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K-Sapience (15)] 국가상징공간① 대한제국이 세운 독립문

민병두 입력 : 2024.07.29 10:45 ㅣ 수정 : 2024.07.31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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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세운 독립문 전경. [사진=연합뉴스]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도시는, 특히 한 나라의 정치 경제체제와 문화를 압축하고 있는 수도는 그 나라의 상징이다. 나는 해외여행을 하면 이틀간 그 나라의 옛 도심을 걸어 다닌다. 그러면 이 나라의 현재 속에 보존되어 있는 과거의 기억이 드러난다. 영광의 역사, 오욕의 상처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믿었는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 도시는 기억이다. 생각이다. 생각을 공간적으로 조직화하고 표현한 것이 도시이다. 길을 보면 도시가 보인다. 집과 왕궁과 성과 현대적인 건물을 보면 도시의 역사적 지층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는 미래다. 나아가고자 하는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서울시가 국가상징공간과 국가상징도로를 재추진한다. 한국전쟁 74주기를 맞아 국가상징물의 일환으로 100m 높이의 국기게양대 설치 계획을 발표했다가 우왕좌왕한다. 어떤 나라의 이미지는 그 나라의 수도와 랜드마크를 통해서 형성된다. 만리장성, 자유의 여신상, 후지산, 에펠탑은 그 나라의 상징물이다. 한국은, 서울은 어떤 상징물을 갖고 있는가. 경복궁 광화문 N타워 한강 등등이 후보로 떠오르지만 딱 이것이다는 공감대가 없다. 그러면 평양은? 주체사상탑 김일성동상 인민문화궁전 등등. 서울은, 평양은 왜 지금과 같은 도시를 만들었을까? 

 

고려의 수도인 개경(개성)은 풍수도참 사상 위에 올려진 도시다. 조선의 한성(한양, 서울)은 성리학적 기반 위에 세워진 계획도시이다. 조선은 고려의 생각과 이념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숭유억불이다. 구체제제의 기득권과 생각을 누르고 일어서야 새로운 것의 의미가 깊어진다.

 

조선과 대한제국이 한성에 세운 생각의 건축물과 그 길 위에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상징과 생각을 이식했다. 일본은 영구히 조선을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55년 서울이 인구 200만 명 규모의 도시가 되었을 때를 생각하고 여러 구상을 했다. 해방 후 남과 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방식의 도시를 세운다. 질서의 질서화가 평양이라면 무질서의 질서화가 서울이라고 할 수 있다.

 


• '소중화(小中華)'였던 조선에게 '독립'은 새로운 개념

 

선교사 제임스 S. 게일이 1889년3월 이 땅을 처음 방문하여 남긴 ‘조선 마지막 10년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상을 읽는데 유용하다. 

 

“독립은 새로운 개념이다. 단어 또한 그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 만든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한번도 다른 존재로부터 분리된 오롯한 자신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조선은 출발부터 소중화(小中華)로 자리매김했다. 중국을 중심에 놓고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도모했다. 그런 조선의 역사에서 독립이라는 개념이 들어설 수가 없었다. 민족, 독립은 일본이 만든 서구언어의 번역이다. 중국이 흔들리고 제국주의의 침략이 코 앞으로 다가오면서 독립이 왕조와 지배계층의, 민족이 민중의 주제어가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청나라가 패전했다. 조선은 조공관계의 폐지를 선언하면서 자주독립국임이 되고자 했다. 일본의 조선 침략에 불안감을 느낀 고종과 명성왕후가 러시아를 끌어들이자 일본은 1895년 명성왕후를 시해(을미사변)했다. 고종과 명성왕후는 살 길을 러시아에서 찾았다. 1000여명의 포위를 뚫고 경복궁을 탈출한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민중들의 반일감정도 도움이 됐다. 

 

고종은 1897년 2월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다. 10월12일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최초의 헌법인 대한국 국제를 선포하는 등 자주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왕의 지위를 황제로 올렸다. 황제의 나라가 되었기에 이제 부터는 주상전하가 아니라 황제폐하, 대군주전하로 부르고 천세가 아니라 만세를 외칠 수 있게 되었다. 서울은 조선의 왕도에서 대한제국의 황도가 되었다. 새 황궁인 경운궁을 증축하고 독립국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을 만들었다. 원구단은 대한제국의 성역이다. 제후국 소국의 지위에서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선포한 것이다.

 

“십일일 밤 장안의 사가와 각 전에서는 등불을 밝게 달아 길들이 낮과 같이 밝았다. 가을 달 또한 밝은 빛을 검정 구름 틈으로 내려 비추었다. 집집마다 태극 국기를 높이 걸어 애국심을 표하였고, 각 대대 병정들과 각처 순검들이 만일에 대비하여 절도 있게 파수하였다. 길에 다니던 사람들이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경사를 즐거워하는 마음에 젖은 옷과 추위를 개의치 않고 질서 정연히 각자의 의무를 착실히 하였다.”

 

“십일일 오후 두시 반 경운궁에서 시작하여 환구단까지 길가 좌우로 각 대대 군사들이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었다. 순검들도 몇 백 명이 틈틈이 벌려 서서 황국의 위엄을 나타냈다. 좌우로 휘장을 쳐, 잡인 왕래를 금하였고, 옛적에 쓰던 의장 등물을 고쳐 황색으로 만들어 호위하게 하였다. 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고 지나갈 때에는 위엄이 웅장했다. 총 끝에 꽂힌 창들이 석양에 빛을 반사하여 빛났다. 육군 장관들은 금수로 장식한 모자와 복장을 하였고, 허리에는 금줄로 연결된 은빛의 군도를 찾다. 옛 풍속으로 조선 군복울 입은 관원들도 있었으며, 금관 조복한 관인들도 많이 있었다. 어가 앞에는 대황제의 태극 국기가 먼저 지나갔고, 대황제는 황룡포에 면류관을 쓴 채 붉은 연을 타고 지나갔다. 어가가 환구단에 이르자 제향에 쓸 가색 물건을 둘러보고 오후 네 시쯤에 환어하였다. 십이일 오전 두시 다시 위의를 갖추어 황단에 가서 하느님께 제사하고 황제 위에 나아감을 고하였다. 황제는 오전 네시 반에 환어하였다. 동일 정오 십이시에 만조백관이 예복을 갖추고 경운궁에 나아가 대황제와 황태후, 황태자와 황태비에게 크게 하례를 올렸고, 백관들이 크게 “황제폐하 만세”를 불러 환호하였다.” (독립신문 1897년10월12일. ‘덕수궁’ 안창모 지음에서 재인용)

 

경성의 중심도로는 경복궁에서 황토마루(광화문 네거리)의 남북로, 황토마루와 동대문의 동서로가 전부였다. 초대 주미 정무공사로 있었던 박정양이 고종의 지지를 받고 워싱턴에서 본 방사성 도로를 바탕으로 한성도시개조사업에 나섰다. 경운궁과 대한문이 고립된 장소가 아니라 교통의 시발점이 되게 했다. 당시 정치의 중심이었던 경복궁과 북촌도 연결하고 상업의 중심지인 종로 등과도 길을 열었다 오늘날 서울 중심지의 기본도로가 이때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서대문-청량리 전차 노선도 개통되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피신해 있을 때 부터 독립 구상을 실천했다. 1896년 고종과 협력하에 독립협회가 출범한다.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도 지원했다. 중국의 은혜에 보답하며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의 영은문 자리에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 떠 독립문을 만들었다. 최초의 서구적 양식의 건축물이다. 1897년 11월20일 고종의 동의를 받아서 서재필이 진행한 사건이다.

 

“오늘 우리는 국왕이 서대문 밖 영은문의 옛 터에 독립문이라고 명명할 문을 건립한 것을 승인한 사실을 경축하는 바이다. 우리는 그 문의 조명(彫銘)이 국문으로 조각될지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 부터, 그리고 모든 유럽 열강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조선이 전쟁의 폭력으로 열강들에 대항해 승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조선의 위치가 극히 중요해 평화와 휴머니티와 진보의 이익을 위해서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며, 조선이 동양 열강 사이의 중요한 위치를 향유함을 보장하도록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전쟁이 그의 주변에서 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의 머리 위에 쏟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힘의 균형의 법칙에 의해 조선은 손상 받지 않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독립문이여, 성공하라! 그리고 다음 세대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라!” (독립신문의 영문판 Independent 1896.6.20. 위 안창모)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기념식이 열렸다. 배재학당 학생들이 조선가 독립가 등 세 곡을 불렀다. 영국 작곡가 에드워드 림볼트가 작곡한 ‘O Happy Day, That Fixed My Choice’(주의 말씀 받은 그 날’에 가사를 입혔다. 8절까지 긴 노래이다. “일천팔백 구십칠년 건양원년 십일월에 아시아주 독립조선 독립문을 새로세(우)네 (아래 후렴) 기쁜 날 기쁜 날 우리나라 독립한 날 우리나라 독립한 날 일월같이 빛나도다 기쁜 날 기쁜 날 우리나라 독립한 날… 태극기를 높이달고 독립가를 불러보세, 이천만중 일심으로 승평악을 화답하네(8절)…후렴”

 

영은문을 밟고 올라서는 것은 큰 사건이었음을 이광수의 미완성 장편소설 ‘선도자’(1924)에도 엿볼 수 있다.

 

“독립문 앞에는 헐려진 연주문(영은문의 원래 명칭) 재목을 그냥 쌓아 놓고 굵다란 연주문 돌기둥은 섬거적을 싸 놓았다. 그리고 영은문이라는 큰 현관은 바로 독립문 아래 땅바닥에서 서너 조각을 깨트려 놓아 그리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밟도록 하였다. 오늘 대황제가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나오시면 황제가 앞서고 백관이 뒤를 따라 그 여러 백 년 치욕의 기억을 가진 연주문 현관을 밟고 지나갈 것이오. 그런 후에는 일반 인민들이 한 번씩 밟고 지나갈 것이다”

 

동아일보에는 독립문에 관한 믿지못할 기사가 실려있다(1924년 7월15일)

 

“…연주문 석주는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전에는 둘러매었든 쇠사슬이 있었는데 독립문이 선 뒤에 누가 끊어버렸답니다. 속박당하는 것이 해방되었으니 쇠사슬이 끊어진 것입니다. 년전에 삼일운동 때 독립문 위에 태극기가 뚜렷이 솟아나서 경찰서에서 씻어버리려고 펌프질까지 한 일이 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는 그러지 못할 곳이라 도깨비 짓이라고 그 당시 떠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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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100주년인 2019년 3월 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앞에서 시민들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서 만세를 외치며 광화문광장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한성에 들어선 최초의 서구식 공원 '탑골 공원'

 

서구식 공원도 처음으로 한성에 들어섰는데(최초의 공원은 인천의 만국공원)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던 원각사 터였다. 여기에 탑골공원을 만들었다. 1897년 고종황제의 한성개조사업의 일환으로 건축됐다. 북학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백탑파(원각사지 석탑. 흰 빛을 띄어 백탑이라고 불렀다)가 이곳에서 활동했다. 고종의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이 공원의 명칭을 파고다로 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공원의 개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공원은 광장과 함께 민주주의의 플랫폼 역할을 한다. 이곳에서 3.1운동 선언문이 낭독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불길이 삼천리 방방곡곡에 번져나갔다.  민족대표 33인이 요릿집 태화관에 모여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부르며 연행되어갔다. 누군가가 햇불을 들어야 했다. 경신중학생 정재용이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로 시작하는 선언문을 읽기 시작했다.  

 

전국에 독립선언문 2만여장이 비밀리에 배포되어 있었다. 경향 각지에서 200여만명의 조선민중이 만세운동에 동참하는데 탑골공원이 그 발원지가 됐다. 당시로서는 민중이 모일 수 있는 경성부 중심에 단 하나의 공원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나와있는 3.1운동의 발원지 탑골공원은 지금 노인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조선 말, 대한제국 시기 동아시아는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영국 프랑스가 세계를 나눠 갖고 네덜란드 독일이 나머지를 차지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스페인 포르투갈은 이미 중남미를 차지했다. 미국은 열강의 잔칫상에 마지막으로 뛰어들었다.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중국은 서구열강의 땅따먹기 대상이 되어있었다. 영국은 전세계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들면서 동양의 끝까지 당도했다. 홍콩을 조차하고 중국을 요리하기에 바쁜 영국으로서는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그런데 일본이 아시아에서 참전했다. 청일전쟁을 치르는 것을 보니 만만치 않았다. 영국은 자신들의 중국 내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를 저지할 목적으로 1902년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에서 특수 권익을 영국에게서 인정받았다. 일본은 1904년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러시아 발틱함대가 지구를 돌아 일본 앞바다에서 궤멸하는 것을 보고 서구 열강은 일본의 실력을 인정했다. 제일 나중에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든 미국은 필리핀에서의 지분을 보호할 목적으로 일본과 카쓰라-태프트 밀약(1905)을 맺었다. 조선은 일본이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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