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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두의 실록<2부>, 초현실 비상계엄 (27)

왜 밤 10시에 계엄령을 선포하려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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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두
입력 : 2025.03.19 06:28 ㅣ 수정 : 2025.03.19 08:46

12월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선포를 실록으로 엮어본다. 윤석열은 언제부터 쿠데타를 계획했을까? 윤석열은 무슨 일을 계기로 확신범이 되었을까? 12월3일은 우리나라가 처한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최고권력자 1인의 독단으로 나라가 형편없이 흔들렸는가 하면 국회와 시민들의 용기있는 대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위대한 서사시였다. 12월3일을 전후해서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이 역사적 순간에 무슨 역할을 했는지 초현실적 계엄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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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2024년 12월 3일 밤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긴급 대국민 특별 담화를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12월 3일 계엄의 밤 9시께 한덕수 국무총리, 김용현 국방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등이 대통령 집무실에 모였다. 윤석열은 "비서실장도 모르고 수석도 모른다. 와이프가 굉장히 화낼 것 같다"라고 말했다. 윤석열은 왜 이 말을 했을까? 비서실장과 수석들도 모르게 진행했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독단으로 일을 저질렀다는 실토에 가깝다. 그런데 왜 김건희도 모른다고 했을까? 김건희도 비서실장도 모르는 일을 국무총리에게 맨 먼저 얘기해줬으니 따라달라는 뜻일까? 그런다고 사람이 따를까? 전후 맥락을 알 수 없는 이 말은 윤석열의 판단 능력과 심리 상태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압권은 김건희가 굉장히 화를 낼 것 같다는 말이다. 1년을 넘게 한남동 관저와 삼청동을 오가며 술판을 벌이면서 계엄을 모의했는데 김건희는 모르게 일을 진행했다고 한다. 특검법이 언제 통과될지 몰라서 불안해 하는, 역술가에게 교도소 가게 되냐고 물어보며 전전긍긍해 하는 김건희와 매일 밤 상황을 논의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건희에게 해결책의 하나로 계엄을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말 그랬을까. 아마도 한덕수 등이 김건희에 의한 ‘주술계엄’을 의심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격지심이 있어서 자신의 고독한 역사적 결단으로 포장하고 싶었던 듯 하다.

 

윤석열은 3일 오후 부속실장을 통해 국무위원과 국가정보원장 등에게 연락을 취해 대통령실로 들어오게 하라고 했다. 충암파인 이상민은 그보다 앞서 이른 아침에 연락을 받았다. 오전 7시30분께 국무회의 조찬간담회에 참석했다. 김용현으로부터 9시까지 대통령실로 들어오라는 대통령의 말을 전달받았다. 이상민은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상민은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과 함께 김장 행사 참석을 위해 울산으로 내려갔다. 행사 뒤 만찬에 참석하지 않고 예매한 항공편 대신 KTX를 이용해 급히 먼저 서울로 왔다.

 

이상민은 KTX 안에서 김용현과 비화폰으로 통화했다. 김용현이 아침에 서울 올라오는 길에 통화하자고 했던 것을 기억했다. 오후 6시 11분께 전화를 걸어 “서울역에 8시 조금 넘어 도착한다”고 했다. 김용현이 “도착하는대로 용산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충암파인 이상민이 제일 먼저 도착해서 일을 거들어 주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은 경찰청장, 서울청장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만찬은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과 예정되어 있었다. 11년만의 공식 방문이다. 이날 오전 정상회담도 예정보다 일찍 끝내고 환영 오찬도 대충 끝냈다. 윤석열은 이때도 뭔가 쫓기는 듯 했다고 한다. 오후 일정은 김용현에게서 군대 동원 준비 상황을 보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저녁 만찬은 우원식 국회의장에게 맡겼다. 우원식 의장은 그가 분류한 체포 대상 명단에 들어있었다.

 

윤석열은 저녁 7시 삼청동 안가에서 조지호 경찰청장, 김봉식 서울경찰청장과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다. 김용현도 동석했다. 아마도 경찰을 통할하는 이상민을 부르려고 했는데 일정이 안맞았던 것 같다. 윤석열은 경찰 투톱이 들어오자마자 혼자 5분간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국회와 MBC, 여론조사 꽃 등 장악 대상 10개 기관이 적혀있는 A4용지 한 장을 나눠주었다.  

 

맨 앞에는 ‘2200 국회‘라고 되어 있었다. 10시에 국회 출동을 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봉식 서울 경찰청장은 경찰 수사에서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며 가정사를 거론했다고 한다. 김봉식 청장은 헌법재판소에서 “특검이라든지 그런 것과 관련 없이 대통령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라는 느낌을 받았다. 뉴스에 나오는 계엄 선포의 이유와 결이 다른 부분”이라고 해 김건희와의 또 다른 연관성을 연상케 하는 진술을 했다.

 

윤석열은 한시간 정도 경찰 수뇌부 만찬을 끝내고 김용현과 함께 용산으로 돌아왔다. D-Hour 10시까지 맞춰야 했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이 8시 30분경 맨 먼저 도착했고, 이상민이 8시 40분께 들어왔다. 뒤이어 9시경에 한덕수 총리, 김영호 통일부 장관, 조태열 외교부 장관, 조태용 국정원장의 순으로 도착해 총 7명이 집무실에 모였다. 오후 9시 이전에 오라고 한 7명은 윤석열이 부속실장을 통해 부른 사람들이다. 7명만 부른 것으로 봐서는 처음부터 국무회의를 건너뛸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각에 수석비서관 회의도 소집했다. 두 개의 회의를 정면으로 돌파할 자신이 없어서 아주 짧은 시간에 통보 형식을 취할려고 했던 것으로 읽힌다.

 

대통령 집무실에 8명이 둘러앉았다. 왼쪽부터 국정원장 법무 국방 행정안전 총리 대통령 통일 외교의 순이었다. 이들이 모두 착석하자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겠다고 했다. 깜짝 놀란 한덕수가 먼저 이의를 제기했다

 

윤석열은 조태열 외무부 장관에게는 ’재외공관‘이라는 단어가 적힌 A4용지를 건넸다. 서너줄 정도 되는 분량이었는데 외교부가 취해야 할 조치를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태열은 “외교적 파장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 지난 70년간 쌓아 올린 모든 성취를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심각한 문제이니 재고해달라”며 반대했다. 윤석열은 “법치주의를 신봉하는 내가 오죽하면 이런 생각을 했겠냐”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덕수가 국무회의를 열어서 의견을 들어보자고 했다. 한덕수는 "계엄 당일 대통령실에 도착한 뒤에야 비상계엄 선포 계획을 들었다. 적극 반대했지만 막기 어려웠고 국무회의를 명분으로 최대한 시간을 벌어 계엄을 막기 위해 국무위원들에게 연락했다"고 했다.

 

윤석열은 뜻대로 되지 않자 밤 9시 20분쯤 모두 나가달라고 했다. 김용현만 남고 모두 집무실 옆 대접견실로 갔다. 한덕수가 소집한 국무위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최상목 기재부 장관은 오후 9시 55분, 송미령 농식품부 장관은 오후 10시 10분(에서 15분 사이), 조규홍 복지부 장관 오후 10시 17분, 오영주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오후 10시 20분쯤에야 대접견실에 도착했다. 국무회의 정족수가 되었다.

 

무슨 일인지 몰랐던 최상목은 캐주얼한 차림으로  대접견실에 도착했다. 곧 계엄이 선포된다는 얘기를 듣고 최상목은 너무 놀라 가지고 한덕수에게 왜 반대 안 하냐고 물었다고 한다. 한덕수는 집무실과 대접견실을 오가며 반대를 했었다고 전하면서 최상목도 거들어달라고 했다.

 

집무실에서 가까운 쪽부터 대접견실 한쪽에는 통일 복지 총리 외교 기재 국정원장 중소기업, 맞은편에는 행안 농림 법무 등이 앉았다. 오후 10시 발표시간이 다가오자 윤석열이 국무위원이 모인 대접견실로 와서 '국무위원 다 모였냐'고 했는데 의사정족수가 안된 걸 알고 되돌아갔다. 오영주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도착하여 11명이 채워지자 윤석열이 다시 들어와 중앙에 앉았다. 윤석열은 밤 10시 계엄 선포 방송 시간에 집착하고 있었다. 이때는 양복 윗도리를 입고 들어왔다. 곧바로 방송을 하러 갈 준비를 하고 왔지만 다른 국무위원들은 왜 시간에 쫓겨하는지 몰라했다.

 

10시 17분부터 22분까지 약 5분 간은 국무회의라고 할 수 없었다. 개의 선언도, 안건 상정 절차도 없었다. 계엄령 선포는 물론 계엄사령관 임명에 대한 안건 상정도 되지 않았다. 계엄법 제2조 5항은 '국방부 장관 또는 행정안전부 장관은 계엄 사유가 발생한 경우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에게 계엄의 선포를 건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그런 절차가 없었다. 계엄법 제5조는 ‘계엄사령관은 현역 장성급 장교 중에서 국방부 장관이 추천한 사람을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임명한다’고 되어있는 조항도 위반했다. 모든 국무회의에는 행정안전부 의정관이 배석하여 기록을 남기게 되어있다. 의정관은 국무회의가 열리는지 조차 몰랐다.

 

윤석열은 일방적인 주장을 늘어놓았다. 서둘렀다. 예정된 10시가 지나가자 초조했다. 윤석열은 “지금 계획을 바꾸면 모든 게 다 틀어진다. 계엄을 선포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결단이다”라고 말했다. 국무위원 가운데 한덕수 최상목 조태열 조규홍 송미령 오영주 김영호 등 7명이 반대나 우려를 표명했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임명 때 뉴라이트 전력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날은 윤석열의 편에 서지 않았다. 우려를 표했고 경제 외교 안보 분야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고 국회에서 밝혔다. 그리고는 북한 동향 등을 점검하고 있어야 할 장관이 집에 가서 TV로 계엄을 시청했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은 국회 등에 나와 비상계엄에 다들 우려했다면서도 본인은 찬성했는지 반대했는지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거나 오락가락했다. 침묵을 반대인 양 포장하고 있다는 비판을 샀다.

 

충암파 이상민은 헌법재판소에서 국무위원들이 우려를 말했음에도 대통령이 심사숙고한 끝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면서 이를 막는 것은 넌세스라고 했다. 국무회의라고 보기에는 절차적 흠결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열띤 토론이 있었다”며 “비상계엄이 45년 만에 선포되었을 때 국민이 받아들일수 있겠는가, 외교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크겠는가, 과연 정무적 부담이나 야당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겠는가에 대해  (국무위원들이) 상당한 걱정과 우려를 했다”고 전했다. 그는 “그 당시 분위기를 말하자면 찬성과 반대를 밝히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찬성이니 반대니 이런 워딩 자체를 한 사람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반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반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이상민의 말 장난에 불과했다.

 

계엄 관련 선포문 담화문 등 3개 문건을 작성한 김용현은 당연히 찬성 입장이었다. 김용현은 헌법재판소에서 "국무위원 일부가 계엄 선포에 동의했다. (누군인지는) 말씀드리기는 곤란하다"고 했다. 김용현 하나 뿐이었다. 그래서 답을 하기가 곤란했는지 모른다. 김용현은 회의가 5분만에 끝난 것에 대해 "20시 30분경부터 국무위원들이 순차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해서 들어올 때마다 같이 모여서 내용들을 다 이렇게 서로 공유를 하고 나서 실제로 가서는 짧게 이루어진것이다"고 설명했다. 명백한 사실 왜곡이다. 마사지다. 마지못해 엉터리 국무회의를 열었는데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윤석열은 반대를 뚫고 나갔다. “이 상태로 놔두면 나라가 거덜 나고 경제든 외교든 아무것도 안 된다. 국무위원의 상황 인식과 대통령의 상황 인식은 다르다. 돌이킬 수 없다”고 일축했다. 의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따라서 계엄법에 따른 부서(서명)도 없었다. 헌법 82조는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문서로써 하며, 이 문서에는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윤석열은 헌법재판소에서 국무위원들이 대통령실에 간담회 하러 오거나 놀러 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정식 회의였다고 강변했다. 윤석열은 국회에 통보하지도 않았다.

 

윤석열은 이어 “국무회의 심의를 했고 발표를 해야 하니 나는 간다”라며 방을 떠났다. 조태열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반대했다. 조태열은 자리를 박차고 나간 국무위원이 한 명도 없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가장 쉬운 선택이지만 가장 비굴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서 끝까지 만류하기 위해 그 자리에 남았다”고 국회에서 답을 했다.

 

수석비서관 회의 소집 통보를 받고 뒤늦게 정진석 비서실장, 신원식 안보실장, 홍철호 정무수석이 대접견실에 들어와 앉았다. 정진석은 "대통령님 그것은 절대 안 됩니다"고 만류했다고 한다. 신원식은 “무슨 비상계엄입니까”라는 취지로 반대했다고 한다. 신원식은 윤석열과 마주 하는 헌법재판소에 와서는 자신의 발언을 기술적으로 중화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반대를 했다기 보다는 급박한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나온 생각이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다는 취지로 말을 했다고 밝혔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이날 상황을 국회에서 증언했다. 송미령은 대접견실에 모여 있던 국무위원 모두 윤석열이 비상계엄 선포를 하러 나갔다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지금 회의를 마칩니다”라는 폐회 선언이 없는 상태에서 잠시 나가버렸고, 모두 당황해하던 차에 누군가 휴대전화로 방송을 틀었는데 그때 윤석열의 육성이 흘러나와서 담화를 들었다.

 

윤석열은 10시 25분 경 브리핑룸에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방송이 원래 10시에 예정되어 있었다며 1층 브리핑으로 총총걸음을 했다. 이날 방송기자들 사이에서는 대통령이 긴급 담화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대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간에 계엄령을 발동할 것이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해 있다. 북한 공산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 계엄을 선포한다.”

 

윤석열은 계엄을 선포하고 회의실로 돌아와서는 최상목에게 참고하라며 접혀있는 종이를 주었다. 최상목이 자리가 파할 무렵에 종이를 펴보니 비상계엄 상황에서 유동성 확보를 잘하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윤석열은 국무위원들에게귀가하라고 했다. 거치장스러웠다. 지금부터 군과 경찰을 지휘해야 하는데 1분 1초가 아까왔다.

 

최상목은 곧바로 나가서 F4(Finance 4) 회의를 소집했다. 거시경제 금융현안 간담회였다. 방송을 통해 계엄령 선포를 들은 이창용 한은 총재, 김병환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감원장이 모였다. 최상목은 계엄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며, 임기제인 한은 총재를 제외하고 모두 그만두자고 했다. 최상목은 박근혜 탄핵시에 미르재단 설립에 관여한 혐의로 곤욕을 치른 바 있어, 상황에 민감했다. 이창용 총재는 “경제부총리가 경제 사령탑인데, 부총리가 있어야 대외적으로 심리가 안정되고 경제 상황 수습이 가능하다”며 만류했다.

 

윤석열은 밤 11시 언론 공지를 통해 계엄사령부 포고령(제1호)를 발표했다. 김용현이 작성해 온 것이다. 포고령의 불법성에 대해서는 이후 국회의 대응 편에서 다룰 예정이다.

 

“자유대한민국 내부에 암약하고 있는 반국가세력의 대한민국 체제전복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2024년 12월 3일 23:00부로 대한민국 전역에 다음 사항을 포고합니다.

 


 

1.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2.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을 금한다.

3.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4.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행위를 금한다.

5.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6. 반국가세력 등 체제전복세력을 제외한 선량한 일반 국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이상의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 9조(계엄사령관 특별조치권)에 의하여 영장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 14조(벌칙)에 의하여 처단한다.

 

2024.12.3.(화)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박안수”

 


 

행정안전부는 기록을 위해 대통령실에 국무회의록을 요청했다. 회의에 10초 정도 참석했던 강의구 대통령 부속실장이 맡았다. 강의구는 안건명에 ‘비상계엄 선포안’, 제안이유에 ‘헌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2024년 12월 3일 밤 10시부로 비상계엄을 선포하려는 것’이라고 적었다. 선포문 제목을 보고 그대로 적어 제출했다고 한다. 실제 국무회의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임의로 작성한 것이다.

 

불법 국무회의의 증거는 의안번호에서도 드러난다. 12월 4일 심야시간에 국회에서 계엄령 해제를 의결하자 국무회의가 다시 소집되었다. 법에 따라 해제를 의결하기 위해서였다. 오전 4시쯤 대통령실은 행정안전부에 의안번호 배정을 요청했다. 행정안전부는 앞서 계엄을 선포하기 위한 국무회의가 선행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의안번호 ‘제2122호’를 비우고 해제안에 ‘제2123호’를 부여했다. 회의록이 부존재해서 결국 행정안전부는 2025년 1월 10일 ‘제2122호’에 ‘군보건의료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배정했다. 법률상 없는 국무회의를 있었다고 기록할 수는 없었다. 행정안전부는 헌법재판소에 계엄 관련 국무회의 기록이 없다고 답변했다.

 

민주당 부승찬 의원은 국회에서 국무회의 관련 의안번호나 회의록이 존재하지 않는 점 등을 지적하며 ‘정상적인 국무회의가 아니지 않냐’고 물었고, 한덕수는 “제가 오랫동안 국무회의를 했었던 사람으로서 도저히 정식 국무회의라고 보기 어렵다”고 답했다. 한덕수는 일관되게 국회와 헌법재판소에서 회의에 문제가 있다고 증언했다.

 

“그 자체가 많은 절차적, 실체적 흠결을 가지고 있었다. 국무위원들이 모인 것은 분명히 맞지만, 그것을 국무위원들의 회의라고 해야 될지 정식 국무회의라고 해야 될지 명확하지 않다. 모인 것은 분명히 맞지만 그것이 보통 때와 같은 그런 국무회의식으로 운영이 되지 않았다.”

 

“풀보다 먼저 눕는 사람” 한겨레신문 박찬수 대기자는 기명칼럼에서 전직 정부 고위 관리가 한덕수를 이렇게 평가했다고 했다.(‘풀보다 먼저 눕던 한덕수 미스터리’)  김수영 시인의 시, ‘풀’을 인용하여 그를 비판한 것이다. “버들가지처럼 휘어져도 부러지지 않았기에 4개 정권에 걸쳐 권력을 누렸”던 한덕수는 이상할 만치 계엄령 선포에는 반대했다.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에도 국회 몫의 헌법재판관 임명을 거부해서 ‘풀보다 먼저 눕는 사람’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무색케 했다.

 

계엄 선포의 적법성을 따지는데 있어서 국무회의 의결이 첫 번째 쟁점이다. 그래서 국무회의를 재구성해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남는 의문 하나, 왜 밤 10시에 하려고 했을까? 계몽령이라고 주장하는 측의 논리는 이렇다. 실제 계엄을 하려고 했으면 국회의원들이 외유를 가서 모이기 힘든 12월 말이나 1월 초, 그것도 주말에 소집했을 것이다. 또 시간도 새벽 4시경에 발동을 해서 국회를 장악했을 것이다고 계몽령의 논리를 전개한다. 왜 12월 3일에 소집할 수 밖에 없었는가는 [제25화]에서 자세히 다뤘다. 명태균 데이트와 관련이 있었다.

 

새벽에 쿠데타를 한 것은 박정희였다. 기습작전이었다. 그때는 청와대를 장악하면 됐다. 전두환은 5.18 전국 비상계엄 확대 때는 새벽 0시에 했다. 역시 기습이었다. 윤석열이 밤 10시에 계엄령을 선포하려 하고 11시에 포고령을 발동한 것은 보안상의 이유였을 것으로 보인다. 야심한 시간에 국무위원과 비서관들을 소집하여 통보를 하고 새벽 4시에 계엄령을 발동하면 보안이 지켜질 수가 없다. 대낮에는 국회를 장악하기가 힘들다. 교통 통제도 어렵고 시민들의 저항이 불보듯 뻔하다. 국회도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다. 그래서 밤 10시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쯤이면 국회 봉쇄도 쉽고, 계엄령 해제를 위해 국회의사당으로 모일 의원들을 ‘토끼몰이’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듯 하다.

 

키르키르스탄 대통령 일행은 그날 밤 한국에서 계엄령 사태를 직관했다. 자파로프 대통령 측은 키르키스스탄 기준 3일 저녁 현지 매체 24.kg에 한국 방문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으며 대표단을 위협하는 것은 없다고 밝혔다. 대통령 대변인은 “대통령과 대표단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자국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날 윤석열의 계엄 선포는 세계 각국에 타전되었다. 영국 가디언은 “(한국엔) 초창기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이 있었다.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서며 민주적 국가로 간주됐지만, 국가 전체에 충격파를 던졌다”고 보도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개하면서 “터무니없는 조치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1980년대 후반 민주주의로 이행하기 전 한국의 군부 통치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고 전했다. 텔레그라프는 “특히 충격적인 것은 경제 및 군사 안보의 중추적 글로벌 파트너이자, 규칙에 기반한 자유주의 질서의 지지자로서 한국의 위상이 널리 알려진 시점에 계엄령이 선포됐다는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그룹의 경제분석기관인 ‘인텔리전스 유닛’은 2025년 2월 ‘2024년 민주주의 지수’를 발표했다. 한국은 전체 167개 국가 가운데 32위를 차지해 전년보다 10계단 추락했다. 2020년 처음으로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어 4년 연속 유지되었는제 ‘결함있는 민주주의 국가’로 한 등급 내려얹았다.

 

스웨덴 예보리대학 민주주의 다양성 기관(V-DEM) 연구소는 2025년 3월 보고서에서 “한국 독재화 진행 중이라며 이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고 했다. 윤석열이 그렇게 외치던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그의 계엄령 하나로 아닌게 됐다. 민주주의 지수는 덴마크 1위, 미국 24위, 일본 27위, 한국 41위였다.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라는 자부심은 사라졌다.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선진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국가라는 자부심도 사라졌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2021년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고 연대했다. 2024년 12월 13일 ‘한국 민주주의 회복을 지지하는 재한 미얀마 시민들’이 한국의 시민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한국이 위로받는 처지가 되었다.

 

일본경제신문의 영어판 신문 Asia Nikkei가 윤석열이 '브랜드 코리아'를 망쳤다는 내용의 칼럼을 3월에 내보냈다. 필자는 에이단 포스터-카터로, 영국 리즈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현대 한국 분야 선임 연구원이다.

 

“그는 ‘브랜드 코리아’를 철저히 망가뜨렸다. 서울에서는 이는 깊은 상처다. 국가 이미지에 대해 그렇게 민감하거나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G7 정상회의에 게스트로 참석한 한국은 잠재적인 회원이라고 생각됐다. G7 가입국들은 그렇게 얘기했다...윤석열은 수류탄을 던지고 스스로를 폭파했다. 서울은 이제 트럼프와 김정은을 마주하고 있다...윤씨는 해외에서 브랜드를 깎아내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국내에서도 우물을 오염시키는 데 여전히 바쁘다...자랑스러운 한국의 자랑은 돌이킬 수 없이 윤석열로 인해 일시에 사라졌다...윤석열은 정치를 파괴하고 한국을 손상시키며, 때로는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트렸다...지난 3개월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한 사람의 잘못이지만, 윤의 성급함으로 수백만 명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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