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 네륭전 부주석은 ‘문화대혁명’으로 2000만 명이 사망했고 1억 명이 박해를 받았으며 재산 손실도 8천억 위안이라고 증언했다. 이렇듯 중국은 충견을 활용한 피의 숙청과 토사구팽(兔死狗烹)의 점철로 이어진 마오 왕국이다.
아무튼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으로 견고해진 마오 왕국은 10년간만 지속되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마오쩌뚱이 파킨슨병에 시달리다가 1976년 9월에 운명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뚱의 뒤를 이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나 문화대혁명의 잘못을 부각시키며 개혁·개방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3년뒤인 1981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개혁·개방 선언’의 역사결의를 채택하며 경제발전에 치중했다
덩샤오핑 집권기간 중인 1989년 6월 ‘텐안먼 항쟁’이 발생했다. 이는 소외된 홍위병 세대와 젊은 지식인들이 민주화운동으로 체제 자체의 타도보다는 문화대혁명에서 얻지 못한 정치개혁 및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는 비폭력 시민혁명이었다.
허나 덩샤오핑과 원로들은 마오쩌둥과 마찬가지로 텐안먼에서 총칼과 탱크로 무력 진압했다.
그런데 ‘텐안먼 항쟁’은 실패했지만 이를 통해 시진핑 등 상류층 자제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보황파 홍위병 세대가 중앙에 접근하며 다시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 중국의 무력 도발시 한미 동맹하에 강력히 응징하되 경제를 고려하여 유연한 대응 필요
2021년 11월 개최된 중국 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에서 ‘당의 100년 분투의 중대 성취와 역사 경험에 관한 중공 중앙의 결의(역사결의)’를 채택했다.
1945년 마오쩌둥, 1981년 덩샤오핑에 이은 중국 역사상 세 번째 역사결의다. 시진핑 주석은 ‘중화민족 부흥의 핵심’, 시진핑 사상은 ‘중국 정신의 시대적 정화(精華)’라고 한껏 띄우며 3연임을 통한 장기집권 채비를 마쳤다.
시진핑 주석의 역사결의는 1921년 공산당 창당 후 100년간 투쟁으로 이룬 주요 업적과 역사적 경험을 종합적으로 다뤘다. 허나 ‘문화대혁명’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고 ‘당의 역사적 사명과 행동가치' 문건에서 톈안먼 항쟁을 ’1989년의 정치풍파‘로 묘사했다.
또한 과거를 부정하며 유일통치체제를 확립한 마오쩌둥에 대해 “중국 발전의 신기원”, “굴욕외교 종식” 등 온갖 후한 평가를 했다. 반면 덩샤오핑에 대해서는 “개혁·개방의 역사적 결정”이라고 존중하긴 했지만 눈에 띄는 인상적인 표현이 없었다.
마오쩌둥이나 문화대혁명의 잘못을 부각시켜 개혁·개방의 정당성을 강조한 덩샤오핑과 차별화한 부분이다. 발표 분량도 덩샤오핑의 후임인 장쩌민, 후진타오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치 ‘대국굴기로 중화패권주의’를 주장하는 시진핑 주석이 신중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의 계승자라는 뉘앙스로 읽히는 대목이다.
한편 상단 사진같이 최근 빈부의 격차가 극에 달하는 현실속에서 희망을 상실한 MZ세대(1990년대생 밀레니얼세대와 2000년대생 Z세대)의 ‘탕핑(躺平)운동’이 관심을 끌며 조용하게 번져가고 있다. 그들은 오히려 모두 못살던 마오쩌뚱 시대를 그리워한다.
중국의 지호논단은 탕핑운동을 “집도 차도 사지 말고, 결혼하지 말고, 아이 낳지 않고, 소비도 하지 않는 그저 최저 생존 기준만 유지해 타인의 돈벌이를 위한 기계나 착취당하는 노예가 되기를 거부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안보연구회(COKUSS)가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홍위병’에 대해 ‘권력자의 광기가 희생시킨 마오의 아이들’이란 주제로 개최한 포럼에서 강연한 권성욱 작가는 중국에 대한 두가지 대책을 언급했다.
첫째, 1991년 한중수교시에 대만과 단교한 것과 UN에 남북이 동시에 가입함으로써 우리 헌법에 명기된 내용에 반하며 북한을 국가로 인정했던 실수를 바로 잡아야 남북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둘째, 중국의 실체를 정확히 알고 경계해야 한다며 과거 노무현 전대통령이 “존경하는 인물이 마오와 덩샤오핑이다”라는 발언은 실체는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냉전시대의 소련과는 달리 중국은 약소국에 식량 지원을 포함한 돈으로 포섭하며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있어 러시아보다 무서운 적이라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해양 및 항공 등 무력도발시에는 한미 동맹하에 강력히 응징하되 경제를 고려하여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