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위사업 계약법, 별도 제정이나 기존 법령 보완 등 ‘형식’보다 업체가 겪는 ‘실질적 문제 해소’가 더 중요
한국의 방위산업이 새로운 활로를 찾으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방위사업청 또한 방위산업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지속적인 제도 개선과 함께 법규 제·개정을 추진 중이다. 그럼에도 방위사업 전반에 다양한 문제들이 작용해 산업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뉴스투데이는 이런 문제들을 심층 진단하는 [방산 이슈 진단]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뉴스투데이=김한경 안보전문기자] 방위사업청(이하 방사청)이 방산업계의 염원을 담아 야심차게 추진하던 ‘방위사업계약법 제정’이 여·야 합의를 거쳐 의원입법 형태로 제기됐으나, 기획재정부(이하 기재부)의 국가계약법 형해화(形骸化) 등 반대 주장에 부딪혀 난관에 봉착한 상태다. 대통령실에서도 기재부와 방사청의 의견을 들었지만 뾰족한 수가 없는 모양이다. 방산업계는 수출 진작을 위해서라도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나서길 기대하는 분위기다.
방위사업 즉 국가안보산업 분야는 세계적으로 보호·육성이 허용되는 유일한 영역이다. 모든 주권국가는 자주국방을 지향하는 관계로 WTO 정부조달협정이나 국가 간 FTA 체결에서 국가안보산업 분야를 시장개방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1970년대부터 ‘방위산업에 관한 특별조치법’ 등을 통해 국방조달 계약 특례를 인정해 왔으며, 이는 현행 방위사업법령과 국가계약법령에도 반영돼 있다.
■ 방사청, 방위산업 경쟁력 강화 위해 방위사업계약법 제정 추진
2006년 방사청이 출범하면서 방위산업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국방획득관리규정을 토대로 방위사업법이 제정된 이후 방위사업법령은 방위사업의 특수성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채 시장경제원리가 무분별하게 도입됐다. 게다가 방산비리 프레임의 여파로 방위사업 진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과 비용 부담을 업체들에게 전가하는 분위기가 만연돼 방위산업의 경쟁력 강화는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일례로, 무기체계 품질을 강조하면서도 최저가 입찰제도를 시행하고 있고, 실제 발생한 원가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데다, 연구개발 업체와 계약하면서 가격을 제한해 계약금액을 초과하는 비용은 업체가 부담하게 만든다. 또 체계종합업체가 협력업체의 잘못까지 책임져야 하고, 열심히 개발해도 군 요구성능에 도달하지 못하면 부정당업자 제재 등의 처벌이 기다린다. 게다가 분쟁을 심의·조정할 기구도 없어 소송이 비일비재하다.
이에 방사청은 방위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방위사업계약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기재부는 국가계약법이 있음에도 별도의 계약법 제정은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는 국가의 계약체계를 형해화하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필요하면 기존 법령을 개정하는 방법으로 추진하라는 입장이며, 제기된 법안의 내용이 과도한 계약기준 완화, 방산비리 소지 등 국가계약 원칙을 훼손할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하고 있다.
■ 기재부, 반대 주장 펼치나 해외사례와 국내 현실 보면 설득력 떨어져
하지만 방위사업 계약은 지금도 국가계약법의 예외로 인정되고 있고 세계 모든 나라가 국가안보산업에 대해서는 다른 원칙과 기준을 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방위사업계약법 제정이 국가계약체계를 형해화한다는 기재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는 연방조달규정(FAR)과는 별도로 국방조달규정(DFAR)을 두고 있는 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방위사업법 시행 이후 방산계약제도는 규제와 처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돼왔다. 방사청 ‘계약특수조건’도 업체의 계약상 이익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개정돼왔고, 수사 및 감사기관의 개입과 관여가 일상화돼 정상적인 사업추진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경직된 기준을 합리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내용을 담은 이번 법안이 국가계약제도를 훼손한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더구나 방사청 직원들이 감사와 수사를 의식해 계약이행 간 발생하는 위험과 비용 부담을 계약업체에 일방적으로 전가함에 따라 최근 수년간 방사청을 상대로 한 법적 소송이 대폭 증가했다. 정부 패소 판결로 이어지는 이런 불필요한 소송을 줄이고 무기체계의 적기 전력화를 위해 업체 책임이 없는 사유로 정상적 계약이행이 어려울 때 엄격한 요건과 절차를 거쳐 계약 변경을 허용하는 것이 계약기준을 완화해 특혜를 주는 것은 아니다.
이 분야에 정통한 정원 변호사(법무법인 율촌)는 “방위사업법상 계약특례 규정에 입각한 하위법령의 개정을 통해 방위사업의 특수성과 방위산업 보호·육성을 도모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면서도 “방위사업법에는 방위력개선사업의 원칙과 방산물자, 수출허가 등의 내용만 담고 계약법 별도 제정을 통해 방산원가 및 계약의 원칙과 기준을 분명히 정립하는 것이 법치주의 원칙에 부합한 실효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형식보다 법안 내용 적절성 살피고 방사청 계약특수조건도 개정해야
일부 전문가들은 방사청이 기존 법령의 실제 적용에서 문제 해결 방안을 찾는 시도도 하지 않으면서 계약법 제정만 밀어붙이는 것이 과연 타당하냐는 주장도 한다. 또 법령 제·개정이 어떤 방식으로 추진되더라도 현행 방사청 계약특수조건을 전면 개정하고, 방사청 직원들이 적극 행정을 할 수 있도록 감독 기능을 줄이고 책임을 분산하는 등 업무 분위기를 쇄신하는 노력이 수반돼야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이와 같은 주장과 의견들은 법령 제·개정의 ‘형식’보다는 제기된 법안에 담긴 ‘내용’이 방산업체가 계약 체결과 이행 과정에서 겪는 실질적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미 여야 합의로 의원입법이 추진된 상태다. 이제 다시 형식 때문에 원점으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한국의 방산수출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난 이 시점을 살리지 못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수 있다.
따라서 기재부도 일부 주장이 일리는 있으나 세계 4대 방산수출 강국을 지향하는 정부와 방산업계가 처한 현실을 이해하고 문제 해소 관점에서 현재 제기된 법안의 내용이 적절한지 잘 살펴주길 기대한다. 방사청 또한 법안 보완을 거친 계약법 제정을 시작으로 시행령 및 시행규칙을 제대로 만들고 방사청 계약특수조건까지 개정하는 등 끝까지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기재부와 방사청의 진정한 소통과 협력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