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221)] 추락에서의 회생을 격려하는 전우애로 업무수행에 탄력받아(하)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4.07.05 14:34 ㅣ 수정 : 2024.07.05 14:34

작전직능의 탁월한 군선배인 한 중령에게 보직 첩보 제공으로 승리부대의 소중한 전우애가 더욱 돈독해져...
강직하고 청렴결백(淸廉潔白)하며 겨레 가슴에 참군인상 남긴 6·25남침전쟁 영웅 한신 장군이 향년 76세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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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부대의 소중한 전우애를 갖고 있으며 작전직능의 탁월한 한동주 장군(삼사14기)의 군단장 시절과 전역후 자녀 결혼식장에서의 모습 [사진=김희철]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생활 동안에 많은 선후배 등의 동료들을 만난다. 그중 전우애를 느끼며 존경과 신뢰할 정도의 지인은 많지 않다. 하지만 사람의 인연이 하늘의 뜻이라 존경과 신뢰를 떠나 그 끈이 계속이어져 지금까지도 자주 만나는 선후배 전우들도 있다.

 

그중에 진심으로 아껴주며 멘토링을 해주고 위기에 빠져 극복하기 어려운 중요시기에 앞장서서 대변해 준 고마운 분들이 있었다. 특히 임관후 야전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 만나 좋은 인연을 쌓은 사람은 지금도 연락하며 서로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더욱 더 소중한 전우들이다.

 

필자가 임관하여 첫 근무지인 승리부대는 사단 지역내의 최고로 높은 기관장이 마을 이장이며 사단 사령부 앞에도 비포장 도로였던 심심산골이었다. 그곳에서 같이 울고 웃었던 전우들은 아직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헌데 많은 지인들이 대대장으로 취임한 필자를 만나러 오던 5월경에 옛 전우의 소식을 들었다. 

 

승리부대에서 동기생중에 1차로 소령 진급했고 필자가 무적태풍부대의 작전보좌관 시절에 인접 청성부대에서 대대전술훈련 평가도 1등을 하며 대대장을 성공적으로 마친 군선배인 한00 중령(3사14기)이 7군단에서 민심과장으로 근무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마침 필자는 군사령부 전술토의, 예비군 교장 사열, 사단장 초도 업무보고 등이 성공적으로 끝내자 사단참모들과 소통이 잘되고 있었다. 곧 군사령부의 전투지휘검열이 계획되어 있는데 동원참모 공석이 생겨 고민하는 인사참모의 사정을 듣게 되었다.

 

필자는 급하게 선배인 한 중령에게 참모보직 첩보를 제공했다. 작전참모를 해야될 상황이지만 보직할 자리가 없어 고민하던 차였던 한 중령은 우선 동원참모를 먼저 한 뒤에 작전참모로 보직을 옮길 수있는 좋은 기회를 포착하고 바로 신청해 사단에서 보직검토에 들어갔다. 

 

결국 승리부대의 소중한 전우애를 갖고 있으며 작전직능의 탁월한 한 중령이 동원참모로 보직되었고, 두달 뒤에 계획된 전투지휘검열에서 한 중령의 탁월한 조언과 지원으로 성공적인 결과를 만드는 시너지 효과를 얻었고 필자의 대대는 계속적인 신화를 만들어 냈다. 

 

훗날 한 중령은 사단작전참모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도 승승장구하여 장군으로 진급하며 사단장, 육본실장, 3군단장을 역임하는 등 군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 무렵인 5월6일, 탁월했던 사단동원참모와 같은 청주 한 씨이면서도 겨레 가슴에 참군인상을 남긴 6·25남침전쟁 영웅 한신 장군이 향년 76세로 운명했다. 

 

한신 장군은 전역후에 무적태풍부대를 방문해 간부교육을 했는데 그때 아주 작은 프라이드를 직접 몰고 와 위병소에서 병사들이 다른 분으로 착각해 신원을 확인하는 약간의 소동이 있었을 정도로 청렴결백(淸廉潔白)한 참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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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 가슴에 참군인상을 남긴 6·25남침전쟁 영웅 한신 장군의 영면 기사 [사진=김희철]

 

■ 한신, 부하들을 잘 먹여라(食). 잘 입혀라(衣). 잘 재워라(住). 교육훈련 철저히 하라. 근심걱정 해결해 주라

 

한신 장군의 본명은 원극(元極)으로 함경남도 영흥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함흥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변호사가 될 뜻을 품고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이 학병제도를 만들어 학생들을 전쟁터로 보내기 시작하자 학병을 기피할 생각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일제 당국의 강압에 못이겨 1944년에 사병으로 입대했으며, 곧 간부후보생이 되어 견습사관중에 광복을 맞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북한 김일성의 공산당 독재정권에 실망하여 1946년 함경남도 영흥에서부터 단신으로 월남한 뒤, 이름을 신(信)으로 바꾸고 국군 사병으로 입대했다가 육군사관학교(경비사관학교) 제2기(박정희 대통령 동기)로 입교하여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강원도 춘천에 있는 제8연대에서 소대장 및 중대장 겸무로 군대생활을 시작하여 조선경비대 군기사령부의 행정관을 지냈으며, 대대장으로 옹진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수도사단 1연대장을 맡아 의정부전투를 시작으로 한강 방어선, 진천, 안강, 기계, 대관령전투를 비롯해 38선 북진작전 등 수많은 격전지를 누비며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승리하는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낙동강 최후 방어선의 요충지였던 안강,기계 지역에서 철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며 북한군 12사단의 공세를 저지함으로써 국군의 방어선 유지와 반격작전 여건 조성에 결정적인 공도 세웠다. 

 

1·4후퇴이후 중공군 춘계공세시 대관령전투에서는 연대 단독으로 이틀간의 사투끝에 중공군 1개 사단의 남하를 저지해 전세를 역전시켜 반격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호남지구에서 공비소탕작전을 수행했고, 1953년 말에 육군준장으로 진급하여 1954년에는 첩보부대장을 시작으로 육본 수송감, 수도사단장, 감찰감을 역임하던 중에 육군소장으로 승진하였고, 1960년에 제2훈련 소장이 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으로서 내무부장관이 되었으며, 1963년에 잠시 감사원장을 맡기도 하였으나 그해 군대로 복귀하여 6군단장에 보임되었으며, 1966년에 육군중장으로 진급하여 육군전투병과 사령관, 1968년 육군참모장과 제2군사령관을 1969년에는 제1군사령관직을 맡았다.

 

1970년 제1군사령관 재직시 육군대장으로 승진했고, 1972년 합동참모본부 의장으로 부임했으며 오늘 죽어도 책임을 다한다는 의미의 "일일 일생"을 좌우명으로 국가와 군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그는 1975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했다. 합참의장 재직시 국군 현대화 계획을 입안하여 자주국방의 기초를 세우는 업적도 남겼다.

 

또한 솔직 담백한 성품을 지닌 청렴결백(淸廉潔白)한 군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군대의 제반 여건이 좋지 않던 시절에 강조했던 “부하들을 잘 먹여라(食). 잘 입혀라(衣). 잘 재워라(住). 교육훈련을 철저히 하라. 근심걱정을 해결해 주라”는 유명한 지휘방침처럼 군의 교육·훈련과 부하복지에 많은 신경을 써 전우애를 돈독하게 만들며 존경도 받았다. 

 

전역 후에는 아세아자동차주식회사와 대한중석광업공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생전에 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보국훈장 천수장 등 많은 상훈을 받았으며 1996년 5월6일 향년 7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당시 청렴하며 솔직 담백한 성품으로 자주국방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긴 한신 장군을 존경했던 대부분 후배장교들이 한 장군의 영면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특히 필자의 장인은 한신 장군처럼 이북에서 김일성의 공산당 독재정권에 실망하여 단신으로 월남해 6.25남침전쟁을 겪으며 군생활을 했는데 그동안에 각별한 신뢰와 사랑을 아끼지 않고 보내주셨다며 눈물을 적셨다. 

 

대대장직을 수행하던 필자도 강직한 참군인 한 장군의 삶을 보면서 롤모델로 삼아 한신 장군처럼 교육·훈련과 부하복지에 많은 신경을 써 전우애를 돈독하게 만들며 군생활을 바르게 하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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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제복은 영원한 애국이다(오색필통,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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