 붙이면 되었다.
혐중포퓰리즘이 정치화된 이상, 단기간의 유행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꿈꾸는 중국과 이에 맞서는 미국의 대중봉쇄정책, G-2의 대결이 계속되면서 장기화될 자원을 갖게되었다. 냉전시대에 종북빨갱이 공격이 빨강부족의 최고 전략자산이었다면 신냉전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민주당 집권 = 친중공산정권 수립‘이라는 프레임을 전략무기화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 봉쇄 전략의 관점에서 우리 안의 반중 정서가 나쁘지 않다. 그래서 빨강부족의 혐중포퓰리즘이 미국 일본 보수세력에 의해 기획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의도적으로 조직화된 정서라고 보는 것이다.
중국은 2016년 사드 배치에 대한 보복으로 시작한 경제제재와 한한령을 너무 오래 끌었다. 그리고 너무 강해졌다. 파랑부족이 더 이상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안미경중(安美經中)의 노선을 선택할 수 없게 되었다. 굴종을 강요하면 반발하게 마련이다.
그러는 사이에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에서 일본을 제치고 1위가 되어버렸다. 진보 보수에 차이가 없었다. 20대의 반중 정서는 다른 어떤 연령대보다 높다. 이렇게 될수록 빨강부족은 반중정서를 정치화하고, 장기적인 국가 이익 대신에 단기적인 정치 이익(선거)에 탐닉하게 된다.
윤석열의 잘못된 내란범죄로 파랑부족의 입지가 우세해졌다. 하지만 중국이슈는 정서의 문제가 되어버려서 파랑부족이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한중 수교 이후 지난 30여년간 반중 정서가 어떤 계기로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보면 국제화 조직화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 미국과 일본의 보수세력이 전세계적으로 반중 정서를 기획했고, 여기에 한국의 빨강부족이 편승한 것인지, 아니면 중국이 반중정서를 자초한 것인지, 혹은 우리의 선택이 만든 결과인지 등등 여러 요소가 섞여있다.
서울하계올림픽(1988)에서 동북공정(2007) 까지
지금까지 한중 관계에서 가장 평화로웠던 기간이다. 한·중수교(1992)는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와 이에 맞물린 세계화가 시작되는 시기에 이뤄졌다. 이미 키신저 체제가 출범하여 일본, 미국이 중국과 수교를 했기에 한국도 그 시기를 노렸다. 88서울올림픽에 참가하는 대가로 중국은 86서울아시안게임에 이어 90중국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 북한이 집요하게 중국의 서울올림픽 불참을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한국은 중국민항기가 우리 영토에 불시착했을 때 환대하는 등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해왔다.
한·중수교로 양국 간의 경제교역은 급속도로 증가했고, 우리 경제도 그 혜택을 보았다. 섬유 의류 신발 등 저임금에 의존하던 제조업 분야가 중국으로 이전했다. 그 결과로 이 분야의 노동자들이 실직을 했지만 미국의 러스트벨트처럼 되지는 않았다. 경제가 계속하여 성장을 해서 저임금 제조업 분야의 노동자들이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중국은 아직 우리의 경계 대상이 아니었다. 반대로 한국은 중국의 발전모델 중의 하나였다. 동북 3성에 흝어져 있던 조선족 동포들이 조상의 나라, 번영된 한국을 찾아 이동했다. 한국은 선망의 대상이 됐다. 역사상 첫 남북정상회담(2000년)이 열렸다. 중국은 1인당 GDP가 채 1000달러가 되지 않던 시기였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이때 시작되었다. 만약 남북한이 통일이 된다고 한다면 배후에 강력한 동일민족의 국가가 등장하게 되고, 중국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1994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라는 노래가 나왔다. “진정 나에겐 단 한가지 내가 소망하는게 있어 갈려진 땅에 친구들을 언제쯤 볼 수가 있을까…” 1980년대에 발해 고구려를 포함하여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로 역사를 보는 사관이 확산됐다. 만주가 우리의 고토(잃어버린 땅)이라는 입장이다. 민간 차원의 영유권 주장, 개신교의 동북 지역을 대상으로 한 공격적 선교가 이어졌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경험했고 탈북자들이 대거 중국에 유입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재외동포법을 제정하여 투표권을 부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1980년대 부터 만주 몽골 돌궐 고구려 시베리아의 역사를 독립된 것으로 보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이론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소수민족의 이탈을 방지하고 조선족과 남북한의 유대를 차단하며, 훗날 분리독립 움직임을 차단하려는 차원에서 동북공정이 기획되었다고 한다. 고구려인 발해인의 후예가 중국 민족에 대부분 흡수되었고, 그들이 중국에 살고 있으니 중국 역사라는 것이다. 청나라의 영토를 경계로 하여 그 안에 있었던 역사는 중국 역사라는 속지주의적 역사관이다. 우리의 혈통주의 역사관과는 접근 방법이 다르다.
비슷한 시기에 서남공정(티벳) 서북공정(신장-위그루)도 시작되었다. 소련의 붕괴를 목도한 중국이 개혁 개방과 함께 소수민족의 이탈을 방지하려는 차원에서 이뤄졌다. 탄압과 함께 역사공정을 하고 한족을 이주시키고 있다. 동북공정은 2007년에 종료됐지만 여전히 그때 생성한 자료를 유포하고 있다. 그 후에 조선족 자치구에 한족을 이주시키고 조선족 언어와 역사교육을 축소하고 있다.
동북공정이 남긴 충격은 여러 형태로 발전을 했다. 압록강 두만강에 중국군 수십만명이 주둔해 있는데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북한에 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북한 병합과 진주를 위한 정지작업이라는 의혹은 여전히 남아있다. 김치와 한복의 원조가 중국이라는 중국네티즌들의 주장도 모두 김치공정 한복공정이라고 할 정도로 동북공정에 대한 의구심은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이 시기 한국인의 대중정서는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한국전쟁을 일으키고 분단을 고착화한 책임의 한 쪽 당사자인 중국에 대한 적개심이 수교 이후의 경제적 성과로 눈 녹듯이 사라졌다. 1997년 한류의 원조가 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빠 붐으로 조성된 한국열풍도 한국인들에게 대국을 넘어섰다는 자부심을 갖게 했다. 이 당시의 중국인에 대한 정서는 ‘큰 나라, 작은 인민’ 나라는 크지만 사람은 못살고 낙후하다는 무시가 지배적 정서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