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국적 없는 언어 시대 ? 해방 직후 한글 전용 결정, 문맹율 하락에 결정적 기여 한글전용이 공고해졌으니 이제 유연성을 가져도 돼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우리나라에서 왕의 명칭이 중국식으로 바뀐 것은 신라 지증왕(500-514) 때 부터이다. 국호도 신라로 통일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면서는 백제어와 고구려어가 시간을 두고 사라졌을 것이다. 기원 후 500년 경부터 상당히 많은 고유어가 중국한자어로 대체된다. 멸망한 고구려 백제의 언어들은 아주 제한적으로 남아있다. 고려가 중국식 문화를 흡수하면서부터는 귀족들의 이름이 중국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고려 상류층이 주자학을 도입하면서 성씨가 보급되었다. 이름까지 한자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우월한 문화권이 침투하면서 강세언어가 함께 유입된다. 허세와 유행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제도와 문화가 된다. 어느 새 우리의 사람 이름은 완전히 중국 스타일이 된다.
일본이 1910년 민적부를 도입하고 1922년 조선호적령을 실시하면서는 성이 없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 전에는 성이 없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한자로 이름을 등록해야 했고, 1939년 이후에는 창씨개명까지 해야 했다. 일제의 영향으로 여성들의 이름 뒤에 자(子)가 들어갔다.
1948년 한글전용법이 시행되면서 한글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76년에 서울대학교 국어운동학생회가 '고운이름자랑하기대회'를 열면서 우리말 이름이 복권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유어로 이름을 사용했던 시기가 더 길었지만 지금 고유어 이름은 아주 극소수이다. 중국식 이름은 우리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지명도 한자어로 바뀌었다. 사람 이름을 다시 옛날 식으로 바꾸는 것은 가능할까. 또 옳을까?
색깔을 표현하는 우리말은 다섯개이다. 빨강 파랑 노랑 하양 검정. 여기서 파생한 우리 말의 형용사가 많다. 미묘한 차이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경계가 되는 색을 표현하기 위해 형용사가 발달했다. 빨갛다 새빨갛다 뻘겋다 시뻘겋다 검붉다 불그레하다 불그스름하다 불그죽죽하다…. 노랗다 뇌랗다 샛노랗다 연노랗다 누렇다 누르스름하다 노리끼리하다 노르죽죽하다. 우리의 색상 고유어가 다섯가지에 머무는 동안 주황 연두 녹색 청록 남색 보라 자주 같은 말이 수입되었고, 외래어였던 이 단어들에서는 다양한 파생어나 형용사가 발전하지 못했다. 현대 서양 미술이 소개되면서 들어온 색깔의 종류와 코드는 더 많다. 이런 어휘들을 우리 고유어로 대체할 틈도 없었고 시대적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냥 영어로 쓰여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우리가 세계 문화와 문명을 다 만들 수도 없고, 우리 문자가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도 없다. 외국에서 들어온 문명과 함께 수입되는 문자와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인가, 아니면 변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영원한 숙제이다.
네덜란드와 일찍이 교류를 한 일본에서는 학문을 적극 수입하기로 하고 그것을 연구하는 난학(蘭學)이 발달했다. 우다카와 요안 등 일부 학자들이 어휘의 번역에 나선다. 구락부(俱樂部 club)같은 음역어도 적지 않지만, 우다카와 시대에 광범위하게 만들어진 번역어는 동아시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의학 화학 등의 용어는 물론 개인 사회 공화국 등 정치 경제 분야의 많은 단어가 이때 만들어졌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현대 한자어휘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도 이 과정에서 일본식 한자어 어휘를 대거 받아들였다. 문명 문화 문물을 따라 언어도 전파되게 되어있다. 일본의 근대용어가 일본 지식인이 만든 것이라면, 중국 근대 한자 어휘는 서양 선교사가 만든 것이 많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그리스도교(基督) 예수교(耶蘇)가 음역어이고 천주교(天主)교는 번역어이다. 현대중국에서는 새로운 번역어를 만들고 있다.
소리글자와 뜻글자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조어능력이 뛰어난 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라틴어에서 파생한 영어나 프랑스어는 라틴어 뿌리를 갖고 있어서 이것을 갖고 새로운 어휘를 만들 수 있다. television telegraph telescope(microscope) telephone... 여기서 tele는 멀다(far)는 뜻이고 vis는 본다(see)이다. 어근을 조합한 것이다.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문화와 문명이 전진하고 어휘도 풍부해졌다. 현대 기술 용어의 상당수가 영어에서 생산되고 있다.
뜻글자인 한자의 조어능력도 뛰어나다. 한자는 쓰기 불편하고 복잡하기는 하지만 뛰어난 글자이다. 한자가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상형문자 중에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글자가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는 신조어를 만들기에 용이하다. 그런 관계로 앞서 본 것처럼 근대 이후의 서양 어휘의 다수가 중국식이든 일본식이든 한자어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한글전용을 세 단계에 걸쳐 완성했다. 해방 후 일본말 걷어내기 운동에 나섰다. 중국식 한자 어휘와 일본식 한자 어휘를 점차, 그리고 마침내 모두 한글로 표기하기게 이르렀다. 우리말과 글을 지키겠다는 강고한 역사의식과 주체의식이 형성된 덕분이다.
해방 직후 군정청 조선교육심의회는 교과서에서 한자를 제외하고 한글만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글 전용론자와 한자 폐지 반대론자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1948년에는 한글전용법이 만들어졌다. “대한민국의 공용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고 했다.
해방 직후 한글을 전용하기로 한 것은 우리나라 문맹율을 떨어트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래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대체로 국한문을 혼용했다. 1963년에는 일상생활에서 한글과 한자의 구별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육목표가 세워지고 교과서에 한자를 병용했다. 여전히 조사와 어미 만을 한글로 쓰는 문화가 강고했다.
박정희는 1968년 한글전용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정부 공문서를 한글 전용으로 작성하게 했으며 학교에서 가르치던 상용한자를 폐지했다. 1970년 1월부터 공문서에는 한글만 쓰게 했다. 1948년 한글전용법의 단서조항을 삭제한 것이다. 그러나 반발도 적지 않았다. 이후 한겨레신문이 창간되면서 1990년대에는 모든 언론이 한글 전용을 하게 되었다. 한글 전용을 위한 마지막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이 시기에 불어닥쳤던 민족주의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 컴퓨터 도입으로 인한 기계화의 영향도 컸다. 2005년에는 국어사용을 촉진하기 위한 국어기본법이 제정되었는데 “공공기관의 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2012년 ‘어문정책 정상화 추진위원회’(회장 이한동)가 국어기본법이 위헌이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국민의 표현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국어정화위원회를 두어 우리말 도로찾기 운동(1948)을 시작했다. 우리말이 있는 것은 일본말을 버리고 우리말을 쓴다, 우리말이 없는 것은 옛말에라도 찾아보아 비슷한 것이 있는 것은 그 뜻을 새로 정해 쓴다(도시락), 옛말에도 없는 말은 다른 말에서 비슷한 것을 얻어 새 말을 만들어 쓴다(단팥죽 메밀국수 통조림 튀김 꼬치 전골), 일본식 한자를 버리고 우리가 전부터 써오던 한자를 쓴다는 등의 원칙을 마련했다.
우리말의 문어체가 미쳐 형성되지 않은 시기인 탓에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식의 문장을 흡수했다. -에 대한, -에 관한, -에 의한 등의 문장은 개선 노력이 있지만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숨 죽인채 귀를 기울였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등 많은 표현이 일본에서 유래했다. 일본어의 유제를 많이 거둬냈다고 하지만 한계가 있다. 스메끼리 쓰봉 우와기등의 생활용어, 미다시 등의 신문용어, 시다 등의 봉재 용어, 오야봉 등의 사회용어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앗사리(화끈하게) 노가다(막일)등 많은 단어가 일본어인지 한국어인지 모르는 채로 사용되고 있다. 결정적인 것은 근대사에서 유입된 일본식 한자어휘이다. 대통령 헌법 경찰관 도서관 박물관 승강기... 일본에서 근대 이후 들어온 한자 어휘의 80% 이상은 그대로 남아있다.
일본어와 일본식 표현이 정리되는 사이에 영어와 영어식 표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영어에서 유래된 표현법도 많다. -중에 하나(one of - ), -을 의미하지 않는다 (does not mean that), -라 불리우다 (called), -모임을 갖는다(have a meeting) 등등. 우리는 원래 잘 안 쓰던 피동태도 많다. 시제가 발달한 표현을 갖고 오는 경우가 많다. 진행형 완료형 등이다.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일본어를 사용하여 자신을 과시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은 영어 단어를 섞어 쓰거나 영어식 표현을 써야만 더 소통이 잘된다는 인식이 늘어났다. 조기영어교육, 기러기 아빠 등 새로운 풍속도가 생겼다. 아파트 브랜드를 포함하여 많은 영어 상표가 범람하고 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을 때는 모두가 읽고 쓸 수 있도록 한 포용의 언어, 평등의 언어였다. 과도한 외국어의 사용은 한글이 발음기호화되면서 배제의 기능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된다.
외래어와 외국어를 추방하고 순수한 우리말로 바꾸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이냐에 대해서는 반대도 적지 않다. 어휘가 풍요로워 질수록 그 나라의 언어가 더 강력해진다는 것이다. 언어의 잡종교배를 나쁘게만 보지 말고 서로 교류하면서 성장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글만으로 우리말과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고유언어로 한자어를 대체하거나, 외국어에 대해 가능하면 북한의 조선어처럼 적절한 번역어를 찾는 방법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최현배도 다양한 시도를 했으나 만족할만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원체 한자어의 침투가 심하기 때문이다. 토박이 말을 사용하여 주체어의 어휘를 확장한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지만 우리 말이 더 풍성하고 다양한 어휘로 뻗어나가기 전에 침식됐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리가 다섯가지 색깔만을 어휘로 갖고 있다가 외국어의 침투를 경험하면서 결국에는 다른 언어에 뿌리를 둔 어휘를 사용하게 된 것을 짚어봤다. 우리가 한글로 많은 어휘를 대체하기에는 우리 고유어 어휘의 수가 적고 외국어가 우리 언어에 2층 3층 4층 건조물을 이미 구축하고 있다.
요즘은 “심심(深深)한 위로를 드린다” “무운(武運)을 빈다”와 같은 용어를 젊은 세대들이 "심심하게 위로한다“ ”운이 없기를 바란다“등으로 오독하면서 한자어 교육을 다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단순히 심심한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한자교육을 하자는 주장은 아닐 것이다. 한글인 사흘을 4일로 이해하는 문해의 한계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문해 능력의 저하를 지적하는데 이는 언어의 유행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 앞세대에서도 뒷세대가 자신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지금은 심심한 위로를 드린다와 같은 고어적인 표현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젊은 세대가 이해하기 힘든 말이나 어휘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언어스타일이 대체할 것이다. 어떤 어휘는 도태하고 어떤 어휘는 새로 만들어지게 되어있다.
언어의 주력은 서울의 중산층 40-50대이다. 표준말이다. 하지만 새로운 언어의 생성은 젊은 층이 담당하고 있다. IT시대의 신조어들이 우리 언어에 대거 흡수되고 있다. 최근 20년간 새로 늘어난 어휘의 증가는 반가반가 등 SNS상의 언어다. 야민정음(야구갤러리+훈민정음)도 특별한 공간에서는 사용하고 있다.
앞서 노년세대는 한자문화권, 중장년세대는 영어문화권, 청년세대는 IT문화권에 산다고 했다. 30년전 까지만 해도 논어 맹자를 인용하여 덕담을 하거나 글을 써야 품격이 있어보였다. 지금은 그렇게 하면 꼰대라고 한다. 어떤 표현은 쇠퇴하고 다른 표현이 등장한다. 언어는 그렇게 발전하는 것이다.
훈민정음이 중국어 발음기호이고, 국한문 혼용을 해야 한다는 뉴라이트 계열의 사고로는 한글을 발전시킬 수 없다. 지금까지 쌓아온 한글의 역사를 뒤로 돌릴 수는 없다. 우리가 너무 많은 외국어 어휘의 침식을 당해 한계가 있지만 첫째 홈페이지를 누리집으로 하는 등의 번역어를 늘리고, 둘째 고유의 어휘로 할 수 있는 것은 복권을 하고, 셋째 한자어에서 유래된 어휘 중에 낡은 것은 대체하는 방향으로 꾸준한 노력을 해야 한다.
주체적이고 창조적으로 현재의 한자어를 우리 말로 대체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은 것처럼, 한자를 병용하는 것도 저항이 커서 불가능하다. 언어사 생성되고 발전하고 쇠퇴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맞춰 우리글과 우리말을 정돈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한자를 공교육에 흡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연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 말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한편 세계화시대에 이웃언어에 대한 능력을 증진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영어만큼 중국어가 중요한 시대이다. 특히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그렇다. 언어의 연관성도 강하다.
그 많은 시간을 들여 영어를 배우면서 한자 학습을 배제하는 것이 현명해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 한자를 가르치다고 해서 한글전용 자체가 흔들릴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도 없다. 그만큼 한글전용이 공고해졌으니 유연성을 가져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