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왜 여기에 왔니?”라던 묘한 표정에 담긴 선배 사랑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준 사단장 이재관 장군에 대한 존경심이 모락모락 피어났던 전입신고 다음날, 사단 책임지역 지형 정찰을 위해 사령부에서 출발했다.
필자는 지형 숙지를 위한 목적으로 책임지역 정찰을 출발했지만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만나고 싶은 선배가 있어 군자산으로 바로 향했다.
10년 전에 중동부 전선 대성산 기슭의 승리부대에서 인접 중대장직을 수행하던 그는 소대장 근무하던 필자를 방문했을 때 다음과 같이 충고를 했던 선배였다.
당시 그는 필자에게 “김소위, 방금 대대장님은 이임 전날 그동안 지휘했던 부대에 애착이 있어 돌아보시는 것인데 자네는 상급자의 의도를 모르고 계속 점호를 하면 어떻게 하나?”라고 하면서
“상급자는 무섭고 두려운 존재만은 아니다. 오히려 삼촌이나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상급자를 모셔야 한다네...”라고 말했다. ([김희철의 직업군인 이야기](26) “군 생활의 딜레마, 상급자는 우리의 또 다른 적인가?” 참조)
그 충고를 듣고 필자는 상급자가 하급자 지적을 통해 혼을 내며 가르치지만, 하급자는 그 지적에 오히려 감사하며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서는 자세가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군생활 뿐만 아니라 사회 조직의 험한 파도 속을 헤쳐나갈 수 있는 중요한 강점이 되었다.
또한 그의 가르침 덕분에 상하가 일치되어 '上下同欲者勝(상하동욕자승)'의 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긴 군생활 기간의 실천 노력으로 이렇게 ‘직업군인 이야기’ 칼럼을 쓸 수 있게도 되어 너무도 감사했다.
그 선배는 김형배(육사34기) 중령이었고 당시에 군자산 대대장으로 추계진지공사 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 가수 영탁의 노래와 유사하게 “니가 왜 여기에 왔니?”라며 묘한 표정을 지었던 김형배 중령
김형배 중령은 추계진지공사를 위해 적암삼거리 옆 공터에 설치된 야전 숙영지 텐트에 있었다.
필자는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마음에 대대장 김 중령의 텐트로 들어서자, 그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의아해하며 던진 첫 마디에 움찔해질 수밖에 없었다.
“희철아, 니가 왜 여기에 왔니?”
수방사 작전장교로 근무했으면 선호하는 기계화 사단 등의 부대로 갈 수도 있었는데, GOP를 담당한 가장 평범한 부대로 배치를 받았냐하는 핀잔이었다. 그의 핀잔 속에 숨어있는 필자에 대한 진정한 아낌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유가 현 부대와 수방사에서 근무했던 선배의 요청과 추천 때문이라고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당시 상황이야 어떻든 필자의 부대 배치는 과거의 일이 되었다.
허나 오히려 필자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선배임을 재확인하면서도 그를 가까이에서 벤치마킹하여 야전에서 성공적으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였다.
왜냐면 그는 수방사 경비과장을 마치고 무적태풍부대 예하 대대장으로 부임하여 창의적이고 효율적으로 부대를 지휘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 결과로 선봉대대와 대대전술훈련 우수부대 등 많은 부대 표창을 수상하며 성공적인 대대장으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 임무 수행시에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조직적인 업무 분담 및 통합이 매우 중요
야전 숙영지의 비좁은 텐트 안에서 신임 작전보좌관인 필자에게 귀중한 조언을 해주던 김형배 중령은 어떠한 임무가 부여될 때, 그 과정과 결과를 통해 능력을 평가받는다며 진지공사 사례를 예로 들었다.
그는 비록 자신 부대의 별도 임무 수행 때문에 진지공사를 늦게 시작했더라도 김 중령 대대는 타부대 보다도 일정을 앞당겨 일찍 끝낼 수가 있었다.
그 이유는 쉬는 병력 없도록 간단없이 진지공사가 지속될 수 있게 철저한 계획과 사전 준비를 한 효율적인 ‘공정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형틀을 짜는 병사들은 대부분 병사가 잠이 들었을 때 작업을 했고, 대다수의 주력은 일과 개시와 동시에 분주하게 일했다. 이렇게 조직적인 업무 분담과 통합이 매우 중요했다.
또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높은 곳에는 간이 도르레를 이용해 시멘트와 물들을 운반시켜 병사들의 노력을 최소화 시킨 것도 유효했다고 성공담을 들려주었다.
■ 대대장이 검열을 자청한 까닭은?/지휘능력을 높이 평가받게 한 ‘전투지휘 검열관 초청 편지’는 신화로 남아...
게다가 군사령부의 전투지휘검열시에도 김 중령은 수세적으로 검열 수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공세적인 자세로 임했다.
그는 검열관 전원에게 ‘전투지휘 검열관 초청 편지’를 사전에 보냈고 검열관들은 검열전에 상쾌한 기습을 당한 기분이었다.
당시에 대부분의 예하부대 지휘관들이 검열관들의 지적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부대로 검열나오는 것을 회피하는데, 김 중령은 오히려 자신의 부대를 검열해 달라는 적극적인 구애의 서신을 보냈기 때문이다.
전투지휘검열을 받기 직전에 발생했던 예하 부대에서의 월북사고와 맞물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군자산 대대를 방문했던 전투지휘 검열관들은 하나같이 군자산 대대를 칭찬했고, 대대장 김 중령의 노력과 우수성 및 지휘능력을 높이 치켜 세웠다.
초청편지 사건은 이후 가장 많이 회자(膾炙)되면서 신화처럼 남게 되었고, 이에 따라 사단의 각 참모부는 연말 우수부대 선정시 전 년도에 이어 군자산 대대를 ‘선봉대대’로 선정했다.
하지만 선봉대대 2연패로 인해 예상되는 타 대대장들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 ATT(전술훈련 평가) 우수부대로 조정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는 필자에게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얼마나 오랬동안 모셨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사귀었는가가 중요하다. 허심탄회하게 심중을 드러낼 수 있어야 인정받는 부하가 될 수 있다”고 조언을 해주었다.
‘얼마나 깊이 사귀었는가?’라는 핵심을 찌르는 말을 했던 김 중령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이듬해인 1992년 3월에 대대장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사단 정보참모로 영전한 뒤에 작전참모까지도 역임했다.(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