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연애, 결혼이야기④ 서양의 결혼혁명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동양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제와 그 결과물로 일부일처제는 유럽인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사유재산제의 발생은 여자에게만 일부일처제를 요구했으며 적자상속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결혼생활에서 남자는 지배계급의 위치가 되었다. 인류역사에서 오랜 기간에 존재하지 않았던 간음 매춘 같은 습속이 생겨난 것도 이 때부터다. 혼전 여성의 순결, 결혼생활의 정절에 관한 여성의 일방적 의무도 마찬가지이다.<풍속의 역사.에두아르트 푹스. 까치> 그리스 로마 신화에 여신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점차 여사제는 사라졌다.
그리스는 민주주의를 발명하고 철학을 통해서 지혜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플라톤은 질문을 통해서 남자와 여자가 원래 동등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나 이는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남자들은 마음대로 돌아다녔지만 여자는 주거지에 제한이 있었으며 여성의 외출을 감시하는 관청도 있었다. 여자는 외출할 때는 베일을 쓰고 다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을 ‘실패한 남자’로 규정했다. 여자는 남자의 장신구였으며 미혼일 때는 아버지, 결혼해서는 남편의 소유였다.
공화정을 개발한 로마에서도 여성은 예외였다. 가장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었으며, 여성은 남자와 남편의 보호 감독을 받아야 했다. 로마 결혼법은 여성은 12세, 남성은 14세부터 혼인할 수 있었으나 여성은 10대, 남성은 30대에 결혼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여성은 어릴수록 매력적이라는 이유를 댔으나 실제로는 영아와 산모의 높은 사망률에 기인한다. 시민계급과 상류층을 지배계급으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여자가 조혼하는 것이 확률상 안전했다.
대부분의 결혼이 혈통이나 재산관계 같은 양가의 이해관계에 따른 정략결혼이었다.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자녀를 생산하고 사회에 활력을 주고 위대한 로마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키케로는 “가족은 국가체제의 양성소”라고 했다. 후손의 적법성은 로마인의 최대 관심사였다. 로마 시민권자만이 법적으로 결혼할 자격을 가졌다.
“원시사회에서 결혼은 일차적으로 자기 집단의 경계를 넘어서서 협력적인 관계를 넓히고 사람과 자원을 순환시키는 수단이었다. 사람들이 새로운 집단과 혼사를 맺으면 이방인이 친척이 되고 적과 동맹으로 변했다”<진화하는 결혼. 스테파니 쿤즈. 작가정신> 이런 단계를 거쳐 보다 고도화된 결혼으로 발전한 것이 그리스 로마의 정략결혼이고 이는 중세와 근대 현대를 거쳐 자원의 소유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다. 한정된 자산을 나누지 않기 위해 왕족들이 근친혼을 했지만 우생학적으로 잘못된 결과가 나와 모든 재산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금지했다. 결혼은 개개인으로 볼 때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이상적인 결합이기도 하지만 그 내면에는 재테크가 깔려있는 것이다.
로마에서 결혼은 아버지의 소유인 여성을 남편의 소유로 넘기는 것이었다. 가부권(家父權 Patria Potestas)에서 부권(夫權 Manus)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했다. 필요악인 여성은 상속법상 남편의 딸로 여겨졌다. 귀족의 결혼식은 콘파레티오(confarreatio)라고 해서 신부의 아버지가 신부의 손을 잡고 직접 신랑에게 건네준다. 신혼부부가 신혼집에 도착하고 나면 신랑은 신부를 들어올려서 문지방 너머로 옮겼다. 신부가 친정 아버지의 소유물에서 신랑의 소유물이 된다는 상징적인 퍼모펀스이다.
고대 로마인의 아내는 의무적으로 날마다 남편의 입에 키스해야 했다. 남편 뿐 아니라 처음 만나는 6촌 이내의 친척에게도 입에 키스해야 했다. 포도주를 마셨는지 음주검사를 하는 것이었다. 여자가 포도주를 마시면 통제력을 잃고 간통을 할 수 있다고 보았고 만약 남편을 배신했다면 죽여도 좋았다.<고대 로마인의 성과 사랑. 알베르토 안젤라.까치>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동성애가 유행했다. 동성혼은 혐오대상이었지만 동성애는 이상적인 사랑이라고까지 보았다. 그리스에서는 젊은 남성들이 여성에게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동성애를 장려했다. 청년의 이상이나 그 성취는 단지 남성 동료들과만 나누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스인들은 여성이 남성 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고, 완벽한 남자끼리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은 “여자와의 사랑은 번식이라는 본능에서 나오는 불순한 사랑이다. 번식이 불가능한 미소년과의 사랑이야말로 본능이 가미되지 않은 순수하고 진정한 사랑이다”고 했다.
로마제국에서는 노골적으로 쾌락 차원에서 동성애가 이뤄졌다. 선물이나 돈을 제공하는 성인 남자와 젊은 몸을 제공하며 애인이나 첩이 되는 낮은 계층 혹은 노예 사이에서 동성애가 발견된다. ‘소년사랑’으로서의 동성애이고 성인 남자는 남성의 역할을 했다. 기원 후 4세기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동성애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화하면서 동성애를 금지하고 화형에 처할 것을 명했다. 1951년부터 동성애가 범죄로 처벌되지 않기 시작했다.
고대 교회는 성적인 모든 것을 거부하는 금욕과 고행을 강조했다. 처녀와 과부 여성들이 수도원의 생활을 동경했다. 독신생활을 찬양했다. 8,9세기 카롤링거왕조에 들어와서 일반인이 수도사의 생활방식을 똑같이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인정됐다.
중세신학자 이시도르는 사람은 왜 혼인해야 하는가를 세가지로 정리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대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자손들이 땅에 충만하게 하는 것이 그 첫번째 이유이다. 당사자간의 사랑이 목적이 아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모습이 보기 안 좋아서가 두번째 이유이다. 창세기에 따르면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보기 안 좋아서 이브를 만들었는데 그 결과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 부도덕한 성행위를 금하기 위한 것이 결혼의 마지막 이유이다.
중세시대는 위계질서의 사회이다. 창조 과정에서 여성은 2차적이고 부차적이었다. 교회에서는 여성을 악마에게 이끄는 이브와 동일시했고 열등한 존재로 치부했다. 여성은 인간의 타락 과정에서 육체의 죄인 유혹을 대표하고 이 세상에 악을 가져온 도구라고 생각했다. 로마제국을 대신하여 세속에 대한 최고권능을 갖게 된 교회는 여성을 구원의 장애물로 여기고 결혼생활을 신성시하기 보다는 타락한 형태의 하나로 간주했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통제를 당연시했으며 여성의 복종을 결혼 생활의 이상으로, 여성 다움으로 믿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생전에 모든 불평등을 부정했다. 천국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것이라고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다. 여자 제자들을 거둬들였으며, 너희 중에 죄없는 사람이 있으면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해서 창녀를 구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남자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어머니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 등 여성들만이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중세시대는 예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여성의 예배 집전권리를 부정했다.토마스 아퀴나스는 “양성간의 평등은 원죄 이전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의 종속은 당연한 것이다. 남성은 여성 보더 더 많은 논리와 분별력을 가지고 태어났다”라고 까지 말했다.
12-13세기 들어서서는 북유럽에서 마리아에 대한 신앙이 강조되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 인간과 신을 중재하는 성모 관념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위로가 되었다. 주기도문 사도신경과 함께 로사리오 기도가 3대 기도문으로 격상했다. 민중들은 엄격한 성부와 성자 보다 마리아에서 위안을 찾았다. 성모 마리아의 영원한 본능을 사랑과 용서라고 믿었다. 중세문화의 전성기 12세기는 덜 전투적인 시대였다. 마리아 신앙이 시작된 시기에 궁정연애, 기사도적 사랑, 여성에 대한 낭만적 찬미와 같은 궁중문학이 싹을 텄다. 귀부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전능한 여신에 대한 헌신이라고 믿었다. 11세기말 궁정 음유시에 처음 나타난 이 개념은 단테를 포함해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세시대에 와서 혼인은 신랑 신부가 상대를 위해 올리는 성사로 발전했다. 1276년 하느님이 결혼제도를 도입했다고 보고 7성사 중의 하나로 혼배성사를 결정했다. 결혼은 하느님이 맺어준 것이며 인간이 이를 파기(이혼)할 수 없다고 보았다.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혼례의 예식절차를 정한다. 3주전에 결혼을 공고하며 부당한지 여부를 묻고 두명의 증인이 입회하도록 했다. 성직자는 단순히 두사람을 중재하는 역할에서 공증하는 역할로 발전했다.
로마의 법은 내연관계를 중립적인 성향을 띤 혼인의 대안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13세기에 들어서 교회가 단죄를 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왕족과 귀족의 결혼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계급의 결혼에 관여했다. 결혼을 통제하려 한 교회는 결국 자기 뜻을 관철시켰다. 십계명에 ‘살인을 하지마라’와 ‘간음하지마라’는 왕족들이 지키기 가장 어려운 계명이었다. 살인을 하지 않고 어떻게 국가를 유지하고 영토를 넓힐 수 있는지 고민이었다. 그전에도 여성이 간음하면 처벌을 받았지만 남자의 간음도 불법화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에는 세속권력도 내연관계를 범죄로 간주했다. 1530년 독일제국은 하느님이 맺어준 혼인관계를 벗어나 함께 생활하는 경우를 범죄로 인정했다. 1970년대까지 혼인관계없는 동거와 반복적인 성관계는 불법으로 금지되었다.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의 르네상스는 인간이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사고가 시작한 시대이다. 인간의 의식에 눈을 뜨면서 관능적인 활동이 팽창했다. 육체가 멋진 남자가 완전한 인간이었고 나이가 들어도 남자에게 육체적인 연애를 요구하는 여자들이 완전한 여자였다. 여성다움이 새롭게 강조되었다. 옷 외모 행동 모든 면에서 여성이 남성과 다르다는 것이 점점 중요해졌고, 의복혁명을 통해 여성의 복장은 더욱 조신해졌다. 각종 예절서나 의학 서적등은 남성의 활력이나 씩씩함과는 대조되는 연약함과 부드러움의 덕목을 여성에게 강조했다. 여성의 미도 찬미되었는데, 아름다움은 더 이상 위험한 자질이 아니라 도덕성과 사회적 지위에 맞게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 되었다.
절대주의 시대에서 귀족계급이나 소수의 도시 부르조아들은 일부일처제의 지고한 이상을 지향하고 있었다. 연애를 통해서 결혼했고 인간적 완성을 맛보았다. 무위도식이 가장 인간적인 삶이라는 철학이 지배했다. 향락을 방해하는 모든 복잡함을 이 세상의 일이 아닌 것처럼 무시했다. 연애는 피부의 접촉이며 육체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했다. 높은 헌신을 필요로 하는 아이는 연애의 손발을 묶는 것으로 자식이 많으면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영국에서 등장한 구혼광고는 전 유럽에 퍼져나갔다. 중매결혼 대신 개인이 직접 배우자를 선택하기도 하고 결혼이 사회적 이상으로 자리잡았으며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이 장려되었다. 1695년 7월19일 ‘데일리 애드버타이저’에 광고가 실렸다. 나이 재산등이 기본이고 상대가 어떤 사람이기를 희망하는 내용등이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 지역 신문에서 흔히 보는 연애광고의 시작이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면서 교회의 혼인법은 지탄을 받았다. 교회의 혼인은 때로 법적으로 유효한지가 논란이 됐다. 법적 분쟁으로 가면서 그 효력이 문제가 되었다. 교회법에서 규정한 성사 및 제도의 기능을 개개인의 자유의사로 넘기고, 최종적으로는 국가가 법적으로 규율하는 관계가 되었다. 해당 법규에 의해 결혼했고 혼인의 유효성은 결혼신고를 통해서 성립되었다.
남편의 소유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각이 표면화한 건 18세기 후반부터이다 노르웨이 작가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는 아내 어머니이기 이전에 인간임을 선언한다. ‘신여성’이란 주제가 근대 역사에 등장한 순간이다. 신여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까지는 1세기 가까이 걸렸다. 영국에서는 퀸즈칼리지(1848년), 베드포드칼리지(1849년) 등 여자대학이 세워졌다. 여자들에게 대학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여자를 혼전 순결의 형태로 묶어두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독일에서도 1902-1908년에 여성에게 대학 문호를 개방했다.
19세기 자유주의 사조에서는 스스로의 이익을 실협하기 위해 자유롭게 경쟁하는 개개인들은 사회의진보에 이바지하므로 국가의 간섭은 최소화되어야 하고 세습신문에 기초한 불이익이나 제약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왜 이런 신조가 여성에게는 적용이 안되는 것일까 하는 강한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경제적 생산이 가정에서 공장으로 옮겨가면서 남편과 아내는 ‘노동의 짝’에서 ‘영혼의 짝’으로 바뀌었다. (스테파니 쿤즈) 농경사회에서도 생산력이 높지 않아서 부부가 함께 일터에 나갔다. 대표적인 농민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 등 많은 그림을 보면 농삿일을 부부가 함께 하는 것을 볼 수 있다.빈센트 반 고흐의 농부들의 휴식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도시로 나온 남녀들은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노동의 짝에서 영혼의 짝으로 진화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다. 군혼에서 대우혼으로 결혼제도가 바꿔진 이래로 결혼은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집안의 결합이었고, 서민들 사이에서는 지역 사회 나아가 왕족에게는 온 나라의 일이었다.그래서 농민들의 결혼도 가족과 지역사회가 개입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이뤄지면서 결혼이 어느 정도 개인의 결합으로 변화한 것은 결혼의 역사에서 큰 사건이다.
여성의 사회진출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란이 있었다. 여성 노동을 남성의 일자리 경쟁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여성의 임무는 가정을 지배하는 것이며,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여성 노동에 대한 제한이 필요하다“ ”가정 내에서 유용성이 없거나 주부로서의 역할을 다 한 후의 여성 노동을 산업 현장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 여성해방을 저지하기 위한 독일협회에는 ”모성 자체가 직업이 되어야 하고, 어린이 양육이 여성의 사회적 의무이며, 소녀들을 어머니라는 직업으로 교육시키는 것이야 말로 문화적 사명“라고 강조했다. 교회도 ”여성은 특정한 직업에는 적합하지 않다. 여성은 기질상 가사 일이 잘 맞으므로, 여성은 겸손함을 지키면서 아이를 잘 양육하고, 가족의 복리에 힘쓰는 것이 좋다“고 거들었다. <처음 읽는 여성의 역사. 정현백 김정안. 동녘>
페미니즘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예속. 1869>에서 반박했다. 인간은 타고난 신분에 구속될 필요가 없이 가장 훌륭한 몫을 쟁취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재능을 발휘하고 가장 유리한 기회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이 규칙의 유일한 예외자가 여성이라는 데에 개탄하고 동등한 시민권의 획득, 직업 기회의 개방, 직업을 위한 자질 훈련과 교육, 남편이 갖는 과도한 권위의 제거를 여성해방의 기본조건이라고 설파했다. 이 시기의 여성은 아직 직접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전면에 내세우지 못했다. 직접적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나서기 보다는 보다 일반적인 요구를 내세웠다. 노예폐지운동 금주운동 매춘폐지운동이 그 예이다.
파시즘 하에서 결혼관은 엘제 포르베르크의 ‘주부의 사명에 대한 자긍심과 가치에 관한 근본적인 고찰’(1933)에 잘 나타나 있다. “결혼과 가족이란 민족공동체의 토대이자 시발점으로 사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공공의 안녕을 수호하고 장려하기 위해 유전병이 없는 후손을 낳아 유능한 국민으로 양육한다는 사명“을 갖고있다고 해 국가주의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핑크컬러 즉 여성의 국가동원체제라고 불린다.
사회주의적 결혼관을 집필한 독일의 아우구스트 베벨 은 ”자본주의 현금거래가 부르주아의 결혼을 애정없는 정략결혼으로, 프롤레타리아의 결혼을 궁핍과 기아로. 하층여성의 열악한 장시간 노동과 매춘의 증가를 가져올 것이다“고 비판했다. 자본주의는 매춘의 대대화를 촉진했다. 러시아의 콜론타이는 <붉은 사랑>에서 ”남녀의 사랑은 동지애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테제를 제시했다. 여성이 전일노동을 할 수 있도록 모성을 재조직한 것이 사회주의 여성관이다.
1차, 2차 세계대전에서 전장터로 나간 남성노동자의 공백을 메꾼 것은 여성이었다. 일하는 여성이 대거 늘었다. 이들은 소득세도 냈다. 세금이 있는 곳에 권리가 있었고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기 시작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사상 유례없는 경제부흥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연애와 결혼에 대한 세상의 풍습이 10년 단위로 바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프레드 킨제이가 사람들의 성 활동에 대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1948년 <인간 남성의 성적 행위>는 미국 교도소에 수감중인 남성 18,000명을 대상으로 했다. 그 뒤로 10만명 가량의 일반인으로 모집단을 바꾸었다. 1953년 <인간 여성의 성적 행위>를 출간했다. 조사 대상이 된 여성들 중 절반 가량이 혼전 성경험이나 결혼 후 다른 남성과의 성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성욕은 양성 모두 유사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성은 남성 보다 성욕이 덜 하다는 수천년의 통념을 깨트린 보고서로 성해방의 출발점이 되었다. 한편 1953년 <플레이보이>가 창간되었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남성들의 재량권에 맡기고, 아름다움을 맘껏 즐기도록 지원했다.
미국과 서유럽에서 ‘결혼의 황금기’는 2차대전 이후 1960년대 초반 까지이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1947년- 1960년대 초반, 서유럽은 1952년-1960년대 후반이다. 경제발전의 기적 위에서 20대 초중반 자유연애에 의한 결혼이 만개할 때이다. 95%의 청춘남녀가 결혼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남성을 부양자, 여성은 전업주부라는 역할 분담 위에 시민계급의 생활형 결혼이 대중 매체에 의해 가장 이상적인 이미지로 그려졌다. 1957년에 미국에서 실행한 조사에 따르면 5명 중 4명은 독신을 선호하는 이들이 어디가 아프다고 보았다. 1978년 이 관점을 고수하는 이들은 25%에 불과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광고는 남성은 가정을, 여사는 가족을 책임지는 역할분업을 이상적인 것으로 묘사했다. 세탁기와 청소기의 등장은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다. 남편에게 아내의 세탁일을 돕기 보다는 세탁기를 사 줄 것을 광고했다. 테크놀로지가 가정 내 노동 분업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의 역할 분담을 확대 재생산했다. 대량소비시대에 여성은 소비의 객체가 되었다. 남성의 성욕에 반응하는 하나의 제품이 되기 위해 자신의 외모를 가꿔야 했다. 미용학원과 미용산업은 점점 더 번창했다.
68혁명과 함께 많은 것이 변화했다. 무조건 해야 하는 결혼이라는 관념이 변화했다. 1960년대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피임약은 진정한 브레이커였다. 피임도구의 개발로 성과 결혼이 분리가 되었다. 그 이전에는 독일에서는 여성의 3분의1이 배가 부른 상태에서 혼인을 했다고 한다. 임신을 하면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을 남녀간에 의무로 생각했다. 하지만 싱글인생을 즐기자는 생각과 대학진학 여학생들이 늘어나면서 결혼연령도 늦어졌고 다양한 가족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혼인 연령대기 날로 높아졌으나 결혼의사는 점점 줄어들었다. 1970년대에는 낙태가 합법화되었다. 이 시기에 페미니즘이 등장했다. 미국 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에서는 현모양처가 미덕이라고 생각했던 미국의 마지막 어머니 세대가 미국 전역을 뛰어달리며 캠페인에 동참한 페미니스트 딸과의 갈등이 그려진다.
혼인율은 드라마틱하게 내려갔다. 스웨덴에서는 1965년 이래 20년 사이에 50%나 떨어졌다.. 프랑스 독일 이태리는 35%나 내려갔다.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이혼률은 1970년 24%에서 1990년에는 42%로 늘었다. 미혼 커플의 동거율은 1965년 10%에서 1980년에는 31.5%(프랑스)로 늘었다. 24세 여성의 미혼률은 미국에서 1970년 36%-1980년 51%로 급격하게 상승했다. 한부모 가정의 수도 1970년 13%에서 1985년에는 28%(미국)으로 크게 늘어났다. 모든 것이 변화했다.
2000년대 들어서서는 알파걸이 등장했다. 지난 몇천년 동안의 통념은 남자가 가정을 부양하는 것이었다.그리고 여성은 그 아래에서 보호를 받았다. 그런데 남성 보다 수입이 많고 능력이 있는 여성들이 대거 등장했다. 집 안에서의 주도권도 바뀌고 역할도 달라졌다. 남성 전업주부도 등장했다. 유모차를 끌면서 라떼를 마시며 육아 얘기를 나누는 아빠들도 등장했다. 미국과 유럽의 전성기 시대에 고졸 남성은 제조업에서 일했다. 평생을 보장받았다. 가정을 책임질 수 있었다. 그런데 외부에서는 세계화로 그들의 일자리가 상실되었으며, 내부에서는 전문직 여성들의 등장으로 여성들의 지휘 감독을 받게 되었다. 정치에 미치는 파장도 컸다.
비혼 졸혼 황혼이혼 동성결혼 등 결혼을 둘러싼 변화와 진화는 계속되고 있다. 상상하던 것 이상이다. 어떤 사회학자는 2050년 인구의 절반이 독신이 될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가족의 개념에 반려동물이 들어온 것은 오래됐다. 앞으로는 리얼돌과 로봇이 가족의 개념에 포함될 수도 있는 세상이 왔다. 다시 조선의 1920년대로 돌아가 결혼의 역사를 살펴본다.
@ 참고서적
풍속의 역사. 에두아르트 푹스. 까치
처음 읽는 여성의 역사. 정현백 김정안
진화하는 결혼. 스테파니 쿤츠. 작가정신
결혼의 문화사. 알렉산드리아 블레이어. 재승출판
처음 읽는 여성세계사. 케르스틴 퀴커.어크로스
고대 로마인의 성과 사랑. 알베르토 안젤라. 까치글방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자본의 성별. 셰림베시에르. atte
결혼의 종말. 한중섭. 파람
비혼1세대의 탄생. 홍재희. 행성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