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2.02.10 09:48 ㅣ 수정 : 2022.02.10 11:03
소년 위트컴, 청교도 가문의 엘리트 교육을 바탕으로 기독교적 정의와 인간에 대한 기본 사랑 터득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 장군은 1894년 미국 중부 캔자스주 토피카(Topeka)에서 주대법관을 역임한 아버지 조지 허버트 위트컴과 당시 남자대학에서 최초로 강의한 여성 법률가이며 교수인 어머니 제시 위트컴 사이의 5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친가는 물론 외가가 모두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집안에서 성장한 위트컴은 전통적인 청교도 가문의 엘리트 교육을 바탕으로 기독교적 정의와 인간에 대한 기본 사랑을 터득하게 된다.
캔자스주 토피카의 워시본(Washbon)대학 재학시에는 대학 편집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각종 토론회에서 우수 토론자로 선정되었고 미식축구 선수로도 맹활약을 했다.
또한 아펜잴러와 언더우드가 활동했던 SVM(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 학생자원선교활동) 멤버로 필리핀 선교사의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위트컴은 대학 졸업 후 다양한 회사에서 간부로 근무하였고, 지역사회 활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기업 및 정부기관의 예산, 조직, 기술 등에 관한 많은 지식과 경험을 습득할 수 있었다.
Southwestern Telephone Company 등 여러 통신회사에서 세일즈 매니저, 지역 책임자로 근무했고, 보스턴 시정부의 업무 개선을 위해 다양한 지원활동도 했다.
3백만 불 이상의 실업자 구호 펀드를 모금했으며, 시정부의 자문위원회에 참여하여 정책에 대한 조언을 통해 100만 불 이상의 예산을 절감하는 역량을 발휘했다.
당시 위트컴은 공화당의 매사추세츠 주지사 선거에 출마할 정도로 상당한 지명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오마하 전투의 병력 및 군사물자 수송, 루앙시의 항만 운영 및 재건 성공으로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 수여
그러나 하와이의 YMCA에서 일하다가 1917년 National Guard 및 예비군 장교(ROTC)로 임관한 위트컴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1914-1918)하자 미 육군 16사단 32연대 보병 장교로 제2차 마론강 전투에 참전하면서 군인의 길을 걷게 됐다.
위트컴은 1941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자 아이슬란드에 미군 장교 최초로 파견되어 모든 항만을 지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43년 대령으로 진급한 후 영국의 브리스톨 해협의 뉴포트(Newport)에 위치한 미 11항만단 지휘관으로 보직되어 강한 훈련 및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쳐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에 가장 치열했던 오마하 전투에서 5만여 명의 연합군 병력과 군사물자의 수송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상륙작전 성공 후에 노르망디 해변 및 주변 항만들의 운영 및 보급 작전을 지휘하였고, 이후 폐허가 된 프랑스 루앙(Rouen)시의 항만 운영 및 재건을 위한 임무를 추가로 수행하여 지역의 안정화에 기여했다.
이 작전의 공로로 위트컴은 훗날 6·25남침전쟁에서 유엔군 사령관으로 한국군 재건에 기여했던 전쟁영웅 밴플리트 장군과 함께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또한 위트컴이 대학시절에 선교사로 활동할 꿈을 꾸었던 필리핀에서의 미군 상륙작전이 1945년에 있었는데, 이때 그는 필리핀 마닐라 항만의 지휘관으로 보직되어 17만 명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수송, 군수 업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종전 후 전역하여 잠시 사회활동을 했으나 냉전시대였던 1950년 현역으로 다시 복귀한 그는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하 6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의 추위속에서 그린랜드 공군기지 건설 등을 위한 수송 및 보급작전을 지휘하여 당시 ’미군 최고 군수전문가‘의 위치에 올랐다.
■ 프랑스의 루앙시 재건 경험이 대화재로 피해 확대된 부산의 재건 위한 값진 토대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그린랜드 공군기지 건설을 지휘했던 위트컴 장군은 1953년 미 제2군수사령관으로 부임했으나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하는 위기를 맞게 된다.
해방 직후 30여만 명이었던 부산 인구는 전쟁이 끝나자 순식간에 백만이 되고 도시기능은 마비되었으며 공동묘지 위에까지 판자 조각, 양철 등으로 비만 겨우 가릴 수 있는 판자촌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전쟁을 치르면서 남한 인구 약 2천만 명 중 천만이 빈민이요 대부분이 실업자였다. 판잣집이 밀집해 있다 보니 조그만 부주의가 대형화재로 이어져 부산은 그때 ‘불산’이라고도 불렀다.
11월 27일 오후 8시 20분경 당시 부산시 중구 영주동 17통16반 허도영(許道榮)의 방에서 난롯불 부주의로 발생한 화염은 풍속 11.8m의 강풍으로 순식간에 부산역 대화재로 확대되었다.
14시간에 걸친 화마는 부산역을 중심으로 한 번화가의 주요 건물 및 민가 등 약 1,250호를 태우고 다음 날 오전 10시 20분에 진화되었으나 같은해 1월 30일 국제시장 화재의 12.6배가 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광활한 지역의 일제 건축물과 미군 막사 같은 주요 건축물이 모두 전소되었으며 또한 민간주택 3,132채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29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데다, 6,000여 세대 약 3만여 명의 이재민은 11월말 삭풍이 몰아치는 혹한 속의 노천에서 떨고 있었다.
이 현장을 목격한 위트컴 장군은 대학 시절 선교사가 꿈이었던 것처럼 기독교적 정의와 인간에 대한 기본 사랑을 실천할 기회라는 마음을 다지게 된다. 이는 어린 시절 도전과 해결이라는 어머니의 가정교육이 그 뿌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이재민들을 위한 즉각적인 구호활동을 개시하였다. 매일 23,100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과 텐트, 의류, 침구류 등 군수물자를 긴급히 지원하였다.
화재 다음 날인 11월 28일 장군은 즉시 공병부대를 투입하여 지역을 정리하였고, 일반 장병들에게는 40,000명이 기거할 수 있는 임시 천막촌을 준비하도록 했다.
이렇게 조건반사적인 조치를 할 수 있는 전문성은 제2차 세계대전시 아이슬란드와 영국에서의 항만 운영과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그린랜드 공군기지 건설 등의 지휘 경험이 뒷받침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시에 위트컴 장군이 지휘했던 11항만단은 독일군에 의해 폐허가 된 프랑스의 루앙(Rouen)시를 재건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수개월 동안 집중적인 복구 노력을 통해 큰 선박들이 이동하며 도시기능이 살아나도록 만들었다.
위트컴의 이러한 경험들은 이번 부산역 대화재로 피해가 확대된 부산의 재건을 위한 값진 토대 및 추진 동력이 되었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