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K-Sapience (17)] 국가상징공간③ 서울이라는 이름을 되찾다

민병두 입력 : 2024.07.31 09:57 ㅣ 수정 : 2024.07.3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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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경무대 정문. [사진=연합뉴스]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인류 역사를 바꾼 프랑스 혁명은 성난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는 데에서 시작했다. 왜 하필이면 감옥일까? 무기를 확보하는 것이 당장의 시급한 목표이다. 하지만 감옥은 상징으로서 의미가 있다. 감옥은 체제를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공포의 이미지로 작동한다. 감옥을 탈취한다는 것은 체제의 밑둥을 흔든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울러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을 구출하여 혁명의 지원세력으로 삼을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가장 먼저 한 사업 중의 하나가 감옥을 짓는 일이었다. 1908년 서대문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를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준공했다. ‘근대화된 감옥’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조선시대의 감옥인 전옥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규모는 동양 최대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50만명 정도의 독립운동가 등이 투옥되었다. 강우규의사 유관순열사 등을 비롯해 1500여명이 이곳에서 순국했다. 

 

일본 천황이 녹음한 항복선언이 라디오 전파를 타기 직전, 조선의 마지막 총독부의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가 여운형을 찾았다. 여운형에게 치안유지권을 넘길 테니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여운형은 일본이 미워도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일본인들에게 폭력적인 보복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운형은 정치범의 즉각 석방 등 5가지 조건을 조선총독부가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8월16일 아침 서대문형무소의 문을 열어 정치범에게 해방 조국의 공기를 숨쉬게 했다. 애국투사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전날 칙칙 대는 라디오를 통해 알 듯 모를 듯한 천황의 항복선언을 들었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던 조선민중은 이제야 확실히 새로운 세상이 온 것을 알았다.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가 삼천리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1950년 4월26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제정된 ‘광복절 노래’에서는 이날의 감격을 이렇게 노래한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식민지의 가장 큰 상징이었던 남산의 조선신궁이 가장 먼저 사라졌다. 일제는 1930년대 황국 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조선인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라고 기록한 황국신민 서사비를 세웠다.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정하고 황국신민서사 제창, 궁성요배등을 하게 했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자 그들은 전국 각지 신사에 모신 신령을 일본으로 돌려보내는 승신식을 거행하고 신사를 해체했다. 조선신궁의 주요 신전과 배전, 제문이나 제구들이 철거되고 소각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본인들이 그들이 모시던 신전이 조선 사람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철거한 것인데 어쨌든 제국주의 상징물 1호가 사라졌다.

 

점령군 미군의 군정 3년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미군정은 조선 정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조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행정 경험도 없었다. 식민세력인 일본인과 식민지인 조선 사람에 대한 구분도 모호했다. 처음에는 일제 통치기구와 일제 관료를 그대로 두고 민정을 실시하려고 했다가 조선민중의 거센 반발을 샀다. 구체제를 뒷받침했던 친일세력을 정리해야 한다는 정세인식이 부족했다. 존 하지 미군정청 군정사령관은 경무대에 있었던 총독관저를 그대로 사용했다. 여러가지 혼선을 빚고 갈팡질팡하던 미 군정은 조선 사람들의 마음을 사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수도 서울에 관한 규정을 만들었다. 아직 나라 이름도 없었던 때이다. 조선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한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광복 1주년을 맞이하여 ‘서울시 헌장’을 발표하였다. 9월18일에는 경성부에서 서울시로 명칭이 바뀌었고 경기도 관할에서 독립하였다. 1949년에는 서울시가 서울 특별시로 전환되어 대한민국의 수도로 자리잡았다. 미 군정청이 발표한 서울시 헌장에서 서울은 Freedom Independent City가 된다고 규정했다. 미국에서 독립적인 위상을 가진 도시를 칭하는 개념인데 이를 그대로 번역하면 자유독립시가 된다. 매우 어색했다. 특별부제(特別府制)라고 번역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울특별시라는 명칭이 만들어졌다. (‘한국도시 이야기’ 손정목. 한울) 

 

원래 서울이란 신라의 수도이던 서라벌에서 유래한 말이다. 셔블이 서라벌이 되었고, 후에 금성(金城) 등으로 표기되다가 훈민정음 제정 후에 한국 고유어인 셔블이 표기형태로 등장했다.  조선시대에 한양이라고도 하고 서울이라고도 했다. 경성 경성부로 명칭이 바뀌어도 서울이라는 일반 명사도 사용했었다. 서울시 헌장이 발표되면서 서울이 일반명사이자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일본식 지명인 정, 정목, 통을 현재의 동, 가, 로로 일제가 붙인 지역 이름을 바꾸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일본인이 모여 살던 본정(혼마치)는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임을 기려 충무로, 황금정은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따서 을지로가 되었다.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일제 청산처럼 일본식 지명 개정 사업도 철저하지 못했다. 서울을 대표하는 명동은 메이지[明治] 천황의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중국 사신을 접대한 태평관이 숭례문 근처에 있었는데 지금도 태평로로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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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된 뒤 종로구 명륜동 주택 마당에 방치됐던 `이승만 동상'. [사진=연합뉴스]

 

국가상징물로서 우남 이승만 동상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고 대부분 신생 국가에서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면서 그에 맞는 상징을 구축한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제대로 된 도시건설과 상징구축은 곧바로 시작되지 못했다. 해방 후 미군정이 통치하고,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의 시설이 파손되고, 가난과 싸우는 것이 1차적인 목표였기에 무엇을 새로 세우는 것을 생각조차 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1960년대에서야 국가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조야하게 시작된다. 대한민국 도시의 역사, 건축사등에서 이승만 시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하지만 가난했어도 일제 시대에 대한 청산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을 최소한의 상징으로라도 제시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은 이승만이 갖고 있는 한계와 관련이 있다. 

 

이승만은 해방정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친일세력을 반공주의 세력으로 재포장하여 권력의 기반으로 삼았다. 민족과 통일 보다는 반공을 앞세웠다. 반공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미국과 연합하여 남한 지역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독립운동의 노선도 결이 달랐다. 무장투쟁이 아닌 외교주의 노선을 택했다. 외교로서 독립을 구하는 것이 희생을 줄이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길이라고 보았다. 이승만은 정세인식과 국제감각이 빨랐다. 1941년에 집필한 ‘일본내막기’ (Japan Inside Out)에서 일본이 머지않아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을 예견했고, 미국이 먼저 제압해야 한다고 했다.해방 후에는 신탁 반탁의 대립구도를 공산주의 대 반공주의로 프레임을 전환하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 미국의 세계전략을 빠르게 포착했다.

 

백범 김구는 임시정부의 상징으로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했다. 백범은 1932년 윤봉길 의사에게 지시하여 일본 천장절 및 전승기념식에서 폭탄을 투척케 하는 의거를 감행하게 했다. 중국 국민당 주석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과 4억 중국인이 못한 일을 해냈다며 극찬하고 고마워했다. 깊은 감명을 받은 장제스는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광복군 창설을 도왔다. 백범 김구는 장제스를 찾아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1943년 국제회담에서 최초로 한국의 독립이 명시적으로 선언되었다. 백범은 환국한 후에 단독정부 수립 반대, 남북회담 추진, 5.10 총선거 불참 등 선명한 민족주의 노선을 밟았으나 이로인해 고립되었다.

 

해방정국의 거두인 두 인물의 경쟁은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백범은 암살되는 것으로 승부가 난 듯했다. 이승만은 개헌을 통해 임기를 연장하고, 조봉암 등 정적을 제거하고 비서정치로 권력을 행사했다. 이승만을 우상화하는 가시적인 조치들이 잇달았다. 국가상징도로와 국가상징공간인 광화문 탑골공원 남산에서  우상화가 진행됐다. 세종문화회관의 뿌리가 된 것은 우남회관이다. 우남은 이승만의 호다. 1955년 6월2일 우남회관 건립위원회가 발족했다.

 

수도 서울에 다른 나라에 비추어 손색이 없는 공회당을 지어 시민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전후 복구가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에 이같이 큰 공사를 벌이자 비난이 빗발쳤지만 정부는 서울의 체면상 문화시설이 꼭 필요하다고 고집을 부렸다. 실제로는 1960년 정부통령 취임식에 맞춰 공사에 박차를 가한 것인데 4월혁명으로 공사가 중단됐다. 장면 정부에서 시민회관으로 이름을 변경하여 준공했지만 1972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훗날 이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이 지어진다.

 

1956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남산의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들어섰다. 이승만 동상은 1955년 ‘이승만 대통령 80회 탄신축하위원회(위원장 이기붕)’의 발의로 세워졌다. 그해 개천절인 10월 3일에 기공해서 이듬해 광복절에 맞춰 완공한 것이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동상의 높이는 그의 나이와 같은 81척(25m)이었다 몸통 길이는 23.5척(7m). 동양 최대, 세계 최대라고 자랑했다. 연인원 7만명이 동원되었다. 총 공사비 2억600만환은 극장 입장표에 기금조성비를 포함시켜 마련했다. 전 국민이 성금 모금에 나선 모양새를 갖췄다. 8각의 좌대에는 각 면마다 이승만의 생애를 조각했다. 이승만을 전통적인 두루마기 차림으로 형상화하여 국부 모습을 연출했다. 이기붕 국회의장은 “자주독립의 권화이며 반공의 상징인 이승만 대통령 동상 앞에서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그 뜻을 받들기를 맹세하자”고 말했다.

 

민주당의원 김영삼은 U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 동상건립에 소요된 비용은 40만 불 이상에 달한다. 적어도 2만명 이상의 굶주린 한국인들에게 1개월간의 식량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김영삼의원은 정부가 서울시의 명칭을 우남시로 변경하려 하고 있다는 주장도 했다. (《경향신문》 1956년 8월25일자)

 

1960년4월26일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발표되자 시민들은 탑공공원으로 달려가 그의 동상을 끌어내리고 밧줄로 묶어 끌고다녔다. 남산의 어머어마한 동상은 그 해 8월 중장비를 동원하여 철거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일시 폐간되었던 경향신문은 “독재자 이승만씨의 동상도 독재자의 말로 못지않을 정도인 산산조각으로 철거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승만의 동상이 있던 터에는 김구의 동상이 들어섰다. 김구는 1949년6월26일 향년 74세의 나이에 안두희가 쏜 네발의 총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온 국민이 애도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백범 진영에서는 민족장을, 이승만 정부에서는 국장을 주장하다가 국민장으로 타협했다. 임시정부 내무 재무부장을 지낸 조완구는 “자기들이 죽여놓고 무슨 국장이냐”고 큰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이날 오전 10시 경교장에서 출발하여 저녁 8시 그가 안장되는 효창공원에 운구가 도착하기까지 백만 인파가 애도하며 뒤따랐다. 이승만도  민족의 한이라며 남북통일의 서광을 보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난 것을 동포들과 함께 애통해 한다는 추도사를 전했다. 

 

이승만 동상이 철거된 후 그 자리에 단군동상과  4·19의거기념탑을 세우자는 논란이 분분했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과 대척점에 섰던 백범 김구였다.  김구 동상 건립은 일종의 국가적 사업이었다. 김구선생기념사업회(회장 곽상훈)가 김구 서거 20주년을 맞아 동상건립을 추진하자, 박정희가 금일봉을 내놓았다.  동상 제막식은 1969년 8월 23일에 있었는데, 이날은 김구의 93회 생일이었다. 박정희는 동상에  “위국성충은 일월과 같이 천추만대에 기리 빛나리. 일천구백육십구년 팔월 대통령 박정희”라는 휘호를 남겼다. 박정희가 김구동상을 통해 그의 친일이력을 지우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제스도 특사를 보내 측하하고 휘호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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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구본관 집무실. 1966년 [국가기록원 제공]

 

경무대의 권부화, 경무대 똥지기도 행세

 

1939년 총독관저가 경복궁의 후원에 해당하는 경무대로 이주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공신들이 임금에게 충성을 서약했던 회맹단이 있던 곳으로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탈아입국(脫亞入國)이라는 목표를 가진 일제는 총독관저에도 서양 양식을 도입했다. 제관(帝冠) 양식이라 하여 신고전주의 건축물 위에 일본식 기와를 올렸다. 일본의 자신감과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다.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는 솔선 수범을 보였다. 관저 정원에 있는 느티나무 두 그루를 조선목재통제회사에 제공했다. 1943년 4월30일 배를 만드는데 사용한다는 의미의 조선용재 수여식이 열렸다.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는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획된 행사였다. 고이소는 “느티나무야! 나아가서 배가 되어 미영을 쳐부수는데 도움이 되어라”며 내리치는 도끼로 나무를 내리찍었다. 

 

1948년 8월5일 중앙청에서 열린 제1회 국무회의에서 경무대를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는 것을 의결했다. 이승만은 민심수렴을 위해 9월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 2시에서 5시까지 경무대를 개방했다. 백성의 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민성일(民聲日)이라고 했다. 취지와는 달리 청탁이나 취직 부탁이 다수였다. 1인정치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자 이승만은 1955년 4월19일부터 4월20일 처음으로 경무대를 개방했다. 이승만은 담화를 통해 “조선시대에는 왕이 나라를 모두 자기 것이라고 했고 백성은 왕의 은혜를 입는 것이라고 했지만 민주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 나라가 모두 국민의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국민들이 나라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경무대도 이런 뜻으로 문을 열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개방 첫날 6만명, 이틀 동안 10만명이 경무대 구경을 했다.

 

이후에도 이승만은 경무대를 개방했다. “민주 정부 수립 이후로 이 나라가 다 우리 국민의 것이라는 것을 많이 각성하고 경무대도 이런 뜻으로 몇 번 열어서 구경하게 한 것인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니 대단히 기쁘게 생각되며 이후에도 종종 이렇게 하고자 하는 바이다” (1956.4.28 이승만 경무대 개방 담화)

 

하지만 경무대는 갈수록 권부의 상징 처럼 되어갔다. 경무대 비서들 앞에서는 장관들도 슬슬 기었다. 이승만 집권12년, 비서정치가 판을 쳤다. 경무대라는 단어가 주는 위압감 공포감이 대단했다. 비서정치가 갈수록 위세를 발휘했고 이승만은 총기를 잃은 듯했다. 경무대라는 위엄의  공간에서 언로가 차단되었다. 국내 신문 스크랩을 하여 읽어주면 못마땅해 했다. 국내 신문을 점차 멀리하고 뉴욕타임스, 시카고 트리뷴을 열독했다. 심지어 한글 맞춤법까지 개입했다. 이승만이 청년 시절 익숙했던 대한제국 시기의 성경 문체를 고집했다. 한글학회 등과 정면 충돌했다.

 

장안에서 인기가 있었던 김성환 화백의 4컷만화  ‘고바우 영감’에서 경무대는 똥지게꾼도 권력이 있다(1958.1.23)는 풍자를 했다. 경무대 똥지게꾼이 지나가자 다른 똥지게꾼들이 90도로 고개 숙여 인사하는 스토리인데 김성환은 이 만화로 연행되고 유죄를 선고받아 벌금을 내야 했다. 1949년에 경무대에 들어간 경비경찰 곽영주는 명사수 곽경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4월혁명 당시 시위대에게 발포하는 명령에 관여하여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5.16후에 구성된 부정축재조사 위원회에서 조사한 결과 그의 부정축재 규모는 2억2600만환이었다. 그 때 쌀 한 가마니 1만8000환이었다. 소통과 민주주의의 상징이어야 할 경무대가 권위와 부패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윤보선은 대통령이 되어  4개월 정도 주인이 없었던 경무의 새 이름 공모에 나섰다. 독재로 점철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1961년 1월1일 청와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내가 취임 후 전국의 수많은 국민으로부터 경무대 명칭을 갈라는 요청이 있었고 나 자신도 경무대가 구 정권의 실정으로 미루어 국민들의 원부가 되어있는 것을 생각할 때 이를 개칭하려고 애써왔다. 그래서 몇 개월 동안 생각한 끝에 지금 건물이 푸른 기와로 되어있고 조선 초엽에 경복궁 건물들이 모두 푸른 기와로 덮여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푸른 기와라면 우리나라 고전 문화를 상징할 수 있는데다가…” 그런데 총독관저로 지어졌던 경무대에는 일본식 기와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8년1월18일 김신조 일당이 휴전선 철책을 뚫고 산길을 시속 12km로 달려와 청와대 앞에 당도했다. 김신조는 기자회견에서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러 왔수다“고 밝혔다. 청와대에 대한 경호가 강호되었다. 장관급 경호실장이 군인으로 경호 업무를 맡아서 하게 되었으며 상시적으로 민간을 통제했다. 주변 산의 출입이 금지되었고 감시에 필요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북악스카이웨이를 닦었다. 이렇게 하여 여러 정권을 거치는 동안 청와대는 갈수록 국민과 분리되고 불행한 역사의 무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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