始도 계집 녀 변에 태아 모양, 생명의 시작이 여성이라는 생각의 흔적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부계사회의 조상숭배라는 불평등 역사 시작돼 남자 간 서열 정해졌지만 여자의 서열은 없어, 여성은 출산을 위해 존재 현모양처는 부부 사이의 불평등조약, 착한 남편에 대한 가르침은 드물어 현모양처가 되기 위한 출산 의무 가져, 불임은 칠거지악 중의 하나로 꼽혀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원시시대에는 성을 숭배하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그 당시에는 수명이 짧았고 죽음의 위협이 컸다. 평균 수명이라고 해야 20-30세 정도였다. 온갖 위협에서 오는 죽음은 자칫 집단의 안위를 책임지는 종족의 소멸로 이어질 수 있다. 자식을 많이 나서 씨족과 부족, 종족을 번성케 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초자연적인 신비한 힘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고 믿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아브라함은 온 세상에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는 축복을 받는다. 그런 축복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늘의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믿음은 동서양에 보편적이었다.
생식숭배는 여성 숭배에서 출발했다. 원시농경사회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도 그저 자연의 일부라고 보았다. 다른 모든 것들에서도 영험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생명체는 바다에서 부터 진화하였다. 우연한 일일까? 생식력의 근원으로 물고기를 숭배했는데, 물고기 두마리를 겹쳐서 놓으면 여성의 생식기처럼 보여서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배가 튀어나온 개구리도 여성의 생식력을 표현한 것으로 믿음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인간이 어떻게 생성되는가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여성생식기를 생명의 원천으로 보고 숭배한 것이다.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뱀이 등장했다. 치열한 권력 투쟁이었고 남성 지배의 불평등한 역사의 시작이었다. 여근 숭배에서 남근 숭배로 신앙의 대상이 옮겨갔다.
고대 중국의 여성이 국가를 건설했다는 여러 신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시작한다는 始(시)도 계집 녀 변에 태아가 나오는 모양을 그린 상형문자로 생명의 시작이 여성에게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흔적이다. 성씨의 한자 姓도 훗날 부성주의를 택했지만 여자에게서 태어난다는 고대의 생각이 남아서 굳어져버렸다.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토템신앙에서 조상 숭배로 전환이 이루어졌다. 모계사회에서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고 그것이 남자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부계사회가 되면서 중요해졌다. 종법제도의 설계자들이 남녀유별을 생각했다. 결혼 이전에 남녀의 성적 접촉 기회를 완전 차단했다. <예기>의 ’ 곡례‘에 자세한 규정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중매하는 이가 오고가고 하는 일이 없으면 서로 이름을 알지 아니하며 예물을 받지 아니하면 사귀지 않으며 친근하게 하지 않는다”는 등 매우 엄격했다.
제자들이 맹자에게 질문을 했다. 남녀는 주고 받는 것을 직접 해서는 안된다고 했는데 형수가 물에 빠져 죽게생겼으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맹자는 그것을 방치하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답했다. 얼마나 규제가 엄격했으면 제자들이 그런 경우는 상정하고 질문을 했을 정도이다.
제사와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남자조상이다. 남자 귀신이다. 조상이라는 이유만으로 후손들로 부터 후한 대접을 받고 절을 받았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위해서 가문의 대가 끊이지 않아야 했다. 생육의 목적은 조상을 위한 것이다. 조상신을 모시는 제사를 후손이 필요했다. 어떤 일을 할 때에도 개인의 포부가 아니라 조상과 가문을 빛내기 위해서였다. 입신양명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효의 출발이라고 했다.
조상(祖上)은 조(祖)와 상(上)이 합쳐진 낱말로서, '조'는 신(神)에게 제물을 드리는 것을 가리키고, '상'은 자신보다 위에 있는 또는 먼저 살던 존재를 가리킨다. 따라서 조상은 신처럼 자신보다 위에 있는 존재이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고조 등등 먼저 살던 존재에게 제사드리는 행위를 매우 거룩한 일로 보았다. 조(祖)에서 왼쪽의 보일 시는 대포와 같은 남근 모양을 하고 있다. 오른쪽도 고대의 전서체를 보면 남성의 성기 모양이다. 조상 숭배는 남근 숭배 신앙, 남성 우위의 이데올로기에서 연유했음을 알 수 있다.
조상은 이제 종교이고 신이고 신앙이 되었다. 성공하면 조상, 즉 남자 귀신의 음덕 덕분이며, 실패하면 조상을 욕되게 했다고 자책했다. 신은 무오류이고, 잘못은 죄를 범한 인간인 나 자신에게 있다는 종교 공통의 토대가 조상신에게도 해당된다. 철학과 윤리학이 그 경향성을 강화했다. 음양론이다. 남녀의 생리적 특성에 근거하여 양은 남성이고 음은 여성이다.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다. 하늘은 햇빛을 비롯하여 비와 이슬을 내려주니 남자가 정액을 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땅은 동식물 등 만물을 낳으니 여자가 분만하는 것과 같다. 하늘은 높고 땅이 낮은(천존지비) 것처럼 남자는 높고 여자는 아래(남존여비)에 있다.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남자를 섬겨야 하며, 그래서 강한 남자는 중요한 바깥 일을 하고, 천한 여자는 집안일을 하는 역할 분담이 이뤄지게 되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가문의 힘을 유지하고 키우기 위해서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우선 남자들간에 서열을 정해야 했다. 사람의 지위가 높고 낮음을 결정하는 종법이(宗法)이 만들어졌다.종(宗)도 알고 보면 남성의 성기위에 갓머리를 씌운 것이다. 혈통을 이을 계승자를 정해야 했다. 혈통의 정통은 아들, 그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다. 재산과 지위가 적자에게 상속되고 그를 중심으로 집안이 뭉쳐야 다른 집안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나이 보다 중요한 것은 항렬이다. 군대의 체계와도 같다고 할 정도로 계급화되었다. 그래야 역시 문중간의 대결에서 비교우위의 힘을 구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여자의 서열은 없다. 여자는 다만 후손을 생산하기 위해 존재했다. 따라서 결혼은 인륜지대사이다. 가족을 계승하고 가문의 명예를 유지하기 위한 과정이자 수단이다. 이렇게 중요한 일에 결혼을 미루거나 독신으로 남아서는 큰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많아지면 자연재해와 같은 사회적 혼란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결혼연령을 국가가 정했다. 너무 일찍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늦어도 안됐다. 하지만 집안의 안정적 계승을 위해서 혼인연령이 갈수록 앞당겨졌다. 조혼의 습속이 일반화되었다. 임신한 배를 가르켜 혼인을 약속한다는 뜻의 지복위혼 (후한서 사복전) 까지 생겼다. 괜찮은 집안에 누가 임신을 한면 선점을 하려는 욕심이 성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혼인약조를 만들었다. 최소 열살은 지나야 맺을 수 있는 인척관계를 앞당겨 맺음으로써 양가의 이익과 우호 증진을 도모하려 한 것이다.
현모양처는 가족관의 중심이다. 전통사회에서 좋은 아버지, 착한 남편에 대한 가르침은 별로 없었다. 그들이 집안에서 하는 일은 아들을 좋은 선생을 만나게 하거나 가문과 조상에 대한 법도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좋은 아버지의 의무가 없었고, 착한 남편의 책임은 더더욱이 없었다. 현모양처는 부부 사이의 불평등조약이며 일방적이라는 것이다(이중텐 교수의 중국 남녀 엿보기. 에버리치홀딩스)
현모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아이를 낳아야 한다. 아들을 낳은 것은 모든 일에 우선하는 대사이다. 아들을 낳아야 하고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 여인으로서 부인으로서 어머니로서 의무를 다한 것이고 보람이 있는 것이다. 아이를 못낳으면 여성의 책임이 되었고, 이를 칠거지악 중의 하나라 하여 손가락질을 하고 첩을 들이는 것을 합법화했다.
양처는 좋은 아내라는 뜻인데 실제로는 좋은 며느리를 의미했다. 여자는 시부모의 뜻을 무조건 받들어야 했고, 시부모의 감정에 모든 것을 맞추어야 했다. 여자가 좋은 며느리인지 아닌지는 시부모가 결정했다. 시부모가 예쁘게 보면 좋은 며느리이이고 나쁘게 보면 나쁜 며느리이다. 남편은 결정권이 없다. 그나마 요즘 남편은 부모와 부인 사이에서 눈치라도 본다. 아들을 못낳아도 시부모가 예뻐하면 면책이 됐다. 남편은 아무런 권한이 없다. 현모양처의 마지막 조건은 남편에 대한 순종이다. 여성에게 독립적인 인격과 자유의지는 없다. 요조숙녀 처럼 행동하면서도 남편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가 적대적일 부 밖에 없었던 이유는 삼종지도라는 유교의 여성윤리에 기인한다. <예기>에 의하면 여자에게는 따라야 할 세가지 도리가 있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출가해서는 지아비를 따르며,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을 따라야 한다. 삼종지도는 가부장적 질서유지를 위한 중요한 가르침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동일한 남성에게 삶의 의미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했다. 따라서 고부간에는 각자 자신의 삶을 대신할 주체인 한 남성을 놓고 우위를 확보하려는 적대적 관계가 형성될 수 밖에 없다. 여성의 삶은 한이었고 지옥이었다.
과연 그런 삶만 있었던 것일까. 그렇기만 하다면 고래로 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사랑 얘기는 소설에나 나오는 것에 불과했을까? 각종 문헌이나 소설을 보면 각 시대의 사랑은 그 시대의 생각과 통념에 따라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부부이기 때문에 서로 존중하는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사랑이 깊어졌을 것이다. 부모의 명으로 결합했지만 진정으로 사랑에 이르는 과정도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혼후 혼외 혼전의 사랑은 염정소설(연애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했고, 사설시조에서는 음담패설에 버금가는 노골적인 묘사가 나오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애절한 사랑 얘기로는 원이엄마 편지가 있다. 널리 알려진 이 글은 부인이 1586년(선조 19년) 31세의 나이에 운명한 원이 아버지를 그리며 무덤에 함께 넣은 것이다. 죽은 남편이 이 편지를 보며 자신을 잊지 말라고 쓴 편지이다. 고려시대 풍습으로 장인댁에서 살아 사랑표현이 자유로와 보인다.
“자네 늘 나에게 이르기를 둘이 머리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자네 먼저 가시는고. 나하고 자식하고 누굴 의지하며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자네 먼저 가시는고. 자네 날 향해 마음을 어찌 가지며 나는 자네 향해 마음을 어찌 가지던고. 늘 자네더러 내 이르길 한데 누워서 이보소 남도 우리같이 서로 어여삐 여겨 사랑하리. 남도 우리 같은가하고 자네더러 일렀는데 어찌 그런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