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70)] 부대 방문한 대통령 후보들의 진면목 ① 총리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한 '벽창호' 강영훈 장군(상)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2.11.09 15:39 ㅣ 수정 : 2022.11.09 15:39

대통령 후보들인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과 적십자 총재 강영훈 장군의 연말 격려방문
강영훈의 별명 ‘벽창호’, 벽동군과 창성군 사람 중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을 일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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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소령시절 모습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매년 연말이 되면 대통령, 국회의원, 기업체 회장들을 비롯하여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전방 각 부대를 위문한다. 

 

모두들 바쁘고 중요한 직책이다 보니 서울에서 근접한 GOP부대를 선호하여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문산축선의 천하 제1사단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는 현상이 종종 벌어진다.

 

특히 선거철을 앞두고는 표의 향방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한표라도 더 얻을 수 있도록  군에서 가장 많은 장교를 양성하는 ROTC출신 지휘관 부대를 찾게 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1992년 말 대통령 선거시에 필자가 근무했던 무적태풍부대의 사단장이 덕망이 높은 이영대 장군(학군4기)이기 때문에 다소 교통이 불편하더라도 각 당의 후보들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후보와 적십자 총재인 강영훈 장군까지 부대를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사회를 좌지우지하던 권력의 실세이자 많은 국민으로부터 추앙을 받는 정치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영광의 순간이자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부대 방문자 중 총리를 역임한 강영훈 장군은 ‘벽창호’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이 말은 평안북도 벽동군과 창성군 사람 중에서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강 장군의 고향이 바로 평북 창성군으로 압록강과 접한 국경지역의 교통 중심지였다. 

 

‘벽창호’의 고향답게 창성군과 벽동군에서 기르는 한우도 예로부터 힘이 좋고 동시에 말 안 듣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강 총리의 회고록 제목에 나온 ‘벽창우’는 여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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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 교장시절 강영훈 장군 모습[사진=동영상캡쳐]

 

벽창호 강영훈 장군은 “탱크로 학생들을 깔아뭉개버리겠다는 얘기냐?”며 단호히 거부

 

강영훈 장군은 1921년 평북 창성군에서 태어나 청산보통학교 졸업후 영변농업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 다카다(高田)중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1941년 만주국 건국대학에 입학했으나 1944년 1월 봉천의 보병학교와 1945년 초랴오양의 예비사관학교에 다시 입교하여 그해 7월 견습사관으로 임관했다가 곧 해방을 맞았다.

 

8.15 광복된 후 10월이 되어서야 고향 창성으로 귀환한 그는 북한 체제에 불만을 품고 월남하여 1946년 3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49년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 12연대장으로 부임했다. 

 

6.25남침전쟁때에 국방부 관리국 국장, 3군단 부군단장 임무를 수행한 그는 1952년부터 1년간 주한 미국 대사관 부무관을 지냈다.이후 사단장을 거쳐 1960년 포천에 있는 6군단장 시절 4.19혁명을 맞았다. 당시 상부에서 “전차를 출동시키라”고 명령을 받았으나 강 장군은 “탱크로 학생들을 깔아뭉개버리겠다는 얘기냐?”며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제15대 육군사관학교장으로 부임했으나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위 동원에 반대하였고, 곧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되어서, 서울형무소에 100여 일간 수감된 후에 육군중장으로 예편한 참군인이었다. 

 

이후 군부의 권유를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62년 뉴멕시코 주립대학교에서 공부하여 1963년 USC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공산주의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채용되었다. 미국에서 한국문제연구소도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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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9월, 분단 45년 만에 최초로 남북총리회담을 성사시킨 강영훈 전 총리가 김일성과 북한 연형묵총리와 회담 성공을 기원하는 건배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1970년부터 그는 박정희정권을 용납하게 되었으나 ‘5.16은 일어나서는 안 되었던 일’이란 것이 평생의 신념이었다. 

 

1976년말 15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장과 외무부 산하의 외교안보연구원(현 국립외교원)장을 역임했다. 1980년 주영대사에 임명되었고 1983년 12월부터 아일랜드 대사를 겸하였으며, 1984년 12월 이후 주로마 교황청 대사를 지냈다.

 

1988년에는 제13대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같은 해 12월부터 2년간 국무총리로 첫 남북총리회담 개최와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등을 주도했다.

 

그는 총리 시절에 서울과 수원을 시작으로 제주도와 마라도까지 전국 18곳을 순회하며 ‘국민과의 대화’를 가졌으며, 1989년 일본 쇼와 천황의 장례식 조문도 참석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자기 역할을 충분하게 했다

 

총리를 퇴임한 뒤, 1991년 제18대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어 매년 수시로 전방부대를 위문했는데 1992년 말 당시 대통령선거의 후보들처럼 무적태풍부대를 격려 방문했다. 또한 그는 7년간 민간의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을 주도하면서 북한 수재민 돕기(1995년)와 남북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제의(1997년) 등 남북 교류에 큰 족적을 남겼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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