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수도 서울의 광화문네거리는 자연스럽게 국민 인식 속에 국가상징공간으로 자리잡혔다. 관광객들도 으레 광화문과 경복궁을 찾는다. 한복 입고 고궁 방문하여 사진 찍는 것이 대표적인 관광 상품이다. 서울에 오면 외국인들이 사진으로 남길만한 이렇다 할 랜드마크가 없다.
남산N타워는 사진으로 남기기에는 특장이 없다. 히말라야 알프스 같은 산은 몰라도 강은 랜드마크가 되기 어렵다, 강은 그 자체로 차별성이 크지 않다. 세느강도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서 의미가 있다. 한강은 제대로 된 스카이라인이 뒷받침을 하지 못하고, 보행접근성이 떨어져 국가상징공간으로 적합하지 않다.
광화문 일대는 역사적으로 복잡한 공간이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이 자리 잡고 있다. 경복궁의 명칭은 “왕께서는 만년 장수하시고 큰 복 받으소서”라는 시경의 구절에서 따왔다. 정도전이 작명했다. 이상적인 유교정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같은 이름을 지었다. 조선시대 정치의 중심이었던 이 일대는 대한민국이 들어서고서도 정치의 중심이었다. 경무대에 이어 청와대, 정부종합청사등 행정시설이 모여 있다. 군정으로 시작하여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국의 대사관도 위치해 있다. 강남과 다른 부도심들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시내 하면 광화문 네거리를 의미했고, 여전히 사람들의 이동도 많았다.
따라서 이곳은 국가가 조각이나 동상, 건축을 통해서 상징을 만들고 메시지를 던지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이다. 박정희는 친일파라는 딱지와 반일정서가 늘 부담이었다. 1970년대 까지는 일본 고위 당국자들의 망언이 있을 때 마다 전국 곳곳에서 비분강개한 시민들이 항의에 나섰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는 일이 많았다.
박정희는 국민들의 이런 정서를 고려하여 1968년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를 만들어 이순신장군 동상을 건립했다. 박정희가 헌납(제작시에 동상 뒤편에 기재)했다고 되어있다. 조각가 김세중 측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가 조선왕조의 도로중심축을 복원하는데에는 너무 돈이 들어 어렵다며 그 대신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 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이어서 1969년에 남산의 백범 김구동상 건립에도 금일봉을 내고 휘호를 써 제작을 지원했다.
이순신장군상의 건립은 박정희가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인세력의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한 의도였다는 분석이 있었다. 이순신장군의 동상을 통해 구국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연상케 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도가 있었을 수 있겠지만 백범 김구 동상도 함께 지원한 것으로 보아서는 그 자신의 친일파 이미지를 희석하고 국민들의 반일감정에 올라타는 효과를 의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남북대결과 한일간 갈등, 그리고 독재정권의 대중동원을 위해서 충성심을 조성하던 국가주의 시대였다. 이순신장군의 동상은 칼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어서 논란이 되었다. 왼손에 칼을 쥐고 오른 손으로 뽑는 것이 전장에 나선 장수의 결기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동상을 제작한 김세중 측은 전시가 아닌 평시의 모습을 기렸다고 설명했다.
1968년 박정희가 이순신장군 동상을 헌납했을 때, 국무총리 김종필은 세종대왕상을 헌납했다. 덕수궁안에 모셨다가 2012년 이전했다. 이순신장관상과 세종대왕상의 위치를 보면 박정희정부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문무를 함께 중시했다기 보다는 무를 더 강조한 것이다. 2008년부터 국가상징공간, 국가상징도 논의가 시작되었다. 서울시장 이명박이 주도했다. 2009년 광화문광장이 조성되었다. 오세훈 박원순을 거치면서 광장이 넒어지고 조형적 의미가 더해졌다. 세종문화회관 앞에 창의와 실용의 정신으로 문화강국을 이루자는 뜻에서 세종대왕상이 세워졌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명의 영웅, 문화를 창달한 세종대왕과 나라를 지킨 이순신장군을 나란히 위치 지음으로써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지향을 분명히 했다.
광화문 일대에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경복궁안에 있는 조선총독부(중앙청, 국립중앙박물관)는 김영삼의 결단으로 전격 해체됐다. 일본인들이 마지막으로 총독부 건물을 방문하기 위해 대거 관광대열에 나섰는데 일본인에게는 영광의 기억이고, 우리들에게는 치욕의 상징이다. 요욕의 역사도 역사라는 점에서, 후손들에게 교훈을 남긴다는 점에서 보존 혹은 이전을 제안하는 반대론자가 있었으나 30여년이 지난 지금은 해체가 옳았다는 생각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광화문과 월대, 의정부 터도 역대 정부를 거치면서 우여곡절을 거쳐 복원되었다.
하지만 동상 두개와 광장 그리고 세종문화회관(1978) 만으로 국가상징도로, 국가상징공간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광화문네거리의 교보빌딩은 1972년 건립된 주일미국대사관을 지은 조각가에게 의뢰하여 같은 모양으로 건축했다. 포시즌스호텔 등 주변 건축물, 그리고 주한미대관 건물은 상징 공간에 맞지 않거나 조화롭지 못하다.
1964년 서울시는 처음으로 현대화계획을 수립한다. 전후 10여년이 지나서여 처음으로 미래 서울에 대한 청사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도시 마스터플랜을 수립했다. 강북에 200만명, 강남에 300만명 도합 500만명의 도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강남개발에 착수했다. 박정희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린벨트제도도 함께 도입되었다. 빈민가와 사창가였던 구도심의 개발에도 착수했다. 길이 1.2km에 달하는 주상복합상가(세운상가-진양상가)는 영화관 사우나 볼링장 옥상정원등이 들어서서 랜드마크가 되었다. 청계천이 복개되고 3.1고가도로와 삼일빌딩(31층)이 만들어지면서 대한민국 부흥의 상징화되었다. 극장에서 애국가가 상영될 때 3.1고가도로를 달리는 차량과 삼일빌딩이 늘 화면에 나왔다.
1960년대는 개발의 연대이다. 급격한 도시화결과로 서울이 신음하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희망을 보기 시작했다. ‘서울의 찬가’는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길옥윤에게 서울을 희망적으로 노래해 달라고 부탁해서 만들어진 곡이다. 수학여행을 다녀오면서 서울이 가까워 지면 ‘서울의 찬가’를 부르곤 했던 기억이 난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그리워라 내 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 마오 처음 만나고 사랑을 맺은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 아름다운 서울에서 살으렵니다”(서울의 찬가) “삼각지 로터리에 궂은 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랑을 아쉬워 하며 비에 젖어 한숨 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가는 삼각지…”(울고가는 삼각지. 배호 노래) 삼각지에 로타리가 만들어졌기에 나올 수 있는 노래이다. 1970년대에는 강남 개발과 젊음의 초상으로 혜은이의 ‘제3한강교’, 1980년대는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등 서울을 소재로 한 수많은 노래들이 만들어졌다.
1970년 3.1빌딩이 들어설 때만 해도 도심에 고층빌딩이 올라가는 것이 뉴스였고 자랑이었다. 1969년에는 서울에 10층 이상 빌딩이 모두 59동에 달한다는 기사가 나왔을 정도였다. 대한민국 최고층 빌딩의 타이틀이 빠르게 이전되었다. KAL빌딩, 정부종합청사, 삼일빌딩, 63빌딩, 타워펠리스, 해운대아이파크, 포스코타워 그리고 롯데월드타워까지 하늘을 향한 욕심을 뽐냈다. 우리나라 건설회사가 세계의 초고층건물을 시공했다는 것도 우리의 자랑이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한국을 국빈방문(2017)해서 국회에서 연설하면서 63빌딩을 한국경제의 상징 중의 하나로 거론하여 한국사람들의 자긍심에 윙크를 했다. 보통 올림픽은 준비에 7면, 마무리에 3년을 합해서 10년의 역사라고 하는데 88올림픽을 전후한 기간 동안 서울의 대표적 공공건축물이 대거 들어섰다.
프랑스인들의 한국 건축 답사기인 ‘봉주르 한국건축’(강민희. 아트북스)에서는 한국의 발전 속도를 보고 감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1950년대 이 나라에 논과 밭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니. 서울을 보면 믿을 수가 없어. 60년만에 이런 성과를 낸 나라는 전 세계에 한국 밖에 없을 거야. 정말 굉장해. 브라보! 한국은 프랑스 보다 시간이 몇 배로 빨리 가는 것 같아. 내게는 초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다른 세상 같아”
산업혁명 후에 인류는 점과 점, 즉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기 위해 숲을 깎어서 도로를 만들고, 엘리베이터를 발명해 고층빌딩을 만들었다. 길이와 높이를 확장하고 확대한 역사였다. 국력의 과시였다. 역사가 없는 미국은 보존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높이로 유럽과 승부했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만들었다. 기후온난화와 환경파괴로 여섯번째 멸종을 우려하는 지금은 오히려 자동차가 지배했던 도로를 덮어 숲을 만들고, 에너지제로 주택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 추세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 국가건축정책위원회가 발족하여 지금까지 건축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광역 기초 지방자치단체도 총괄건축가라는 직책을 두고 있다. 건축은 역사이고 미래이다. 건축은 아름다움이고 상징이다. 그 건축이 한번 경로를 잃으면 몇 십년을 잘못가는 정도가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을 맞는다. 한국이 아파트 공화국이 된 이상은 앞으로도 오랜 기간을 그 뼈대위에서 도시가 자생할 수 밖에 없다. 건축은 이처럼 중요하다. 공동체를 재구성하고 사람간의 거리를 조직하는 등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제임스 S. 게일은 ‘조선, 마지막 10년의 기록’에서 “서울은 동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서울은 내사산과 외사산, 고궁이 있어서 따로 랜드마크가 필요없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했다. 실제로 한양도성길을 따라 한바퀴를 돌면서 바라보는 서울은, 아마도 100여년 전의 수평도시를 유지했다면 정말 아름다운 도시였을 것이다. 서울이 직주근접과 수평확대정책을 취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은 오히려 고밀도정책을 도입하여 직주근접을 하고 녹지를 확대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다시 국가중심공간으로 돌아가보자. 서울의 DDP가 아무리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디자인했다고 해도 왜?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서울이라는 역사성, 그리고 인근 지역과 동떨어져 존재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국가상징공간은 그 나라의 역사성을 온전히 갖고 있어야 한다. 그 나라의 지향을 담고 있어야 한다. 꺼지지 않는 불꽃과 100m 태극기는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를 연상케 한다. 상암동에 세우겠다는 서울링은 런던아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두바이의 아인두바이에 이어 두번째로 큰 규모가 될 것이라고 한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은 전쟁을 기념하고 있다.
그 후 많은 나라에서 승전을 기념하는 건조물의 원조가 되었다. 에펠탑은 엑스포를 앞두고 프랑스 과학기술의 총화가 만들어낸 기념물이다. 기념물, 랜드마크는 그 나라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위치에 있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럴만한 이유와 목표를 갖고 있다. 다른 나라에 가 봤을 때 좋아 보여서 그것을 우리나라에 더 크게 이식한다고 서울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서울은 서울의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청와대에서 경복궁 광화문 서울시청 남대문 용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누가 뭐라고 해도 국가상징도로이다. 이곳이 역사성을 가질려면 외국의 뛰어난 조형물을 가져올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 녹아있어야 한다. 광화문 광장과 시청광장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성지이다. 여기서 4월혁명 서울의봄 6월학쟁 촛불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화와 민주화, 정보화와 문화국가 건설에 모두 성공한 나라의 자긍심이 있어야 한다.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 사이에 민주주의 기념센터를 건립하면 좋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많은 나라에 영감을 주었다. UN산하의 국제기구로 설립된다면 더 좋을 것이다. 주한미군이 완전 이전하면 용산공원이 서울의 새로운 보배가 될 것이다. 서울역에서 한강 까지를 국가중심도로로 편입한다는데 맨하튼이 아니라 용하튼이 되지 않는 이상 상징공간화가 쉽지 않다. 용산공원은 도시가 새로이 가야 할 미래이다.
정리를 해 본다 경복궁에서 대한민국의 문화와 역사를 보고, 광화문 광장에서 세종대왕과 충무공, 두 영웅들을 만나고, 시청 광장까지 민주주의 역사를 접하고, 용산에서 인간과 환경의 공존을 만나고, 동작동 현충원에서 태극기를 보며 나라를 지킨 이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국가상징도로, 국가상징공간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