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K-Sapience (24)] 한국인의 연애, 결혼이야기① 들어가는 글

민병두 입력 : 2024.08.27 09:40 ㅣ 수정 : 2024.08.27 09:40

지난 백여년간 연애와 결혼에 얽힌 한국인의 삶을 십여회에 걸쳐 살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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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사진=연합뉴스 자료사진]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한국인의 연애와 결혼 이야기. 지난 백년을 살펴보면 결혼과 가족제도는 가장 크게 변한 사회 습속이다. 조선시대의 구습에서 지금의 만혼 비혼 동성혼까지 가장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연애와 결혼은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족의 문제이고 당시대의 사회적인 통념과 관습의 영향을 받는다. 왜 결혼을 하느냐, 가족에서의 남녀의 역할과 권한은, 가족의 형태는, 결혼적령기는, 가정의 주 수입원 등등 모두 사회적  이슈이다.

 

크게 보면 원시시대에서 농경사회에서 바뀌면서 가장 큰 변화가 있었다. 남녀가 함께 모여 사는 집단혼은 생산력이 아직 발전하지 않은 단계의 산물이다.  동물과 자연 등 외부로 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모여서 살아야 했다. 남자들은 주로 사냥을 나가고 남녀가 성을 공유하니 아버지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어머니의 혈통만 분명했다. 이런 모계사회는 부계 사회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

 

농경사회로 이전하고 잉여생산물이 생기면서 이를  기록하고 정리할 문자가 생겼다. 또한 농경사회에서 힘이 강한 남성이 주도권을 잡았다. 사냥을 나가던 원시사회에 비해 남성의 안정적 수확률이 높아졌다. 정주사회가  되면서 재산과 지위를 대를 물려 주다 보니까 일부일처제의 가부장제 사회가 되었다. 남자의 혈통이 중요했다. 가부장제를  정당화하는 온갖 신앙과 조상신 숭배의 유교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졌다. 

 

수천년의 가부장제에 균열이 생긴 것은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혁명 덕분이다. 연애의 자유와 자유로운 결혼관이 생겨났다. 근대적인 결혼제도가 도입되었어도 1970년대 까지는 동서양 모두 현모양처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했다. 68혁명과 페미니즘의 보급으로 가족에서의 성역할이 도전을 받았다. 맞벌이와 공동육아, 사회적 육아 등 새로운 개념이 생겼다. 평균결혼연령이 늦어지는 등 백년 전에 비하면 만혼이 일반화되었다. 21세기 정보화사회로 들어와서는 고수익 여성이 늘어나고 여러 사회적인 변화가 따르면서 비혼도 새로운 사회현상이 되고 있다.

 

결혼이 ‘사회 안의 결합’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조선 시대의 전통 결혼식은 납채 문명 납길 납징 청기 친영이라는 중국식 여섯가지 예, 즉 육례로 구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신랑 신부의 역할이 거의  없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가 마치 다른 사람의 일처럼 치러지는 듯했다. 조선 시대 결혼의 전범이 되었던 중국의 <예기>  ‘혼의편’에 “두 성씨가 합하여 위로는 조상을 섬기고 아래로는 대를 잇는 것”,  즉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도 부모를 위해서도 아니며 오래전에 죽은 조상을 위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니 신랑 신부의 일이 아니라 가족의 일이 되어 버린다.  

 

서양식 결혼식이 도입된 지 100여년이 된다. 서양식 결혼에서는 신부 아버지가 신부 손을 잡고 입장하여 신랑에게 인계를 한다. 한 여성이 남자인  아버지의 권한 아래 있다가 다른 남자인 지아비의 권한으로 넘어 가는 부권사회의 가장 상징적인 표징이다.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주인공 같지만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순서에 따라 입장하고 예물을 주고 받고 축가를 듣고 퇴장한다. 결혼이라는 개인사가 교회와 같은 공공의 장소에서 치러지면서 결혼의 사회성이 강화되었다. 요즘 신세대는 신랑 신부가 결혼 이야기를 하고 가족이 축사를 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제는 주인공을 찾아가는 느낌이 든다.

 

요즘의 결혼정보회사의 원조는 중매, 중신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매자가 있었다.  연애가 없었던 과거에는 중매인의 역할이 중요했다. 디아스포라의 오랜 기간을 경험했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인정받는 직업이었다고 한다. 서양에서 중매자가 개입한 이유는 혼인이 일종의 사회적인 행위이기에 사회적인 약속으로 반드시 공증과 승인을 거쳐야 한다는 논리에 기인했다. 나중에 이 공증을 교회가 떠안았다. 가톨릭의 칠성사 제도가 정착되면서 부터이다. 중매인이 있으면  신분이 내려가는 강혼의 위험성이 적어진다. 신분이나 재테크를 돕는 승혼 혹은  같은 계급끼리 결혼을 하는 동질혼을 돕는다. 가족간에 지참금 예물을 직접 조율할 때의 부담을 덜어주는 역할도 한다.

 

지난 백여년간 연애와 결혼에 얽힌 한국인의 삶을 십여회에 걸쳐 살펴본다.  연애의 시작부터 미팅 소개팅 데이팅앱에 이르는 결혼의 전사, 조혼에서 만혼 비혼에 이르는 결혼적령기의 문제,  가족계획에서 한국인의 멸종 위기까지, 시월드에서 친월드로 중심의 변화, 축첩에서 제2부인 자유부인 논란등 다양한 이슈를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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