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기업이 대기업과 경쟁해 사업 수주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
한국의 방위산업이 새로운 활로를 찾으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방위사업청 또한 방위산업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지속적인 제도 개선과 함께 법규 제·개정을 추진 중이다. 그럼에도 방위사업 전반에 다양한 문제들이 작용해 산업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뉴스투데이는 이런 문제들을 심층 진단하는 [방산 이슈 진단]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뉴스투데이=김한경 안보전문기자] 지난달 22일 한기호 국민의힘 의원과 뉴스투데이가 ‘무기체계 제안서 작성 및 평가방식의 문제와 해법’을 주제로 개최한 ‘2024 K-방산혁신포럼’에서 국내 최초로 MANET(Mobile Ad-hoc Network)의 독자적 기술력을 확보해온 A기업이 대기업과 사업 수주 경쟁에서 실패한 사례가 소개됐다. 당시 이 포럼에 참석한 A기업 대표는 토론 과정에서 자신이 생생하게 겪은 제안서 평가의 문제를 절규하듯 쏟아냈다.
MANET은 ‘전투원 중심의 차세대 네트워크’로 기지국 같은 통신 인프라를 사용할 수 없거나 전시 또는 재해·재난 등으로 외부와의 통신망이 단절된 환경에서 단말기 간에 직접 통신을 통해 효과적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기술이다. 유무인 복합 전투체계가 구현되려면 꼭 필요한 핵심기술로 해외에서도 극소수 업체만 개발에 성공한 고난도 기술이다.
■ A기업, 영국 DTC와 MANET 소프트웨어 공동 개발하고 제품까지 납품
A기업은 MANET 기술을 확보한 해외 업체 중 유일하게 한국에 기술이전을 약속한 영국의 DTC와 2022년부터 협력을 시작했다. 지난해 6월부터 육군 영상전송장비 사업에 참여한 A기업은 한국군에 특화된 MANET 무전기용 소프트웨어를 DTC와 공동 개발했고, 3개월여에 걸친 혹독한 운용시험평가를 거쳐 올해 7월에 해당 소프트웨어를 적용해 만든 MANET 기반 영상전송장비세트 약 200여대를 육군에 납품했다.
이와 함께 A기업은 MANET 기술 도입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군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수차례 기술 설명회를 진행했다. 지난 6월에는 ‘Army Tiger 프로젝트 운용실험’에 참여해 전투원·전차·자주포·무인기 등 다양한 전투플랫폼에 MANET 무전기를 적용해 실시간 영상정보를 공유하는 체계를 구현하는 등 MANET 기술기반의 네트워크를 국내 최초로 구성하고 실제 전술 운용에 필요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A기업은 1년 안에 MANET 기술에 대한 국산화율을 98%까지 끌어올리는 국산화 계획을 수립하고 DTC와 국산화를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또한, MANET 기술기반의 과제를 기획해 육군과 국방신속획득기술연구원(이하 신속원)에 신속연구개발 사업을 제안했다. 해당 과제는 MANET 무전기의 국산화율을 높이기 위한 사업으로 A기업 외에는 국내에서 실질적으로 이 기술을 실용화한 업체는 없는 상황이었다.
■ 최초 사업 제안하고도 과제 선정과정에서 탈락하고 사업 수주도 실패
하지만 신속연구개발 사업 과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A기업의 제안 정보가 일부 대기업에 공개됐고, A기업은 과제 제안부터 대기업과 경쟁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결국은 대기업과 함께 과제 제안을 하게 되면서 A기업은 과제 선정과정에서 탈락했으며, 해당 과제가 사업화된 이후 입찰에도 참여했으나 제안서 평가결과 경쟁한 대기업 2곳보다 8점 이상의 점수 차이로 사업 수주에 실패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A기업이 기술평가에서 80% 미만의 점수를 받아 협상 대상업체 순위에도 들지 못했다는 점이다. A기업은 평가결과 확인을 위해 신속원에 디브리핑을 요청했고, 이 자리에서 MANET 관련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까지 납품한 업체가 연구개발 가능성만 제시한 업체보다 기술력이 저평가된 이유를 문의했지만, 기술평가는 평가위원 몫이므로 알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A기업은 국내 최초로 MANET 관련 기술력을 보유한 데다 육군 프로젝트 운용실험에서 MANET을 성공적으로 구현해 냈고, MANET 기반의 영상전송장비세트까지 육군에 납품한 실적을 가진 유일한 업체였다. 하지만 MANET 무전기의 국산화율을 현재보다 높이기 위해 자신이 기획한 과제의 신속연구개발 사업 수주에 대기업과 경쟁해 실패했다.
이날 ‘대·중소기업 간 경쟁 시 제안서 평가 방향’을 주제로 발표한 심행근 건양대 방위산업학과 교수는 “중소·중견기업이 대기업과 경쟁하면 제안서의 기술능력 평가 24개 항목 중 11개 항목이 불리해 항목당 0.5점 차이만 나도 5.5점이 뒤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즉 대기업보다 5.5점은 기본적으로 뒤지고 경쟁해야 한다는 얘기다. 소수점 이하 단위로 보통 사업 수주가 결정되는 상황에서 실 점수 5.5점 차이라면 사실상 경쟁의 의미가 무색해진다.
■ 신속연구개발 사업에 적합한 기술평가 위주의 제안서 평가방식 없어
K-방산혁신포럼을 주최한 한기호 국민의힘 의원 또한 환영사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경쟁 관계에 있을 때 중소기업이 질 확률이 80∼90%가 된다”라고 언급했다. 포럼 개회식에서 상영된 인터뷰 영상에서 송방원 우리방산연구회 회장도 특정 분야에만 전문성을 보유한 평가위원이 비전문분야까지 평가하는 문제와 제안서를 예쁘게 꾸며 가독성을 높이는데 드는 막대한 비용 등이 중소기업에 불리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A기업이 사업 수주에 실패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는 신속연구개발 사업에 적합한 기술평가 위주의 제안서 평가가 이루어져야 했음에도 그런 평가방식이 존재하지 않아 방위사업청 개청 당시 투명성과 공정성에 초점을 맞춰 만들어진 평가방식이 그대로 적용됐다는 점이다. 따라서 20년 가까이 내용이 거의 변하지 않고 사용되는 데도 이제까지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간과해온 우리 모두의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이제라도 현행 제안서 평가의 문제들을 인정하고 신속히 검토·보완하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다시는 A기업처럼 자체 투자를 통해 국내 최초로 핵심기술 확보는 물론 기술이전까지 보장받고도 관련 사업 수주에서 실패하는 억울한 경우가 생기지 않아야 한다. 급성장 중인 한국의 방산수출이 계속되려면 기술력 있는 중소·중견기업이 제대로 평가받고 성장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하며, 그 해법은 제안서 평가의 기술적 변별력 구비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