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환종의 공군(空軍) 이야기 (90)] 국방부 전비태세검열단, 검열관⑮ 진심으로 존경했던 고교 선배 이야기
최환종 전문기자 입력 : 2023.01.25 16:45 ㅣ 수정 : 2023.01.25 16:45
희노애락을 함께 했던 손청 선배... 미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영면한 그에게 이 글을 바쳐
[뉴스투데이=최환종 전문기자] 그 선배의 한국 이름은 손청, 미국 이름은 Richard Sohn(이하 선배로 칭한다). 한국에서 서울 大新高等學校(한국에는 지역은 다르지만 이름이 같은 대신고등학교가 여러 개 있어서 ‘서울 大新高等學校’라고 명기함. 선배는 11회 졸업생이다)를 졸업했다.
군 복무는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5.16 이후에 수방사 소속으로서 국가재건위원회 통역병으로 파견 근무)했다. 영어는 고교 재학시절 성공회 신부(美國人)에게서 배웠다고 하며, 군 복무 후 그 신부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대학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계기가 있어서 미 육군 병사로 입대를 했고(그래서 선배는 한국 육군 병사 군번과 미국 육군 부사관 군번 2개가 있다), 입대 후 신병 훈련 기간 중에 미국 영주권과 시민권을 받았다고 한다. 그 당시는 월남전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였고 외국인이 미군에 입대하면 상당히 빠른 시간내에 미국 영주권과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美軍 내에서도)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있던 터라 선배는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낙천적이며 성실한 성격과 타고난 체력이 있던 선배는 훈련소 조교를 거쳐서(한국 육군에서 병사로 3년 간 근무했던 경험과 실력을 미 육군 훈련소에서 인정받았다고 한다) 월남(베트남), 일본 등지에서 해외 파병 근무를 하였고 이후 한국에도 파병되어서 근무하였다고 한다(선배는 슬하에 1녀 2남을 두었고, 장녀는 변호사로, 두 아들은 미국 육군사관학교(United States Military Academy, USMA 또는 웨스트 포인트 West Point)를 졸업하여 현재 미국의 주요 국가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선배의 매형, 아들 2, 며느리 2, 사위 등 선배의 가족 6명이 모두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수재들이었다. 선배 본인이나 선배의 자녀들의 성공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또 하나의 사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다가 선배는 다시 미국 본토로 복귀 후 Fort Lee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고 이때부터 고교 동문인 한국군 장교들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Fort Lee에는 한국군 장교들이 교육을 받으러 주기적으로 왔고, 선배의 신분은 미국 시민권자로서 미국 육군 중사였지만 국적과 계급을 떠나 본인보다 10여년 젊은 한국군 장교들에게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물론 장교에 대한 예우를 갖추면서).
때는 1987년의 여름 어느날, 그곳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어느 한국군 장교(김진우 소령(당시 계급), 大新高 21회, 육사 32기)가 선배 사무실에 찾아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장교가 선배의 책상 위에 놓인 어떤 기념패를 보니 모교인 ‘서울 大新고등학교’ 글자가 새겨져 있더란다.
그래서 그 육군 장교는 “서울 大新고등학교와 어떤 관계가 있나요?” 라고 묻자 선배는 “저는 대신고 11회입니다”라고 대답을 했고, 그 순간 한국군 장교는 선배에게 큰절을 올리며 고교 후배로서의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이내 두 사람의 관계는 국적과 계급은 사라지고 고교 선후배 사이로 바뀌면서 화기애애한 자리가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이후 그 육군 장교는 귀국했고, 얼마 후에 선배도 한국 근무를 지원해서 두 사람은 다시 한국에서 만났다고 한다.
선배는 용산 미군 기지에서 근무했고, 그 육군 장교(김진우 소령, 大新高 21회)는 국방부에서 근무했는데, 두 사람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삼각지에 근무하는 서울 大新高 출신 한국군 장교(육,해,공군,해병대)들과의 모임이 만들어졌고, 고교 후배인 한국군 장교들은 그 선배를 고교 선배이자 연장자로서 깍듯이 대우하면서 서로 돈독한 관계를 이어 나갔다고 한다.
그런 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선배는 어느덧 주한미군 주임원사가 되어서 다시 용산으로 부임하였고, 필자는 중령 진급 후인 2000년 초에 연합사로 부임하면서 선배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연합사를 떠난 이후 그 선배와 한동안 연락이 끊겼다가 필자가 대령 때 합참 방공과장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당시 그 선배는 이미 미국 육군에서 전역한 후였고 통신 분야의 미국 공무원 신분으로 주한미군 부대에서 계속 근무를 하고 있었다.
10여 년 만에 다시 만났지만 그 선배는 필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물론 마치 집안의 막내동생 대하듯이 너무도 반갑고 가깝게 대해 주었던 것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필자와는 18년 차이지만 필자는 그 선배를 친근한 형 또는 집안의 가까운 어른 같이 대하면서 허물없이 지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고 하는데, 선배는 그것을 늘 실천했던 분이다. 후배들이 술값을 내려고 하면 늘 제지하고 당신이 지불했다. 그리고 후배들과 저녁 식사를 같이 할 때는 항상 ‘조니워커 블랙(1리터 용량)’ 한 병을 들고 나왔다. 주량도 대단해서 저녁을 같이 하는 인원이 몇 명이던지 기본적으로 ‘조니워커 블랙’ 한 병을 모두 비워야 그 자리가 끝나는 조건이 되었고, 이후 상황에 따라서 소주를 더 마시던가 했다. 그러다보니 술이 약한 필자는 힘들 때가 많았다.
또한 선배는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을 알고 지냈는데, 놀라운 점은 적(敵)이 없었다는 것이다. 선배의 성격으로 봐서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모나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있었는지 부럽기만 했다. 선배는 늘 인생의 선배로서 또 모임의 연장자로서 후배들에게 좋은 말과 격려를 많이 해주었고, 필자가 진급이나 기타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들어 할 때 필자와 같이 고민하고 걱정하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특히 필자가 장군 진급 심사에서 누락될 때마다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로해주던 선배였다. 그러던 어느날 필자가 검열단으로 부임을 하였고, 필자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서울로 왔다는 얘기를 들은 선배는 마치 자신의 일 같이 무척 안타까워 했다. 일과 후에는 가끔 필자를 불러서 소주 한잔 하면서 세상 사는 이야기와 함께 희망을 잃지 말라고 하며 수시로 격려해 주었다.
필자의 장군 진급 예정자 발표가 난 그날 오후, 필자는 선배에게 ‘장군 진급’이 확정되었음을 전화로 말씀드렸고, 선배는 뛸 듯이 기뻐하며 자주 가던 삼각지의 식당에 있을테니 거기로 오라고 한다. 일과를 마친 필자는 집으로 가기에 앞서서 선배를 만나 선배에게 진심이 가득한 ‘축하주’를 받았다. 선배님의 표정은 마치 본인의 임무가 이루어진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18년 고교 선배와의 ‘우정’은 계속 이어졌고, 필자의 집안에 애경사,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선배는 늘 기쁨과 슬픔을 같이 했다. 필자의 큰 딸이 결혼할 때도 그랬고, 필자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다.
그런데, 모든 것을 후배들과 영원히 같이할 것으로 생각했던 그 선배님이, 100세가 될 때까지도 늘 청년같이 활기차게 지내시리라 믿었던 그 선배님이 2022년 1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생로병사를 어떻게 피해갈 수 있으랴. 이제 고인이 된 선배는 ‘선배님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먼저 하늘로 간 지인들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조니워커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선배의 장례식 발인 당일(경기도 일산). 주한미군 사령부에서 선배의 장례식장으로 미 육군 부사관을 보내어 예를 갖추어서 선배의 유해를 모셔갔고, 이후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지금도 삼각지를 지날 때면 선배님이 생각난다. 퇴근할 때 쯤 되면 소주 한잔 하자고 전화하시던 인자한 모습의 선배님이.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영면에 들어간 손 청 선배님을 기리며, 손청 선배님께 이 글을 바친다. (다음에 계속)
◀최환종 프로필▶ 공군 준장 전역, 前 공군 방공유도탄 여단장, 前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現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