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연애, 결혼이야기⑥ 일제하 페미니즘 사회주의의 결혼관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일제하에서 여성운동은 크게 세가지 조류가 있었다. 후에 일본군국주의에 타협하거나 투항한 자유주의, 나혜석과 김일엽으로 대표되는 급진주의(페미니즘), 그리고 사회주의 계급운동으로서의 여성해방론.
나혜석(1896-1948) 김일엽(1896-1971) 김명순(1896-1951) 등 급진주의자들은 여성의, 여성의 입장에서 선, 여성을 위한 정조론을 들고 나왔다. 이들에게는 남성과 여성의 정조가 다를 수 없다. 여성에게 정조는 의무이고, 남성에게 외도와 매음은 낭만이어서는 안된다. 이들은 ”정조는 자유다. 밥을 먹고 싶을 때 밥을 먹고 떡을 먹고 싶을 때 떡을 먹듯이 정조를 지키고 안지키는 것은 오로지 내 선택이다“고 주장했다. 거의 혁명선언이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은 파리 여행 때 최린(1878-1958)과 사랑에 빠졌다. 나혜석은 최린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남편과 이혼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남편이 이를 알게 되자 자유론의 입장에서 자신을 변론했다. “배우자를 잊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혼외정사를 벌이는 것은 죄도 실수도 아닌 가장 진보된 사람의 행동일 뿐”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가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졌다.
1934년 잡시 <삼천리>에 공개한 ‘이혼고백장’에서는 남편이 자신을 성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밝혔다. 여성이 성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도 엄청난 파격이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그는 “세상의 모든 조소, 질책을 감수하면서 이 십자가를 등지고 묵묵히 나아가려 하나이다”고 했다
나혜석은 유학 시절, 일본 최초의 페미니스트 잡지, <세이토. 靑踏>을 보면서 영향을 받았다. 히라쓰카 라이초(平塚雷鳥 1886-1971)가 1911년에 창간했다. 어머니가 딸을 위해 모아놓은 결혼자금으로 여성들만 모아서 잡지를 만들었다. 잡지의 제호는 18세기 영국 여성 참정권 운동 모임 ‘Buestockong Society’에서 따왔다. 모임 참가자들은 푸른 모직 스타킹을 신고 다녔다.
이 잡지에서 그녀는 사설을 통해 “원시에 여성은 태양이었지만 …. 지금은 달이 됐다“고 했다. 원시 시대에 여성은 원래 태양이었다는 말은 일본 여성들의 가슴을 뛰게 한 상징이었다. 모계사회에서 가부장제 사회로 이전하면서 여성은 반사체에 불과한 타율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압축적으로 설명한 문장이었다. 라이초는 여성의 성에 대한 결정권, 아동 양육의 사회적 책임, 여성의 경제적 독립등 시대를 앞선 주장을 제기했다. 후에 우생학을 주장하는 등 군국주의와 타협했다. 나혜석은 스승이 파시즘과 혐조하는 것을 알고 강하게 비판했다. 나혜석은 은밀하게 독립운동에 관여하여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끝이 비참했으나 굴종하지 않았다.
김일엽은 기자로서, 작가로서 활동하다가 마지막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생을 마감했다. 일본 유학기 부터 나혜석과 함께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주창했다. 1920년 여성의 손으로 만든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를 창간했다. 개화기 여성헌장이라고도 불리우는 ‘신여자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순결과 정조는 답이 아니며 사회적으로 강요된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봉건적인 여성의 정절 이데올로기에 글과 몸으로 저항했다. ”정조는 결코 도덕이 아니다“라며 ’재래의 성도덕에 열렬히 반항하지 않을 수없다‘고 선언했다. 생물학적 순결론에 반대했다. 정조는 누군가와 연애하고 사귀는 동안 외도를 하지 않는 것이라는 신정조론을 들고 나왔다. 자유연애론의 옹호자인 그는 실제로 많은 남성과 자유연애를 하여 화제가 되었다.
1924년 <부녀지광> 창간호에서 기혼 남성이 원래의 혼인관계를 청산, 이혼함을 전제로 한다면 그 관계는 정당하다는 입장을 전개했다. ’나의 정조관‘(1927.1.8 조선일보)에서는 “재래의 정조관으로 말하자면, 정조를 물질시하여 일단 과거를 가진 여자의 사랑은 신선한 맛이 없는 진부한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정조를 잃은 것을 마치 어떤 보옥으로 만든 그릇이 깨어져서 못쓰게 되는 것같이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조란 그런 고정체가 아닌 것입니다. 정조는 어디까지나 사랑이 있는 동안에만 있는 것입니다”고 하여 논란의 중심에 섰다.
급진주의 여성들은 오늘날 페미니즘의 맏언니로서, 원조로서 재평가를 받고있다. 당시에는 자유연애를 몸소 실천하고 이를 공개하면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해방운동이라는 견고한 흐름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사회주의 계열로는 허정숙(1902-1991)을 들 수 있다. 여성단발운동의 선구자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지식인 중에서 가장 먼저 단발을 했고 유행을 만들었다. 이를 본 군중들이 물밀듯 모여 혼잡을 이루고 그 해괴함에 놀라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조선일보 1923.3.36)고 한다. 그녀는 유학 후 돌아오면서 귀국 일성으로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하는 등 많은 어록을 남겼다. 그는 동아일보 등에 ‘수가이’라는 필명으로 많은 글을 썼다.후에는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허정숙은 구가정의 부인이나 신가정의 부인이나 스스로 독립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경제적 독립이 근본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남의 아내와 며느리가 되어가지고 한갓 그 집안 시부모와 그 남편 한사람만을 지극히 정성으로 받들고 공경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사람으로서의 우리의 개성을 살리우고 우리의 인권을 차지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먼저 우리 눈 앞에 급박한 큰 문제이다“(동아일보 1924.11.3) 그는 가정이 안락한 휴식처가 아니라 족쇄라며 가정이 지옥이라고 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 근거로 설날과 한식, 추석 등의 명절에 여자는 각종 음식과 잡일을 하는데 동원되어 쉬지도 못한다는 점과 성격이 이상한 가족,친척들의 수발과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 ”가정이라는 지옥 속에서 남편의 노예, 부모의 노예, 자식의 노예, 예의도덕의 노예, 가사노동의 노예, 경제의 노예로써 이중 삼중의 노예로“로 존재한다고 강하게 지적했다.
허정숙은 정조는 무엇이며 누가 만들었느냐, 남자들은 여러 여자를 첩으로 두고 술집 여자와도 놀아나면서 왜 여자에게만 정조를 강제하느냐고 반박했다. 정조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하고 자유로운 연애와 동거, 결혼에 얽매이지 않는 것 역시 남성과 가정, 가족으로 부터의 해방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여성에게도 성욕이 있다며 ”성적 해방과 경제적 해방이 극히 적은 조선여성에게 사회가 일방적으로 수절을 강조하는 것은 여성의 본능을 무시하는 허위“라며 반박했다. 그는 성적 만족을 위해서라면 정신적인 사랑 없이 육체적인 결합이 가능하다는 ‘연애 유희론’을 설파했다.(허정숙에 대해서는 위키백과에서 발췌)
허정숙은 ‘조선의 콜론타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에서 여성해방이론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조선과 전 세계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여성해방이론은 ‘콜론타이즘’이라고도 불리운다. 그래서 콜론타이즘을 소개하고 가는 것이 일제하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콜론타이는 프롤레타리아가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듯이 여성도 남성들에게 착취당하는 구조라고 보았다. 부르주아 여성 가정에서 여성들은 남성의 성적 요구를 충족시켜주고, 가사노동을 제공하며, 남편의 법적 상속자를 생산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녀는 <가족과 공산주의> 등의 문헌을 통해서 여성의 짐을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들의 공동체양육과 가사노동의 국가책임이 완전한 여성해방에 이르는 길이라고 보았다. 부르주아 부인들이 자신의 아이들만 귀하게 여기고 남의 아이들은 천시하는 것은 잘못 되었다며, 노동자와 농민 아동들을 위한 모두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체양육이 일터에 나간 주부를 대신해서 아이들을 진정으로 보호하는 방편이라고 보았다.
그는 전문직 독신여성을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보았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온갖 노예로 사는 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연애나 결혼제도에 속박되지 않아야 한다며 자기 삶을 스스로 사는 여성상을 제시했다. 부부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둘의 연합이지만 이혼도 자유로와야 한다고 믿었다. 국가가 공동육아를 해주면 더욱 이혼이 용이하다고 보았다. 열애와 결혼이 너무 많은 시간과 정열을 요구한다면서 ”해결해야 할 중요사업이 저토록 많은데 쏜살같이 지나가는 현재와 같은 혁명기에 그럴 시간이 어디있어요“<콜론타이의 소설 ‘3대의 사랑’ 중에서>라고 강조했다. 일부일처제를 넘어선 자유로운 연애가 좋다는 것이다. 남여의 사랑이 동지애로서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이같은 논리를 만들었다. 그는 ”성욕은 목마름 처럼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다“며 물한잔 마시는 것에 비유했는데, 이에대해 레닌은 ”그렇다고 아무 물이나 마실 수는 없지 않으냐“고 핀잔을 주었다.
<근대의 가족, 근대의 결혼>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등 근대 여성 문제에 가치를 갖고있는 여러 저서를 발간한 김경일은 <신여성, 개념과 역사>를 통해 콜론타이즘이 조선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자세하게 분석했다. 성의 해방과 결혼 및 이혼의 자유, 정조와 순결성에 대한 부정, 여성의 경제적 독립성 같은 그의 주장에 다수 사회주의자들이 공감했다. 허정숙은 그뿐만 아니라 연애사사(私事)론등 까지 거의 전면적으로 수용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콜론타이즘에 대해 연애란 사사이다. 매력을 느낄 때에 서로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연애는 육체의 결합과는 다른 결합이다. 우리는 연애로 우리의 용기와 능력을 배가하여 사회의 진보에 공헌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콜론타이는 정당하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연애는 우리의 인간성을 높이고 우리가 신사회를 위하여 싸우는 투쟁을 더욱더 능률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장국현. 우리역사넷에서 재인용) 남녀의 자유로운 연애와 사랑은 동지애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는 콜론타이즘을 옹호하는 글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연애자유론에 대해서는 비판이 많았고 다수 사회주의자들이 수용하지 않았다. 전상주는 콜론타이의 자유주의연애가 사회주의자들을 잘못된 연애론에 빠지게 하기 쉽다고 경계했다. “난혼생활은 어디까지든 퇴폐적이며 정력의 낭비이며 혁명과는 아무 인연 없는 것”, “연애를 통하여 점점 계급적 업무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로 계급적 규율을 문란”케 한다며 레닌의 의견을 빌어 소부르주아적 반동적 연애관이라고 비판했다. <‘프롤레타리아 연애의 고조-연애에 대한 계급성’ 삼천리 1931년7월. 김경일의 논문 ‘1920-30년대 한국의 신여성과 사회주의’에서 재인용> 민병휘는 식민지사회주의운동에 적합하지 않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연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투쟁력을 말살시키고 운동자들의 진영을 문란케 한다고 비판했다.
사실 이러한 논쟁은 소수 사회주의 지식인들간의 문제이었다. 이런 논쟁이 조선 민중 절대 다수의 삶에 구체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은 봉건적 구속에서 해방하려는 여자 일반의 자유 획득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런 방편으로 대중들에게 친밀하게 다가가기 위해 단발을 하지 않고 보통 농민의 머리를 하고 접근하는 등 전술적 유연성을 갖기 시작했으나 중일전쟁 대동아전쟁과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지하화하면서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은 별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자유주의 계열은 여권론적 부르주아 여성운동으로, 낡은 인습을 타파하고 봉건적 억압을 철폐하며 남녀의 평등한 권리 확립을 외치는 교육계몽운동이다. 기독교 여성주의의 일각에서는 기존의 가족제도를 비판하며 신가정을 제시했다. 유교와 마찬가지로 가정을 사회의 중심으로 보았다. 유교가 남성을 중심으로 하여 대를 이어가는 가족개념의 효와 충을 강조하는 종적인 것이었다면, 기독교는 부부가 중심에 있었다.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위치를 강조했으며 현모양처 보다는 양처현모를 더 강조했다. 기존의 제도 하에서 좋은 가정을 만들자는 취지였다.
일제는 민족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내선(內鮮)결혼도 장려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일제는 여성에게는 다산을 독려했다. 어머니로서 여성은 군인을 낳고 길러서 국가에 바쳐야 하며, 주부로서 여성은 애국반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근검 절약등 생활개선운동을 벌이면서 군인가족을 후원하고 헌납 물자를 모으는 등 후방 지원을 해야 했다. 노동자로서 여성은 여자근로정신대와 위안부로 동원되었다. 일본에서는 다산 장려와 모성 보호로, 조선에 대해서는 자식을 희생하고 모성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창부의 역할도 강제했다. 모윤숙 최정희 등은 일제의 황국신민론에 입각하여 군국의 어머니 상을 강조했다.<‘일제말기의 여성 동원과 군국의 어머니’ 이상경>
자유주의 여성운동은 일부가 일제에 타협하거나 투항했고 해방 후에는 조선여자국민당 독립촉성애국부인회 등을 보직하여 우익정치단체를 지원했다. 일제가 전쟁으로 향하여 치달아 가는 시기에 조선에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신여성은 1920년대 후반 부터 시작하여 1930년대에는 모던걸로, 지식인은 모던보이로 더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