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취업 보장되는 삼성전자와 고려대의 계약학과가 좁은 문이 된 까닭
[뉴스투데이=모도원 기자] 최근 주요 대기업과 주요 국내대학이 연계해 차세대 산업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는 ‘계약학과’가 증가하고 있지만, 반길 일만은 아니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계약학과 만으로 인력을 수급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업이 계약학과를 만드는 것은 역설적으로 대학이 산업구조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연구 및 교육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대학의 구조적 문제 해결이 우선이라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다.
삼성전자가 지난 17일 고려대와 함께 '차세대통신학과'를 신설한다고 발표하는 등 계약학과 설립은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지난 2006년 삼성전자가 성균관대와 함께 '반도체시스템공학과'를 개설한 게 시초로 꼽힌다.
이후 SK하이닉스와 고려대가 2021년 '반도체공학과'를 각각 신설했다. 연세대, 카이스트, 포스텍, 경북대 등도 삼성전자와 손잡고 계약학과를 설치했다. 현재 개설되거나 개설 예정인 계약학과는 10개 정도이다.
■ 한요섭 KDI연구원, "계약학과 장점 있지만, 수도권 대학 정원 규제 푸는 게 해법"
계약학과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특정 기업으로 취업이 보장되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등 수요가 급증한 차세대 산업 분야에서 충분한 인력이 공급되지 못하자 기업이 대학과 계약을 맺어 학과를 개설하고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다.
수도권 대학이 정권 규제를 받아 산업계에서 필요로 하는 만큼의 인력을 양성하기 어렵다는 게 학계의 입장이다.
한요셉 한국개발연구원(KDI) 사회정책부 연구원은 19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계약학과는 취업이라는 부분에서 확실한 장점이 있지만, 현재 가장 큰 문제는 대학의 정원 규제다”라며 “수도권 대학 정원은 지방에서 민감하게 여겨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교육부 입장에서도 크게 바꾸기 어렵다”고 말했다.
현재 수도권 소재 대학은 수도권정비계획법에 따라 정원 규제를 받고 있다. 특정 지역에 인구가 과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도권 대학은 정원의 총량이 제한돼 있다. 다른 학과에서 결원이 발생할 경우 같은 비율의 인원을 충원할 수 있을 뿐 전체적인 정원 총량을 확대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일종의 궁여지책이 대기업이 주도하는 계약학과라고 볼 수 있다. 수도권 대학 정원 규제를 푸는게 4차산업혁명 고도화에 따른 대학의 인재양성 기능을 정상화하는 방안이라는 게 한 연구원의 주장인 셈이다.
한 연구원에 따르면, 계약학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조기취업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재교육형이다. 조기취업형은 학교와 산업체가 계약을 맺어서 교육을 이수한 학생이 산업체로 취업하는 방식이다. 재교육형은 산업체에서 학교로 위탁교육을 실시하는 방법이다. 전자가 학부의 계약학과이고 후자가 대학원의 계약학과이다.
학생 총량을 봤을 때, 재교육형이 훨씬 많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이 개설한 10개의 계약학과는 조기취업형이다. "학생 총량을 봤을 때 재교육형이 훨씬 많다"는 게 한 연구원의 설명이다.
한 연구원은 “현재 계약학과는 대학원을 중심으로 증설되고 있지만, 일반 학부 단계에서는 도입이 어렵다”며 “계약학과에 입학한다 하더라도 사전에 충분한 정보와 학생 본인 스스로의 적성을 파악하지 않을 경우 중도 이탈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학부 단계에서 도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고 밝혔다.
■ 곽이구 전주대 교수, "계약학과 운영위한 재원 확보가 어려워" 지적 / 정부는 50%이상 장학금을 정원 외 계약학과 개설 조건으로 내걸어, 대학의 '등록금 장사' 방지?
조기취업형 계약학과 즉 학부의 계약학과를 확대하는 데 또 다른 걸림돌이 있다. 바로 재정문제이다. 정부는 정원 외 계약학과 설립을 허용하는 대신에 등록금의 50% 이상을 장학금으로 지원하도록 했다. 대학이 정원 외 계약학과를 마구잡이식으로 늘려서 '등록금 장사'를 하는 부작용을 사전방지하기 위한 목적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 조항은 현실적으로 계약학과 증설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대학으로서는 계약학과 신설로 학생들이 늘어난다 해도 학생 수에 비례한 추가적인 교수진의 증원을 하기 어려운 것이다.
곽이구 전주대 기계자동차공학과 교수는 "계약학과 운영에 필요한 교수는 기존의 교수진과 계약학과의 전공을 최대한 맞춰서 활용한다"며 "부족한 측면들은 산업계에 직접 종사하는 분들을 초빙해 대체하고있다"고 말했다.
곽 교수는 "계약학과를 운영하기 위해선 충분한 재원이 필요한데 운영 규정상 계약학과의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50% 이상 받을 수 없다"며 "계약학과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재원은 정부의 지원이나 기업으로부터 받아야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계약학과는 어떻게 기획을 하고 어떻게 구조를 짜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지 교수진이 부족한 상황은 아니다"고 말했다.
■ 대안은 뭘까?...자율전공·무전공제 등 학생의 전공 선택권 확대 필요해
이 같은 수도권 대학 정원 규제와 계약학과 설치에 대한 제약을 해소할 수 없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학계는 학과별 구별을 낮추고 전공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도록 구조를 개편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실제 여러 대학 기관에서 자율전공학부나 무전공제 혹은 스스로가 학과를 설계하는 학생 설계 전공 등 유연성을 높인 교육 제도가 꾸준히 관측되고 있다.
포스텍은 2018년도부터 신입생 전원을 ‘무학과 무전공제’로 선발하고 있다. 학생들은 원하는 학과에 자율적으로 진학할 수 있으며 전과도 자유롭다. KAIST 역시 전과에 제한이 없고 1학년 말에 학과를 선택하는 시스템이다.
한 연구원은 “계약학과를 지역 단위로 여러 개 설치하거나 학생들이 전공을 계속 자유롭게 바꾸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며 “고등교육의 유연성을 높이는 기조는 2000년대부터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