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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두의 실록, 초현실 비상계엄(7)

남산을 바꾼 김용현, 용산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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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두
입력 : 2025.02.25 11:07 ㅣ 수정 : 2025.02.25 14:07

12월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선포를 실록으로 엮어본다. 윤석열은 언제부터 쿠데타를 계획했을까? 윤석열은 무슨 일을 계기로 확신범이 되었을까? 12월3일은 우리나라가 처한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최고권력자 1인의 독단으로 나라가 형편없이 흔들렸는가 하면 국회와 시민들의 용기있는 대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위대한 서사시였다. 12월3일을 전후해서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이 역사적 순간에 무슨 역할을 했는지 초현실적 계엄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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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장관. [사진=연합뉴스]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용산이전은 첫 번째 국정과제가 되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청와대 이전 TF’가 꾸려졌다. 윤한홍 국회의원이 팀장, 김용현이 부팀장을 맡았다. 수도방위사령관, 함참작전본부장을 지냈기에 대통령실의 경호 안전과 국방부 이전 문제를 논의하는 적임자로 보였다. 

 

청와대에 있었던 대통령관저는 한남동의 외교부장관 공관으로 이전했고, 외교부장관은 궁정동의 경호처장 관사로 집을 옮겼다. 경호처장은 한남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는데 관저촌 입구에서부터 경호처장 국방부장관 대통령이 이웃하게 된다. 실세가 된 김용현은 윤석열 정부 초대 경호처장을 2년여 지내다가 2024년 9월 국방부장관이 된다. 

 

경호처장 시절부터 “국방장관 위에 김용현 국방상관”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실세였다. 이종섭 신원식 등을 국방장관으로 추천했고, 국방부 인사에 관여했다. 대통령 주변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경호처에서 손금 들여다 보듯 했다. 대통령의 심기와 일거수 일투족을 파악했다.

 

김용현은 충암고등학교 6회이고, 윤석열은 7회이다. 1975년 김용현이 충암고 3학년 때 학도호국단장을 맡았던 것을 보면 성적도 좋고 리더십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용현은 “윤석열이 공부도 잘하고 의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만나자고 했다. 둘의 운명적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김용현은 군대에서 주로 작전과 대통령 경호 등의 임무를 담당했다. 육사 졸업시에 교장상을 받은 것을 보면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1989년 대통령 관저를 경호하는 수도방위사령부 55경비단 시절 일화가 유명하다. 55경비단은 대통령은 근접 경호하는데 대통령이 궁금해서 물어볼 것에 대비하여 200개의 모범답안을 외워야 했다. 

 

예를 들면  대통령이 경내 산책을 하다가 청솔모를 발견하고 물어보면 백과사전에 있는 것을 줄줄이 답해야 하는 식이다. 노태우가 김용현에게 남산의 높이를 물었다. 김용현은 답을 했는데, 나중에 확인을 해보니 30cm가 틀렸다. 김용현은 아예 매뉴얼을 뜯어 고쳤다. 자신의 오답을 정답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200명의 수첩에서 남산의 높이가 바뀌었다. (MBC PD수첩 ‘용산의 장군들-윤을 위해 총을 든)

 

국회연락담당관,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 등을 역임하며 정무감각까지 익힌 김용현은 승승장구했다. 준장 소장 중장도 모두 1차년도에 진급했다. 2015년 합참작전본부장(중장)이 된 이후에는 북한의 잦은 핵 미사일 실험에 대비한다며 출퇴근을 하지 않고 야전침대에서 밤을 지새웠다. 4성장군의 꿈은 이뤄지는 것처럼 보였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그는 4성장군(합동참모의장) 진급에 실패했다. 비육사 출신을 선호하는 시대적 분위기, 그리고 2011년 17사단장 시절에 부대원의 단순 익사 사건을 의로운 죽음으로 미화하고 조작한 사건이 알려져 인생 최초의 좌절을 맛보았다.

 

그렇게 좌절을 맛본 김용현은 2020년 추미애 법무장관과 충돌을 빚고있는 대호프로젝트의 주인공 윤석열과 급격히 가까워진다. 2021년 윤석열 예비후보 캠프에 군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합류한다. ’국민과 함께 하는 국방포럼‘을 발족시켰다. 육사 출신 예비역을 모으고 국장, 안보 관련 조언을 받는 일을 도맡아 했다. 그 해 9월22일에는 윤석열이 국방포럼 인사들을 배석시키고 외교안보공약을 발표하는 자리에 함께 했다. 외교안보정책자문단의 수장 역할을 한 것이다.

 

이 시기에 김용현의 행보에서 주목되는 것은 한국보수주의연합(KCPAC) 행사에 자주 참석했다는 점이다. 미국 보수정치행동회의(CPAC)의 한국 본부 격인 자매단체이다. CPAC을 이끄는 Annie.M.H.Chan은 하와이에서 부동산업으로 크게 성공한 재미동포이다. 우리 이름은 김명혜이다. 2020년 8월에 트럼프에게 한국의 21대총선은 부정선거였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STOP THE STEAL”운동에도 적극적이고 윤석열의 계엄 발동 이후에 한국의 해당 단체들과도 교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용현은 2021년12월20일에 있었던 KCPAC 행사에도 참석했다. 부정선거론과 각종 음모론은 문재인 정부에 불만을 가졌던 김용현에게 새로운 지적 호기심의 대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 김용현과 윤석열에게 부정선거론의 국제적 근거와 연대를 얘기했을 것이고, 윤석열은 극우유튜브를 보면서 궁합이 맞아들어갔다.

 

김용현이 쿠데타를 처음 거론한 것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이전인 2022년 초였다고 한다. 2022년 3월 대통령 선거 직전에 김용현이 캠프 관계자와 여러 가지 현안을 얘기하던 중, 윤석열 집권 이후 반대세력의 소란이 심해지거나 촛불시위가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 김용현이 “무슨 걱정이냐. 계엄령을 발동해서 다 쓸어버리면 되지”라고 말했다고 한다.(중앙일보 2024년 12월18일 ’4성장군 탈락에 꼭지 돌았다. 김용현, 권력집착에 불붙인 사건‘)

 

군에 갔더라면 쿠데타를 했을 것이라는, 김종필이 로망이라는 윤석열과 쿠데타가 솔루션이라는 김용현은 이렇게 통했다. 1975년 서울의 충암고에서 만난 두 사람은 50년이 지난 2025년 헌법재판소와 형사법정에 나란히 서게 됐다. 청운의 꿈을 안고 육군사관학교와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 둘의 운명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 누군들 예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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