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척 없는 STO 법제화…증권사도 ‘속도 조절’
[뉴스투데이=황수분 기자] 토큰증권발행(STO) 시장이 미래 먹거리로 떠오르며 본격적인 시장 개화를 앞두고 있지만, 법안 통과 지연으로 증권사들의 선점 경쟁도 속도가 늦춰지는 분위기다.
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2월 ‘토큰증권 발행·유통 규율체계’를 발표한 이후, 그해 7월 한차례 토큰증권 법안이 국회에 제출됐으나 현재 법개정 진행은 더딘 상황이다.
당국은 해외 사례를 참고해 제도적 기반 마련에 나서며 지침을 구체화한 뒤 1년이 지났고 법안이 발의된 지 7개월이 넘었지만 여전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토큰증권(ST)은 부동산·미술품·지식재산권 등 자산을 분산원장 기반으로 발행한 디지털 자산을 의미한다. STO 시장이 본격적으로 활성화하려면 비정형적 증권의 유통 근거가 담긴 자본시장법 개정안과 토큰증권 권리를 인정한다는 내용의 전자증권법 개정안이 각각 통과돼야 한다.
전문가들은 토큰증권 시장이 엄청난 규모로 불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국내 토큰증권 시장 시가총액이 올해 34조원에서 2030년에는 367조원까지 커질 것으로 봤고, 글로벌 컨설팅 회사 롤랜드버거 역시 2022년 3000억달러(약 406조원) 수준에서 2030년 10조9000억달러로 35배 넘게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 때문에 증권사들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토큰증권 시장 선점 채비에 분주했다. 토큰증권으로 발행되면 자산 시장에는 새로운 유동성을 공급하고, 투자자들에게는 새로운 투자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KB증권과 신한투자증권, NH투자증권 등은 지난해 토큰증권 컨소시엄을 꾸리고 별도 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이들은 공동 인프라 구축을 넘어 전략적 사업모델 발굴까지 협업 범위를 확장한다는 계획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하나증권은 프린트베이커리와 루센트블록, 피나클, 오아시스 비즈니스 등과 조각투자 서비스 관련 업무협약을 활발히 체결했다. 한국투자증권도 한우 조각투자 플랫폼인 '뱅카우'를 운영하는 스탁키퍼와 MOU를 맺었다.
대신증권은 지난해 3월 부동산디지털수익증권거래소 '카사'를 인수한 데 이어 올 초 코스콤과 토큰증권 플랫폼 시범사업 추진을 위한 맞손을 잡았다.
증권사들이 조각투자를 비롯한 STO 시장 진출에 적극 나서는 데는 실적 악화에 따른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자 신수익원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움직임은 여전하다.
지난해 증권사들은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관련 충당금 부담 증가 여파로 부진한 실적을 기록했다. 지난해 연간 실적 기준 10대 증권사 중 6곳이 4분기 순손실을 냈다.
토큰증권 발행·유통을 위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현재 국회 정무위원회(정무위)에 계류 중이다. 윤창현 의원이 지난해 7월 관련 법안을 대표 발의했으며, 같은해 11월엔 금융투자협회에서 토큰증권 토론회를 주최하는 등 조속한 제도화에 앞장섰지만, 제대로된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물리적으로는 21대 국회가 끝날 때(5월29일)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지만 오는 4월 정치권의 가장 큰 이슈인 총선이 다가오면서 법안소위뿐 아니라 정무위 회의조차 열기 어려울 수 있단 우려가 나온다.
증권시장부터 암호화폐까지 금융 관련 입법을 총괄하는 정무위는 지난해 12월부터 법안 심의가 ‘올스톱’ 상태다. 이에 토큰증권 도입은 물론 기업성장집합투자기구(BDC) 도입 등 금융업계의 굵직한 현안들이 그대로 잠자고 있다.
홍기훈 홍익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현재 분위기상 4월 총선으로 토큰증권 관련 논의가 미뤄질 것”이라며 “해당 법안이 아직 국회에 계류중인 만큼, 당분간 증권사뿐 아니라 관련된 기업들까지도 투자 불확실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상황이 이렇자, 증권사들의 시선은 금융당국을 향한다. 토큰증권 초기 인프라 구축 등을 위해 증권사들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선제적 투자를 진행해 왔다.
증권사들은 저마다 STO 사업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발행과 유통이 분리돼 있는 등 세부적인 제도 정립이 미비해 자본시장법 개정안 통과가 절실하다.
증권업계는 투자계약증권과 비금전신탁 수익증권의 유통이 허용되는 시기는 올해 하반기나 내년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STO 사업을 위해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는 등 준비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며 “어차피 금융당국도 법안 처리가 늦어질 것 같아 공격적인 형태보다는 당국과 속도를 맞춰 내년까지 준비하려는 증권사들도 있다”고 말했다.
국회가 오는 4월 총선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관련 법안 통과는 더 지연될 수 있어 업계의 불안은 더욱 커지고 있다.
또 다른 증권사 관계자는 “관련 사업을 위해서는 초기 인프라 등 서비스 개발에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데 대형사의 경우 어느정도 인프라는 구축된 것으로 안다”며 “어차피 STO 사업 자체가 시장성을 보고 뛰어들었기 때문에 금융당국의 시행세칙이 디테일하게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지만 아무래도 총선 이후가 될 것 같다”고 설명했다.
당국이 우회로를 마련했지만 미진한 상황이다. 금융위는 법개정 없이도 토큰증권 시장이 개화하도록 지난해 말 규제샌드박스 제도(새로운 서비스가 일정한 조건 안에서 현행 규제를 적용하지 않고 시장에 우선 출시되도록 한 것)를 통해 KRX 신종증권 시장을 개설한 데 그쳤다.
토큰증권의 거래가 본격화될 것으로 기대됐지만 KRX 시장에는 분산원장 기술을 적용하지 않은 조각투자 상품이 거래되고 있고 상장금액 30억원 이상 등 까다로운 조건이 걸리면서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다.
토큰증권의 유통시장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현재 시점에서, 조각투자사의 투자계약증권 발행에 따른 증권사의 수익은 위탁계좌 관리수수료 및 인프라 사용료 등에 불과하다.
하지만 전문가는 향후 제도 개정 이후 증권사가 장외거래 중개업자의 역할을 하게 되면 추가적인 수익 모델을 기대해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안영준 하나증권 연구원은 “증권사들의 네트워크 효과 선점을 위한 경쟁이 치열한 만큼 향후 수년간은 상장 시 수수료가 없거나 미미할 가능성이 크지만, 시장이 어느정도 안정화되고 플랫폼의 협상력이 생긴 이후에는 상장 시에 수수료 수취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이에 지난해 토큰증권시장 선점을 위해 달려온 증권업계와 조각투자업계도 다소 힘이 빠진 분위기다. 초기 진입 비용이 늘어나고 제도화는 지지부진한 상황에서도 증권가는 새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증권사들은 관련 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그동안 많은 준비를 해오고 있다”며 “법제화가 총선 이후 논의가 되더라도 내년 하반기나 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기간 증권사들은 어느정도 버틸 체력이 될 수 있지만 기초자산을 소유했던 여러 스타트업들은 버틸 운영자금이 없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