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K-Sapience (25)]  한국인의 연애, 결혼이야기② 조선 사람 연애를 시작하다.(개화기-1920년대)

민병두 입력 : 2024.08.29 08:34 ㅣ 수정 : 2024.08.30 06:43

유길준은'서유견문'에서 미국의 결혼제도에 대해서 소상하게 소개
이광수는 기존의 조혼을 강력비판하고 사랑에 기초한 혼인을 주창
'연애'라는 단어 첫 등장은 1912년, 일본소설 번안작 <쌍옥루>에서
'사의 찬미' 윤심덕과 연인 김우진은 시모노세키 연락선에서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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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서양 사절단인 보빙사 일행.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유길준이고 앞줄 왼쪽부터 통역을 맡은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이다. [사진=연합뉴스 자료 사진]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기억이 정확치는 않은데 1999년 어느 미국 잡지의 밀레니엄 특집호에 지난 1000년 간의 10대 사건에 대한 여론조사가 실렸다. 징기스칸의 세계 정복이 첫번째였고, 신대륙발견, 인간의 달 착륙 등이 포함됐다. 10대 발명 중에는 현대적인 칫솔이 상위에 올라 있었다. 칫솔은 아름다운 키스에 대한 환상을 현실로 보장해주었다. 여성들의 압도적인 반응으로 그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비슷한 것으로는 현대적인 피임기구의 발명도 있을 수 있겠다.

 

지난 2000년까지 천년 간 한반도에서 일어난 10대 사건을 꼽으라면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한류의 보급, 분단과 전쟁, 민주공화정제의 도입, 기독교의 다수종교화 등이 나열될 것이다. 여론조사를 하면 결혼제도의 변화도 포함될 것으로 생각한다. ‘연애 없는 결혼’에서 ‘연애있는 결혼’으로의 변화는 커다란 전환이었다. 연애있는 결혼은 현대적인 결혼제도의 출발점이 되었다. 여성의 인권과 가족 내 권리 보장도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조혼제도 축첩제도 이혼과 개혼을 금지하는 제도의 철폐도 연애에 눈을 뜨면서 비롯되었다. 

 

조선에서는 미국에서 7년 간 공부를 한 유길준이 ‘서유견문’ 제15장에서 자신이 미국 여행을 통해서 본 결혼제도에 대해 소상하게 소개했다. “남자와 여자의 나이가 충분히 차기를 기다렸다가 자기가 결혼하겠다는 것을 부모에게 알리고 스스로 결혼을 결정하는 권리가 있다”고 하여 사랑에 기초한 성인남녀의 결혼이라는 서구의 풍습을 소개했다. 유길준이 관여한 1894년 갑오개혁에서 조혼을 금지하고 결혼의 적령을 규정하며 과부의 재가를 허용했다. 유길준과 개화파는 결혼제도의 변화가 근대국가의 출발점이라고 보았다. 조선시대 중기 부터 굳어 온 이 악습이 하루 아침에 폐지될 수는 없었다. 

 

혼인연령에 대한 규정은 조선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국대전에 남자는 15세, 여자는 14세를 넘어서 결혼하도록 했다. 이보다 어린 나이의 조혼은 금했다. 부귀를 사모하여 혼인을 너무 일찍하면 부모되는 도리를 알지 못하여 그 폐해가 크다고 보고 결혼 하한 연령을 두었다. 하한 연령 보다 어린 나이에 혼인하는 습속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어 이러한 규제를 도입했던 것이다. 부모의 노환을 핑계로 하여 그 보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고, 태어나자 마자 부모가 약정하여 부부의 인연을 맺기도 했다.

 

갑오개혁에 이어 일제도 조혼 금지를 법(1912. 조선민사령. 남자 만17세, 여자 만 15세)으로 정했다. 조금씩 혼인 연령이 늦어지기는 했어도 여전했다. 1925년 여성의 초혼 평균 연령은 16.7세이고 1940년에는 17.5세 였다. 대부분의 인구가 분포하고 있었던 농촌에서는 그보다 다소 일렀고, 도시에서는 2살 정도 늦었다고 한다.

 

독립신문과 여러 잡지에서도 조혼의 폐해를 지적하고 나섰다. 당시에 개화된 지식인이라면 침묵하지 않았다. “좋은 가정이 합하면 그 나라도 좋고, 좋지 못한 가정이 합하면 그 나라도 좋지 못하느니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반드시 가정에서 시작할 것이요, 가정을 다스리는 도는 혼인에서 시작할 것이라.

 

사람의 일은 다 혼인에서 근원되어 여러가지로 흘러가는 연고라”<가정잡지. 1906> 주시경은 ‘일찍이 혼인하는 폐’라는 글을 통해 이처럼 사회의 기본단위로서의 가정과, 그 가정을 이루는 출발점으로서의 결혼에서 미개와 야만과 결별할 것을 촉구했다. 박승철도 “지나(중국)의 전제가 세계의 공화적 사상에 무너졌듯, 가정의 전제도 두드려 부수고 가정이 공화되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식민지시대 한국 가족의 변화’ 권희정>

 

연애 없는 결혼, 그것도 10대 초중반에 가족간 결합으로 강제로 하게 되는조혼이 얼마나 인간을 불행하게 했을까. 1930년에 한국 형무소에 갇혀있던 여자 살인범 수는 47명. 남자 살인범 수 53명에 비하면 남자 1백에 여자 88의 고율이다. 독일의 여자 살인범은 남자 1백에 13.5였고, 일본에서는 남자 1백에 여자 11, 타이완은 남자 1백에 여자 3명이었다.

 

남녀 살인범 비율은 세계 평균 남자 1백에 여자 4가 상식이었다. 한국의 남자 1백에 여자 88은 엄청난 비율이다. 그런데 여자 살인범의 66%가 남편을 살해했다. 남편 살인범의  평균 초경 연령은 16년3개월. 이들의 평균 연령은 15세 1개월. 거의가 초경 이전에 결혼했다. 남편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여건 때문이었다.<’한국여성의 의식구조’ 이규태> . <경성고민상담소>에 따르면  일제 시대 이혼의 원인은 대부분 조혼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한다.

 

훗날 <민족개조론>으로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한 춘원 이광수는 조혼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논설과 소설을 통해서 사랑에 기초한 혼인을 강조한 주창자이다. 우리 근대 문학에서 처음으로 남여가 서로 떨리는 감정을 갖고 사귀며 결혼을 고민하는 과정을 그려서 사랑을 성문화한 ‘사랑의 발견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조혼의 악습’ ‘조선가정의 개혁’ ‘혼인에 대한 관견’ ‘혼인론’ 등을 통해 기존 결혼제도에 대해 통렬히 비판했다. 이광수는 “나는 조선인이로소이다. 사랑이라는 말을 듣고 맛은 못 본  조선인이로소이다. 조선 남녀는 아직 사랑으로 만나 본 일이 없나이다. 조선인의 흉중에 어찌 애정이 없으로리까마는 조선인의 애정은 두 잎도 피기 전에 사회의 관습과 도덕이라는 바위에 눌리어 그만 말라죽고 말았나이다. 조선인인 과연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국민이로소이다… 이에 우리 조선남녀는 그 부모의 완구(장난감)와 생식하는 기계가 되고 마는 것이로소이다“<어린 벗에게. 1917> 

 

이에앞서 번안소설과 신파극은 주로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었는데 대중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연애’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12년의 일이다. 일본소설의  번안작 <쌍옥루>에서 이다. 조중환은 번안소설 작가로 유명했는데 <장한몽>은 극화되어서 구름 관중을 몰고 다녔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에 넘어가 첫사랑을 배신할려고 했다가 결국은 이를 악물고 성공한 첫사랑 이수일과 결혼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이제 사랑은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사였다. 1919년에서 1923년 60편의 소설 중에 40편이 연애를 소재로 한 것이었다. 

 

신소설, 연애를 본격 다룬 번안소설, 신파극,  근대학교는 새로운 유행의 발원지이고 전파자 역할을 했다. 서양의 선교사와 교회를 통해서, 일본유학생의 체험담으로 알려졌다. 중등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에게 전파되었다.  3.1운동 이후에 수많은 신문 잡지가 창간되면서 대중화된 것으로 보인다. 

 

김원주는 1920년 <신여자>를 창간했다. 결혼 이전에 교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서양에서는 교회에서 알기도 하고 무도장에 부모가 자녀를 데리고도 가며, 가정과 가정 사이에 초대도 있고….남녀 교제가 없는 조선에서는 아마 서로 아는 집끼리 자주 왕래하는 것이 좋은 방법인 줄 압니다. 이 외에 교제가 넓은 이가 책임을 가지고 청년 남녀를 위하여 교제하는 회를…“ 라고 주장했다. 1960-80년대의 미팅, 소개팅에 대한 이론적 원조라고 할 수 있다. <한국문화사. 신영숙의 ‘자유연애 자유결혼, 그 이상과 현실’에서 재인용> 

 

김원주는  ‘신세대 신여자 선언’을 통해 여성도 인간임을 선언했다.그는 ‘신정조론;에서 “우리의 인격과 개성을 무시하는 재래의 성도덕에 대해 열렬히 반항하지 않을 수 없다…정조는 결코 도덕도 아니요, 단지 사랑을 백열화시키는 연애 의식과 같이 고정한 것이 아니라 유동하는 관념”이라며 기존의 윤리규범을 비판했다. 그는 동아시아 3국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던 여성해방운동가 엘렌 케이(Ellen Karolina Sofia Key 1849-1926)를 국내에 소개했다.

 

엘렌 케이의 저서 <연애와 결혼>은  ‘생명의 신앙’ ‘생명의 종교’라고 할 만큼 널리 보급되었다. 아시아 3국에서 교과서와 같았다. ’여성운동의 제1인자 엘렌 케이’(노자영. 1921)  ‘엘렌 케이의 연애관’ ‘여성운동의 어머니인 엘렌 케이에 대하여“ 등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연애를 다룬 이광수의 소설 <무정>에서도 주인공의 독서노트에 그의 이름이 언급될 정도였다. 신여성과 여성해방운동론자들에게 평등한 부부라는 지향점을 제시했다.

 

엘렌 케이의 연애관은 영육일치의 연예관으로, 연애는 독립적 인격을 갖춘 남여의 자유로운 정신적 육체적 결합이라는 것이다. 성적 방종을 의미하는 자유연애(Free Love)가 아니고 연애의 자유(Freedom of Love)를 주창했다. 성숙하지 않은 남여가 조혼을 하는 것은 우생학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자유롭게 연애하고 자유의지에 따라 결혼해야 여성도 가족도 행복하다고 보았다.사랑이 사라지면 혼인은 당연히 깨지는 것이라 하여 이혼도 옹호했다. 그의 생각은 연애 없는 조혼으로 남녀 모두 구속되는 삶을 사는 운명에 처했던 아시아 3국의 청춘남녀에게 복음과 같았다.

 

근대적의미에서의 교제 , 교제를 통한 결혼에 열광하기는 했는데, 그런만큼 고상해 보이는 만남과 사귐을 어떻게 표현할까를 머리 싸고 고민했다. 일본에서는 1870년대에, 메이지 시대에 서구의 문물을 접한 사상가들은 ‘LOVE’라는 관념에 빠져들었다.  애정 색 정 정교이라는 단어가 있었지만 서구의 러브는 달라보였다. 러브는 근세의 유곽 문화와도 다르고 봉건적인 결혼문화와도 달랐다. 육욕을 넘어선 정신적인 사랑이기도 하고 남녀가 평등에 기초한 그런 남녀관계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여러 시도가 있었다. 

 

고대로부터 연과 애가 각각 담당해 온 중층적인 뉘앙스를 잘 살리면서도 새로운 사상을 표현하기에 적합해야 했다. <만엽집>에서 ‘연’은 “이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껴 그리워하는 것‘을 의미했다. ‘애’는 부모 자식 형제 등을 서로 아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불교용어로 ”무엇을 탐내어 집착하는 것, 욕애(성욕) 유애(생존욕) 비유애(생존을 부정하는 욕망) 등 비교적 부정적인 뜻도 있었다. 이 둘을 뒤섞어 놓으면서 뭔가 고상하기도 하고 낭만적이면서 황홀하게 빠져드는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연애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야나부 아키라가 러브를 연애로 번역하면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고  조선 중국으로 퍼져나갔다. <’연애결혼‘은 무엇을 가져왔는가. 성도덕과 우생결혼의 100년간. 한림대학교 일본어연구소>

 

연애라는 단어가 탄생한 것은 단순히 한개의 어휘가 더 늘어난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인류 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초를 이루는 가족의 출발점, 즉 결혼에 이르는 과정의 커다란 변화를 의미한다. 신구세대간의 엄청난 갈등 나아가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참고로 남녀평등이라는 단어가 아시아에서는 20세기 들어와서 처음 등장했다. 1901년 6월 중국 ’국민보‘에 여성참정권을 제안하는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연애라는 단어는 파급력이 컸다. 바로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시대 사상이 그들에게 영향하는 힘은 무서운 것이다. 그들의 결혼관도 전보다는 몹시 변해왔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다 자유결혼을 당당히 주장한다” 경성의 모 여학교 교사의 얘기가 ‘신여성’(1924년5월)에 실린 얘기다. 이제 연애는 적어도 신여성에게는 필수 처럼 보였다.

 

“8.9세에 기숙사에 들어온 학생들은 기독교인 가정의 학생일 경우 1년에 한 번 귀가가 허용되지만 믿지 않는 가정의 아이들은 집에 갔다가 주저앉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외출을 시키지 않는 방침이었다. 그들이 집에 갈 때는 제복을 입은 한 기수(호위)가 학생을 데리고 갔다가 다시 데려오곤 하였다. 그러니까 이화학당 학생들은 기숙사에 한번 들어오면 10년 내지 7,8년을 마치 중세기 유럽의 수도원에서와 같은 생활을 보냈던 것이다. 고스란히 밖의 세상을 모른 채, 더구나 이성이란 그들의 사고에서 자리잡을 수 없는 불칙한 문제였다” <이화 80년사>

 

집에 가면 부모들이 시집을 보내기 때문에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조혼 폐습에서 구제하기 위해서 외출 외박을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내보내 주지 않자 시집도 못 보낸다고 생각하고 포기했다.. 연애결혼도 아니고 강제결혼도 아닌 제3의 방식으로 학교결혼, 즉 유학을 다녀 온 신식 청년들과 혼인을 했는데 혼인 전야는 축제 기분이었다고 한다. <한국여성의 의식구조. 이규태. ‘여학교의 조혼 레지스탕스’>

 

그렇다고 모두가 연애를 거쳐 결혼하는 것은 아니었다. 도시 지역의 일부 계층에서 그런 혁파가 가능했을 뿐 대부부은 아버지의 의사가 결정적이었다. 박완서 작가의 일제시대에 대한 기억은 분명하고 구체적이다. 그는 ‘미망’(1994)에서 “이들이 아무리 망측해 하고 단속을 하려 해도 청춘남녀라면 누구나 자유연애를 꿈꿀만큼 당시 새로운 풍조의 매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이걸 실제로 누릴 수 있는 층은 사각모짜리에 국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에서건 일본에서건 사각모만 썼따 하면 설사 조강지처가 있는 몸이 순진한 처녀를 유혹해도 자유연애라는 미명으로 멋있게 보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하면 바람이 났다, 난봉이 났다고 하여 비판을 받았다.“고 서술했다.

 

문제는 연애가 무엇인지 이론적로는 알겠는데 본능적으로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연애=성교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래서 연애박사 연애전문가 같이 연애꾼을 비판하는 유행어가 등장했다.  김명순은 “재미있는 연애소설을 읽으면…끝없는 공상에 취하여 앉아있는 처녀들의 가슴은 이미 어지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니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올시다”고 자유연애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신여성과 대학생, 유학생 간의 연애는 커다란 사회문제화 되었다. 조혼의 습속으로 대학생이나 일본유학생은 대개 고향에 조강지처가 있었다. 그들이 볼 때 부인은  새까맣게 탄 얼굴, 살찐 허리로 보기 조차 싫었다. 몇 년 만에 돌아와 부인을 만나면 형편없는 배움에 모든 것이 싫었다. 반면 새로 만난 신여성은 비단저고리,흑색의 모시치마,굽이 높은 양화에 대화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연애 감정은 깊어졌고, 이미 조강지처가 있는 줄 알면서도 결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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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의 공연을 보도한 신문기사. [사진=연합뉴스 자료사진]

 

1926년 발표된 ‘사의 찬미’는 그 시대 사회상의 반영이다.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1897-1926)이 불렀다. 윤심덕은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해서 천재극작가 김우진과 연애를 했다. 김우진은 조혼을 하여 혼인을 한 상태였다. 두 연인은 1926년8월 4일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연락선에 탑승했다가 바다에서 사라졌다.

 

“광막한 광야에 달니는 인생아 너의 가는곳 그 어대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차즈려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죽으면 고만잀가 행복찻는 인생들아 너찻는것 서름.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도다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우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잀가 행복찻는 인생들아 너찻는것 서름.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혓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의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업도다. 눈물로된 이 세상아 나죽으면 고만잀가 행복찻는 인생들아 너찻는것 서름”(‘사의 찬미’ 가사 전문)

 

동거혼 사실혼을 하고 있는 신여성들을 과거의 첩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 이들을 ‘제2부인’이러고 불렀다. 이렇게 되자  자유연애는 환상에 불과하며 사회적인 모멸과 고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법적으로 이혼과 재혼을 할 수 있었지만 여성이 독립적인 경제 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어서 대부분의 구여성은 진퇴양난이었다. 또 <장한몽>에서 보듯이 황금만능주의가 스며들었다. 연애를 거치는 결혼이 곧바로 새로운 가정과 가족제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은  조선시대와는 그 양태가 달랐을 뿐 현모양처를 요구하는 근대화된 남성 우위로 발전을 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조혼제도는 왜 생겨났을까. 현모양처라는 여성의 이중삼중 굴레는 어떻게 문화와 의식과 도덕으로 발전했을까? 동서양에 걸쳐 가부장제와 현모양처가 정착해 온 역사를 살펴보고 일제 시대의 중후반기 결혼 문화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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