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억 규모 신속시범획득, 사업 속도와 전력화 방법에 성패 달려
한국의 방위산업이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방위사업청은 지난해부터 방위산업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지속적인 제도 개선과 함께 법규 제·개정도 추진 중이다. 그럼에도 방위사업 전반에 다양한 문제들이 작용해 산업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뉴스투데이는 이런 문제들을 심층적으로 진단하는 [방산 이슈 진단]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편집자>
[뉴스투데이=김한경 안보전문기자] 방위사업청은 기존의 무기체계 획득제도가 사회의 빠른 기술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문제를 인식하고 지난해 ‘신속시범획득’ 제도를 만들었다. 이 제도는 창의적 신기술이 적용된 민간 제품을 구매하여 군에서 시범 운용한 후 소요 결정과 연결하여 후속 물량을 신속히 전력화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사업 예산도 제품 구매 및 시범 운용을 지원하기 위해 올해 300억원이 반영되었고, 향후 전력화 물량 획득을 위한 예산은 별도로 편성할 계획이다. 4차 산업혁명 기술(인공지능, 무인, 드론 등) 등 14개 기술혁신 분야가 사업 대상이며, 운영 환경에서 성능 시연이 가능한 제품이 존재해야 한다. 지난 1월 신속시범획득 사업 과제 공모가 시작됐다.
사업 절차는 ① 사업 과제 공모, ② 입찰공고 및 낙찰자 결정, ③ 군 시범 운용, ④ 소요 결정 후 후속사업 추진 등 4단계로 진행된다. 사업 적절성, 기술성, 군 적용성 등을 평가하여 사업자를 선정한다. 혹서·혹한기를 포함한 3계절(약 9개월) 간 시범 운용하며, 후속사업은 긴급 또는 중기 소요로 반영해 추진할 예정이다.
이 사업은 지난 2월 3주차까지 101개 과제가 공모됐다. 이후 방사청 실무자가 서류 검토로 20여개 과제를 선정한 후 사업평가심의회에서 수개 과제가 선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업체를 방문해 제품 수준을 조사한 다음 방사청 차장이 위원장인 방위사업기획·관리 분과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과제를 결정할 예정이다.
과제가 결정되면 과제별로 다시 입찰공고가 나오고 공모에 응하지 않은 업체들도 제품만 있으면 입찰에 응할 수 있으며, 요구 성능을 충족하면 최저가로 입찰한 업체가 선정된다. 선정된 업체는 제품 납품 및 군 시범 운용을 지원하며, 전력화를 위한 후속사업은 어떤 방법으로 추진할지 아직 결정된 내용이 없는 상태이다.
■ 4차 산업혁명 신기술만 적용, 배제된 신기술 별도의 제도 필요
올해 처음으로 시행 중인 신속시범획득 제도는 이미 몇 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이 제도는 무기체계의 신속 획득을 위해 도입된 신개념기술시범(ACTD) 사업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해 기획재정부의 지적을 받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마련된 것으로 알려진다. 물론 검토 과정에서 4차 산업혁명 신기술의 신속한 적용도 고려된 부분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방사청은 이 제도를 4차 산업혁명 기반 신기술로 명시된 14개 분야에만 적용하고 있다. 따라서 14개 분야에 포함되지 않는 신기술의 무기체계는 별도의 신속획득 제도가 필요한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미국처럼 다양한 신속획득 제도가 없는 현실에서 신기술은 모두 이 제도의 적용을 받게 지원 분야를 넓히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 중견업체 임원은 “업체가 군의 소요를 예상하고 미리 개발한 제품도 군이 필요로 하면 신속히 도입할 수 있는 제도나 획득 방법이 강구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강은호 방사청 차장은 지난해 10월 K-디펜스 포럼에서 기존 ACTD 절차를 간소화하면서 신속획득제도 개선과 연계한 ‘융합형 ACTD’ 제도를 방위산업 혁신방향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 시범 운용 끝날 때 소요 결정…3년 이내 초도 양산 되어야
또한 이 제도가 무기체계의 신속한 획득이란 원래 취지에 부합하려면 사업 속도가 빨라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소요 결정이 빨라야 한다. 전문가들은 “과제가 결정되고 입찰공고가 나올 때 제안요청서(RFP)가 작전운용성능(ROC)과 유사한 내용을 담아야 하고, 소요제기 검토도 이때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시범 운용이 끝날 때쯤 소요 결정이 가능하다.
이렇게 진행해도 전력화를 위한 초도 양산까지 최소한 3년 가까이 걸린다. 만약 단계별로 진행되면 최소 4∼5년 이상 걸려 ACTD의 실패를 다시 겪을 가능성이 있다. 한 전문가는 “미 국방부의 국방혁신단(DIU)은 업체와 접촉 후 90일 이내 계약하며, 24개월 이내 시제품 제작과 전투실험 등을 끝내고 생산에 들어간다”면서 “업체의 요구를 적극 수용한 미군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8월 미국의 미래사령부를 방문했던 신인호 육군교육사 전투발전부장(육군 소장)도 “미국조차 기존 획득방식에 한계를 느꼈고, 사회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얼마나 빨리 받아들이느냐가 관건”이었다며 “미래사령부는 전투수행개념이 만들어지면 시제품을 개발하고 전투실험을 통과할 경우 업체와 바로 계약해 생산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한 세미나에서 말했다.
■ 시범 운용 후 군 요구 충족되면 후속사업 ‘수의계약’ 가능해야
이 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시범 운용 후 전력화를 위한 후속사업 추진 방법이 결정되지 않은 것이다. 만일 A사 제품으로 시범 운용을 해서 만족한 결과가 나왔을 경우 소요가 결정되면 전력화는 A사에 우선권을 주는 것이 합당하다. 그래야 업체도 최선을 다해 군 요구에 부응하고 기술 국산화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 때 다시 경쟁을 시키면 이 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와는 달리, 지난 2018년 기획재정부는 국가계약법 시행령 제26조 제1항에 따라 우수연구개발 혁신제품에 대한 수의계약 근거를 기재부 계약예규에 반영했다. 또 과기정통부와 산자부도 우수연구개발 혁신제품을 선정해 수의계약으로 구매하는 것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방사청도 이러한 정책 기조와 제도적 근거를 활용하여 수의계약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이제 ACTD 사업처럼 시범 운용만 하고 후속사업이 보장되지 않거나 작전운용성능을 추가하여 개발시키는 방식은 더 이상 존재해선 안 된다. 방사청이 신속시범획득 제도를 마련하게 된 원래 취지를 잘 살펴서 군이 정말 필요로 하고 제품 개발업체가 원하면서 기술 국산화도 앞당길 수 있는 훌륭한 제도로 발전시켜 나아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