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2.07.21 11:42 ㅣ 수정 : 2022.07.21 11:42
무적태풍부대는 임진강 주변에 위치한 문화유적지와 한탄강 유원지 및 태풍전망대 등 안보관광지로 유명해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무적태풍부대는 임진강 주변에 위치한 문화유적지와 한탄강 유원지 및 태풍전망대 등으로 안보관광지로도 유명한 부대이다.
태풍전망대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군사분계선(MDL) 북쪽 42.3㎞ 지점의 임진강 본류에 북한이 발전과 용수공급 등의 목적으로 2002년 착공하여 2007년 10월쯤에 완공시킨 높이 34m, 길이 880m에 저수량은 3억5000만 톤인 황강댐이 있다.
저수량만 보면 군남댐의 5배에 이르고 한강 수계의 팔당댐(저수량 2억4400만 톤)의 1.5배에 이르는 중형 댐이다.
헌데 임진강 유역 주민들은 황강댐 방류 여부에 가장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2009년 9월 호우가 없는 화창한 날이었지만 북한이 황강댐 물을 예고 없이 방류해 경기도 연천군에서 6명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고 직후였던 2009년 10월, 정부는 임진강 수해 방지 관련 남북 실무회담에서 북한으로부터 '황강댐 방류 시 사전 통보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후 북한은 황강댐 방류와 관련해 이 합의를 딱 3차례 지켰다. 합의가 이뤄진 이듬해인 2010년에 두 차례, 2013년에 한 차례 황강댐 방류를 예고했다.
그러나 2011년과 2012년, 2015년, 2016년, 2017년 등, 북한은 사전 통보 없이 거의 해마다 황강댐 무단 방류를 해왔고 합의 이행을 대체로 하지 않았다. 물론 올해 여름에도 사전 통보없이 무단 방류를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도 북한의 선의에만 기댈 수 없다는 판단에, 정부는 황강댐 방류 대비를 위해 임진강 수계에 48시간 동안 388㎜의 폭우가 쏟아져도 대비할 수 있도록 홍수조절 전용 군남댐을 2010년 7월에 건설했다.
당시 댐 규모를 더 크게 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만수위 때 북한지역까지 수몰될 것을 우려해 규모를 늘리지 않았다. 한국수자원공사 임진강 건설단 군남댐 관계자는 "군남댐이 건설된 이후 북한의 댐 방류로 인한 우리 측 피해는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필자가 무적태풍부대에 근무할 때인 1992년에는 황강댐이 건설되지 않았고, 마침 평택에 계시던 부모님이 전방에 근무하던 아들집을 방문했는데, 임진강 주변에 위치한 문화유적지와 한탄강 유원지 및 태풍전망대 등 안보관광지를 좀더 편안하게 안내할 수 있었다.
■ 흥남 철수시에 월남하신 아버지도 임진강과 김만술 소위를 언급하며 감회에 젖어
필자가 무적태풍부대로 부임 당시에 처음으로 승용차를 구입했다. 이는 필자의 임무중에 군사보호시설 관리가 포함되어 수시로 현장을 확인할 필요에 따른 전임자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속된 행정관서의 건축 심의를 준비하기 위해 비포장 도로와 험한 산길까지도 승용차를 이용해 정찰을 한 덕택에 고장이 많이 발생해 구입한 지 5년도 못되어 처음 마련한 승용차를 폐차 처리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휴일에 아들집을 방문하셔서 첫 구입한 승용차로 무적태풍부대의 안보관광지로 모실 때 흐뭇해하시는 모습을 보며 효도를 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태풍전망대는 GOP철책에 건설되어 북한지역을 충분히 관측할 수 있다. 또한 동양 최대의 성모상과 십자가, 종각 및 절이 설치되어 각 종파에서 수시로 방문하여 행사를 한다. 김수환 추기경도 성모상 준공식에 참석해 헌당미사를 집도하기도 했다.
특히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고장리 베티고지가 현재 비무장지대(DMZ) 안에 위치해 있어서 직접 방문은 어렵지만 태풍전망대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GOP철책 이북지역에 위치한 베티·노리고지와 임진강을 바라보시던 아버지도 김만술 소위를 언급하시며 감회에 젖었다.
태풍전망대 앞에 흐르는 임진강변 도로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면 안변 및 원산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아버지의 고향인 함흥시이다.
해방된 이후 공산 치하에서 고생하시다가 자유민주주의를 찾아 증조할머니를 모시고 가족 전체가 흥남 철수시에 월남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언급한 김만술 소위의 베티고지(Betty)전투는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이후 휴전회담이 결렬되면서 전개된 1953년도 중서부전선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 이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전 전선에서는 중공군의 최종공세에 의해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던 중에서도 베티고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고지로서 그 주위에는 임진강이 허리띠처럼 둘러 흐르고 있는 서부전선 작전상의 요충지였다.
만일 베티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휴전이 성립될 경우, 주 저항선에서 남쪽으로 2㎞ 이상이 비무장지대로 결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국군은 그만큼 임진강 남쪽으로 물러나야만 되었다.
베티고지 전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해 국군과 중공군간에는 이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함이 극도에 달았다.
6.25남침전쟁 막바지인 7월15일은 휴전을 앞두고 중공군이 벌인 막바지 공세인 이른바 7·13공세의 사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7·13공세는 중공군이 휴전을 앞두고 중부전선의 금성 돌출부의 만곡부를 없애기 위해 퍼 붓은 최후의 공세였으나, 이러한 불길은 서부전선 임진강 대안의 고양대 일대와 노리고지를 감제하는 중심부인 베티고지까지 불어 닥쳤다.
결국 베티고지는 소대장 김만술 소위와 2소대원의 임전무퇴의 감투정신에 의해 10배 넘는 중공군의 공격을 끝까지 방어하여 기적의 36대800 승리신화를 만들며 격퇴시키고 사수하여 역사에 남았다.([김희철의 전쟁사(71~72)] ‘36대800 기적의 승리 만든 베티고지 전투’ 참조)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