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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두의 K-Sapience (16)

국가상징공간② 경성, 제국주의의 심장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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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두
입력 : 2024.07.30 08:52 ㅣ 수정 : 2024.07.30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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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도 광화문 모습. [사진=연합뉴스 자료사진]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고종이 경운궁을 제국의 거점으로 삼은 이유는 정동이 외국공관과 기독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서양세력은 조선에서 맨 처음 경복궁과 가까운 서촌 효자동 지역에 터를 잡을려고 했는데 임오군란 등 각종 정변을 경험하면서 보다 안전한 곳을 원하게 되었다.

 

정동이 그들의 거점이 되었다. 정동에 있는 서양 각국의 공관이 경운궁을 둘러싸게 되었다. 미국공사관(1883) 영국공사관(1884) 독일공사관(1884) 러시아공사관(1885) 프랑스공사관(1888) 벨기에공사관(1901) 이탈리아공사관(1901). 그중에서도 러시아공사관이 규모가 컸다. 공관의 규모는 그 나라가 조선의 가치를 생각하는 비중에 비례한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의지와 무력 앞에서 공관이라는 담벼락은 덕수궁 담벼락 만큼이나 허약했다 결국 대한제국은 강탈을 당하고 숨이 끊어졌다. 경성의 상징물들도 제국의 상징물에 자리를 내주거나 파괴되었다.


강제 병합을 하면서 일본은 기존의 경성을 중심지로 삼았다. 러일전쟁으로 점령지역에 새로운 중심을 만들 경제력 여력도 없었고, 500년 조선의 도읍지를 그대로 놔두면 저항의 중심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   궁궐의 해체

 

우선 조선왕조의 상징인 궁궐을 개조 해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창경궁을 뜯어고쳐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공개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1907년 고종이 강제 폐위됐다. 고종은 경운궁에서 명칭을 바꾼 덕수궁(순종이 아버지 고종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에서 연금생활을 하고 있었다. 순종황제는 창덕궁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이완용 일당과 일본인들은 우울함과 걱정 근심에 빠진 그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 안에 동물을 들여왔다.

 

1909년 11월1일 개원식에 순종이 모닝코트에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까지 짚은 서양 신사의 모습으로 참석했다. 동양 최대의 식물원으로 변모했다. 일본인들은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꾸고(1911) 서양식 건물도 짓자고 해 순종의 동의를 얻었다. 현대그룹을 일군 정주영도 어린 시절 강원도 통천에서 경성으로 가출을 했다가 아버지한테 붙잡혔는데 창경원 한번 보고 고향에 가자고 했을 정도로 조선인들의 로망이 되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창경원을 관람하는 순종과 순종비 등 왕실 기사를 자주 다루었다. 왕가가 인정한 ‘새로운 문명의 상징’이 되었고 한없이 평화롭게 살고 있다는 이미지로 전파됐다. 매주 목요일은 순종이 창경원을 산책 관람하는 날이어서 휴장했다.

 

순종의 동정은 언론을 통해서 알려졌다. 순종의 관람 모습을 동물원의 동물 처럼 투명하게 보이게 한다는 프로젝트였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선전도구로 이용했다. 일제가 옛 황실을 잘 대우해주고 있는 것 처럼 외국인들과 식민지인들에게 보여주는 유효한 수단이었다. 일본의 국화인 벚꽃을 대규모로 식재했다. 1918년 부터는 밤 벚꽃놀이(야앵)가 크게 유행했다. 지방에서 온 구경꾼들은 볼거리가 났다고 선전을 했다. 

 

“모두 마음이 들떠서 야앵! 야앵! 말하느니 야앵이요. 가느니 야앵이라. 분을 한껏 바르고 향수를 뿌린 모던걸에게 장난을 걸 때 양복 친구들의 시선은 야한 곳으로 혹은 젊은 여자들의 다리에 꽂혔다”(별건곤. 개벽에서 만든 취미 잡지)

 

“정문을 들어서면서 막바로 보이는 잔디밭광장은 주위를 삑 둘른 벚꽃의 하얀 울타리에 더 한층 흥을 돋아주나 이 안에 머물으는 자 별로 볼 수 없다. 다만 밤벚꽃의 짦은 시간을 흥에 겨워 뛰놀자는 풍류객들이 삐루(맥주)와 월계관을 밀수입하야 ‘부어라 먹자’하며 창경원이 좁다 하고 떠든다”(동아일보 1935.4.12)

 

아예 밤벚꽃 놀이를 제목으로 한 소설(김유정. 야앵)도 등장했다. 이미 세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1910년 경희궁 터에는 일본인 2세들을 위해 중학교(경성중학교.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건립되었다. 경희궁은 경복궁의 동궐인 창덕궁 창경궁과 함께 경복궁의 서궁으로 불리울 정도로 위상이 있었다. 경희궁은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조달을 하다 보니 90%의 건물이 없어졌는데  일본인학교가 들어서면서 형체가 모두 사라지다 시피 했다. 지금은 서울시교육청 서울역사박물관이 있는 자리이다. 일제는 1933년 덕수궁도 궁역을 축소하고 중심부를 제외한 대부분 전각을 철거하고 중앙공원으로 개조했다. 이제 남은 것은 조선의 정궁, 경복궁이었다.

 

일제는 1911년 5월 병합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조산왕조 재산을 관리하는 이왕직에게서 경복궁 전체에 대한 관리권도 인도받았다. 일제는 남산과 용사의 총독부 청사가 공간이 부족하여 청사를 신축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는데 경복궁을 염두에 두었다. 조선을 심리적 문화적 압도하는 데에는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적합했다.

 

조선왕조는 끝났고 새시대가 도래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한 전제 작업으로 1915년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 병합 5주년을 기념한 전시회에 경복궁 안의 72,000평 부지가 사용되었다. 500동의 건물이 철거되었다. 51일 동안 불야성을 이룬 공진회를 116만여명이 관람했다. 

 

권번(기생조합 겸 기예학교) 기생들도 관람 겸 흥행을 위해 동원되었다. 당시 기생은 인기 스타였다. 전국의 농민들도 동원되어 관람했다. 공진회야 말로 조선의 낡은 정치와 일제의 새 정치를 대조하는 이벤트였다고 조선휘보(1915.10)는 분석했다. 대성공이었다. 여론을 등에 업고 작업에 속도를 가해 1926년에 신청사를 건립했다. 1927년에 광화문을 해체했다. 경복궁 후원 경무대 자리에 총독관저(경무대-청와대)도 건축했다. 1926년에는 경운궁 앞에 경성부청사(현 서울도서관)를 건설했다.

 

이에 앞서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가 1907년 한성을 방문하게 된다. 훗날 다이쇼 천황으로 불린 인물이다.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한지 얼마 안되는 시점이었다. 위세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행위였다. 엄연히 조선의 황제가 있는데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한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했다.

 

1905년 조선군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남대문을 대포로 부수려고 했던 일이 있다. 이번에는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렸다. 이것이 출발이 되어 한양도성의 성곽은 조선신궁을  건축하는데 동원되었다. 성곽은 폐허가 되었다. 서대문 돈의문등 대문이 없어지고 문화재는 반출되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왕평(본명 이응호)가 작사하고 가수 이애리수가 부른 노래, 황성옛터는 1932년 4월 레코드로 출반되었다.  5만장이라는 판매기록을 남겼다. 황성은 황제가 머물렀던 수도의 성을 의미한다. 망국의 서러움을 달래주는 저항가요가 급속히 퍼지자 일제는 금지곡 리스트에 올렸다. 금지곡이 되자 더 많이 퍼졌다.

 

“나라 잃은 시대, 나는 민족 저항의 노래인 황성옛터 한 곡으로 겨레의 영혼에 불을 지폈다. 그 불이 꺼지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 그 불꽃은 꺼졌는가? 여전히 활활 타고 있는가?” (나는 왕평이다. 이동순. 도서출판 일송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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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도 한국전쟁 당시 폐허가 된 숭례문 주변 모습. [사진=연합뉴스 자료사진]

 

2.    신들의 교체

 

1910년 8월 병합과 함께 맨 처음 도시의 이름을 바꾸었다. 나라를 빼앗긴데 이어 수도의 이름을 빼앗는 것은 지배를 당하는 민족에게 큰 상처가 아닐 수 없다. 수도의 위상도 빼앗겼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수도였던 한성이 경기도에 편입되고 명칭도 경성(부)으로 바뀌었다. 고종황제가 중국, 일본과 마찬가지로 황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었던 원구단을 1914년에 헐어내고 총독부 철도호텔(조선호텔)을 건립했다. 황제는 일본 천황 하나 뿐이고 천황은 곧 신이었다. 이름과 지위를 박탈한데 이어 신의 자리도 빼앗았다.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 중의 하나인 남산은 조선의 성지였다. 백악산의 산신인 진국백과 남산의 산신인 목멱대왕에 대해서는 왕이 직접 제사를 드렸다. 남산 꼭대기(팔각정)에는 목멱대왕의 산신당, 즉 목멱신사가 차려져 있었다. 조선왕조의 국사 무학대사의 위패를 안치하면서 국사당이라고 불리웠던 사당이라고 해서 국사당이라고 했다.

 

이런 신성한 곳에 일제는 지배기구를 두었다. 군사지리학적으로도 한양을 내려보고 있어서 가치가 높기도 했다. 1905년에 일제는 조선신궁 일대의 일본인 거류지역인 왜성대(倭城臺.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와 군대의 주둔지에서 유래)에 통감부(훗날 총독부)를 세웠다. 총독 관저, 헌병대 사령부등 지배기구의 핵심이 함께 포진했다.

 

북쪽 기슭 예장동 일대에 황대신궁을 세웠는데, 후에 조선신궁이 되었다. 민족이 모시는 신은 민족의 운명과 미래를 보살피고, 개인의 내세를 보장한다. 그런데 내가 믿는 신이 쫓겨나고, 신을 모시는 신사 자리도 빼앗기면 백성들이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지는 고통을 겪게 된다. 신앙의 상징을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천황을 모시고 참배까지 하라고 했다.

 

‘조선을 지배하는 상징지리의 정치적 작업’(다시, 서울문화를 이야기하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으로 조선신궁을 성역화했다.  동시에 조선의 국가 기운을 꺾으려는 의도로 1916년에 남산 전체를 공원화했다. 공원화는 원래 유럽에서 도시화가 가져오는 문제를 보완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되었다. 일제는 조선의 상징과 이미지를 격하시키기 위한 수단으로도 사용하였다. 일제는 1926년 국사당을 없애려 했으나 남산의 산신령이 갖는 힘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으로 인해 이를 파괴하지 못하고 인왕산 선바위 근처로 옮겼다고 한다.

 

남산의 동쪽도 유린했다. 고종황제는 을미사변 때 순국한 대신과 장병의 충혼을 제사하는 장충단(충성을 장려하는 제단)을 만들었다. 1900년의 일이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복수를 하여 원수를 갚기 전에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원한에 사무쳐 있었다.

 

장충단 부지는 남산 동북쪽 자락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국립극장, 반얀트리 호텔(옛 타워호텔), 남산 자유센터, 그리고 신라호텔과 장충체육관까지 아우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지금은 장충단 비석이 흔적으로 남아 있는데 전면의 장충단 글씨는 황태자였던 순종이 썼고, 뒷면의 비문은 육군부장 민영환이 썼다. 항일을 상징하는 장소로서 동작동 국립묘지 생기기 이전에 최초의 현충원 역할을 했다. 

 

1919년 조선총독부는 장충단 자리를 공원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32년에 공원 동쪽에 조선을 침략하는데 앞장 선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용도로 박문사라는 사찰을 지었다.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왔다. 1909년 10월26일 안중근의사가 조선 침략의 첨병 이토를 저격한 지 23년이 되는 1932년에 완공했다. 박문사 건축에는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을 사용했으며,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이전하여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의 유산을 골고루 뜯어내 조선에게는 침략자이고 일본에게는 애국자인 그의 신사를 조성했다.

 

3.   종묘와 사직을 위협하다

 

조선이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면서 가장 먼저 지은 것이 종묘다. 종묘는 죽은 왕들의 혼이 머무르는 정원이다. 죽은 왕의 몸은 왕릉에 묻히지만 혼은 종묘의 위폐에 모셔진다. 신주를 모시는 이곳은 왕가의 상징이자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종묘의 주인은 승하한 임금의 혼령을 상징하는 신위였다.

 

위패라고 불리는 신위는 죽은 자의 상징물로서 존재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왕릉이다. 조선은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채택했으나 당시 백성은 물론 사대부에게도 낯설었다. 왕실이 앞장서서 성리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고 그래서 왕실의 권위도 드높여야 했다. 효가 나라의 기본이고 충의 이념적 근원인데 왕실이 나서서 효와 충을 솔선수범했다. 

 

조선신궁이 있는데 종묘가 따로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거슬리는 일이다. 일제는 광화문에서 안국동 돈화문 총독부의원 남부 중앙시험소(방통대 역사관)를 잇는 북부횡단도로를 개설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도로가 아니었던 곳, 도로여서는 안되는 곳에 신작로를 만드는 작업이다.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관통하는 길이다.

 

총독부 토목부가 1922년7월 종묘 경내의 도로예정선을 측량하고 이를 표시하는 침목을 설치하자 순종이 놀랐다. 창덕궁에 머물면서 종묘를 참배하는 일이 국왕으로서 거의 유일한 공무였던 순종은 처음으로 저항을 표시했다. 효심이 깊은 순종은 차라리 창덕궁을 침범하는 편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표명한다. 나약한 옛 황실을 대신해서 전주 이씨 종약소가 종묘는 신성한 곳이니 침범할 수 없다고 항의를 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미 일제가 제공하는 공원의 효능감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패망한 왕조의 왕들의 영혼의 안식처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혹자는 말하리라. 종묘는 지존한 곳이니 일반 민중을 위하야 지대를 개방함은 그 숭엄을 범함이라고…그러나 이것도 시세의 문제이다. 종묘사직이 계견불문처(鷄犬不聞處 닭이나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만 그 숭엄을 보장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이다. 민중을 가까이 함으로써 민중과 요할 기회가 많음으로써 종묘의 존재가 더욱 의의가 있을 것이나…사직대가 사직공원이 되고 장충단이 장충단공원이 된 금일에 바늘 꼽기도 어려운 인구 조밀한 광활한 지역을 겸한 종묘지대는 경성부민의 보건과 도시미를 위하야 한걸음 더 나아가서 민중의 존숭심을 다시 환기키 위하여 공원으로 공개될 것은 금후의 조선 종세가 여하히 변할지라도 필연코 닥쳐올 운명이라고 아니 볼 수 없다” (1929년 6월 동아일보 사설) 순종은 1926년에 승하했고 결국 1932년 종묘와 창덕궁을 단절하는 도로가 개통되었다.

 

일제가 상징과 이미지를 파괴하는 목적이 한양의 풍수를 단맥하기 위한 것이라는 학설이 있다. 일제의 다양한 도시 개발사업의 목적이 조선의 지맥을 의도적으로 절단하고 훼손하여 우리 민족의 맥을 끊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풍수단맥설은 조선왕조 정도 당시 한양 도성의 조영(건설) 원리를 단일한 변수로 설명하는 전제 위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한양을 수도로 정할 때에는풍수만을 본 것이 아니라 지정학적 위치 등 여러가지가 고려되었다. 따라서 풍수를 단맥한다고 해서 이 나라가 영원히 일어설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북악선과 조선통독부, 경성부를 새의 시각에서 내려다 보면 대일본(大日本)이라는 글자가 된다며 이 역시 조선의 기를 꺾기 위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을 모신 제단이 있는 장소로 종묘와 함께 국가의 상징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사직단의 위상은 종묘 보다 높다. 종묘가 왕실을 상징한다면 사직단은 국가를 지탱하는 근본인 땅과 곡식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사직단의 규모를 축소하고 주변에 도로를 내고 1924년에 이를 공원으로 만들었다.

 

4.   북촌 대 남촌의 대립

 

경성은 조선의 지배층이 터를 잡고 있는 북촌과 일본 식민의 거점인 청계천 이남의 을지로 충무로 남산의 남촌으로 갈렸다.  원래 한성은 광화문 일대의 정치 중심과 종로의 경제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남산 일대는 가난한 선비, 딸깍발이들의 마을이었으며 동대문 쪽은 빈민들이 사는 곳이었다. 

 

일제가 시내가 내려 보이는 남산에 지배기구를 두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이 그 하부지역에 정주를 하게 되었다. 황금정(을지로입구) 진고개(충무로) 명동일대가 그들의 거주지였다. 이 지역이 구 경제 중심을 대체하는 새로운 경제 중심으로 부상했다.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앞에는 최초의 계획광장이 조성되었다. 미츠코시 경성점을 비롯하여 일본의 백화점 4개가 포진해 있었다. 엘리베이커 에스컬레이터와 온갖 상품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1933년 종합잡지 ‘삼천리’ 기사를 보면 당시 경성인구가 30만명인데 미츠코시백화점  방문자가 12만6천명에 달했다. (숫자는 과장되었을 수 있다) 아침에 들어가면 저녁에 나올 정도로 볼 것이 많았다며 사람들이 찬탄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핫플레이스가 따로 없었다. “중심을 대한제국의 정궁인 경운궁 앞 광장에서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대체하는 공간의 권력탈취”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염복규지음 이데아)가 이뤄졌다.

 

“남산 비탈에 단조롭고 수수한 백색목조의 일본공사관 건물이 위치하고 그 앞쪽에 근 5,000명이 살고 있는 일본인 거류지가 있다. 다방도 있고 극장도 있으며 그밖에 각종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그 곳은 조선인 거리와는 대조적으로 점포와 주택이 들어선 가로가 깨끗하고 말끔하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인들 허리띠를 두른 길다란 일본옷을 입은 남자들이 모두 나막신을 신은 채 일본에서와 같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다 단정한 군인들과 헌병, 그리고 스마트한 칼을 찬 장교들, 그들은 시간을 맞추어 거류지의 호위병을 교대시키고 있다. 이러한 조심은 실제로 필요하다. 뿌리깊게 강한 조선인의 배일감정 때문이다.” 비숍이 ‘한국과 그 이웃의 나라들’ (1898)에서 본 남촌의 풍경이다. 반면 일본인이 그린 북촌은 가난하면서 적대적으로 남아있었다.

 

“경성에서 살면서 가지(소설속 등장인물)는 여간해서 종로 부근은 걷지 않았다. 그곳은 순순한 조선인의 거리로, 혼자 걷고 있으면 왠지 아주 불안정한 감정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왠지 기분이 나빴다. 좁은 구역에서 한 걸음 벗어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조선 아이들과 싸움이 벌어질까 두려워 항상 불안감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민지 지배는 국가 차원의 일로 아이들의 세계는 조선인의 천하였다. 우리는 늘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 나오는 그 종로였다. 일본 상권이 아무리 설쳐대도 감히 넘볼 수 없던 민족의 자존심 종로였다. 경성에서 태어난 일본인 소설사 카지야마 도시유키는 ‘경성이여 안녕’등 9권의 식민지 조선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썼다. 경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일본인 작가 혼다 야스히루가 경험했던 종로도 비슷하다. 

 

북촌과 남촌 사이를 갈라놓은 청계천은 골칫거리이자 또 다른 대립의 불씨였다. 한성에서 청계천은 절대적 수맥이다. 24개의 다리가 놓여있는 청계천은 잦은 범람으로 사고도 많았고 불만도 컸다. 총독부가 한강 주변 정비에는 예산을 투입하면서 청계천 복개를 늦추는 것에 대한 항의의 목소리가 나왔다. 경성부 협의회에 참가하고 있는 조선인 한만희의 발언을 보자. 

 

“당국이 다른 도로를 미장하기에만 몰두하고 각일각으로 위험을 느끼게 되는 이곳에 경비 없다는 당황스러운 이유만 내세우는데 대하여 불평의 기운이 충만하였다. 경성을 명랑도시로 만들기 위해서 시급히 개수해야 할 것이 청계천인데…청계천이 황금정 이남 남촌에 있다고 하면 부 당국자는 어떻게든지 이미 처단했을 것이다. 남촌 중심의 경성부의 처사로 내선인촌(조선인촌)의 차별문제로 청계천을 방임하는 것이 과연 말이나 되는가. 그것은 청계천이 북쪽에 있는 까닭이 아닌가.”

 

심훈은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잘있거라 나의 서울이여’ 라는 시는 남겼다.

 

“오오 잘 있거라! 저주받은 도시여,/ <폼페이>같이 폭삭 파묻히지도 못하고,/ 지진때 동경처럼 활활 타 보지도 못한/ 꺼풀만 남은 도시여, 나의 서울이여!/ 성벽은 토막이 나고 문루는 헐려/ <해태>조차 주인 잃은 궁전을 지키지 못하며/ 반 천년이나 네 품속에 자라난 백성들은/ 산으로 기어오르고 두더지처럼 토막(土幕) 속을 파고들거니/ 이제 젊은 사람까지 등을 밀려 너를 버리고 가는구나?// 남산아 잘 있거라, 한강아 너도 잘 있거라/ 너희만은 옛모양을 길이길이 지켜다오!/ 그러나 이 길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겠느냐/ 내 눈물이 마지막 너를 조상하는 눈물이겠느냐/ 오오 빈사(瀕死)의 도시, 나의 서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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