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여성 임원’ 매년 확대…그럼에도 12년째 OECD ‘최하위’
견고하고 단단한 한국의 유리천장에도 조금씩 금이 가고 있다. 국내 100대 기업 임원 여성 비율은 2019년 3.5%에서 지난해 6%로 지속 증가하는 추세다. 여성의 교육수준 향상과 경제활동 참여가 증가하면서 기업 내 여성의 기여도와 역할이 신장하는 흐름이다. 하지만 기업별, 업종별 수준이 상이할 뿐만 아니라 글로벌 수준과 비교하면 한국의 유리천장은 여전히 두껍고 단단하다는 지적도 있다. <뉴스투데이>는 국내 주요 기업들의 여성임원 현황과 실태를 점검해 보는 ‘2024 뉴투 유리천장 보고서’ 시리즈를 기획했다. <편집자주>
[뉴스투데이=전소영 기자] 멀지 않은 과거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대표되는 여성 기업인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정유경 신세계 백화점부문 총괄사장, 임세령 대상홀딩스 부회장 등 오너일가 인물들이었다.
이는 가업을 이어받지 않고서는 여성의 임원 승진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는 지표로 통했다.
실제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은 전 세계 주요국 가운데 여성이 임원으로 승진하기 가장 어려운 국가 중 하나였다.
2013년 미국의 기업지배구조 분석기관 GMI레이팅스는 45개국 대표기업 5977개사를 대상으로 이사회 내 여성임원 숫자를 조사한 바 있다.
당시 한국의 조사 대상은 삼성전자, 현대차 등 106개 기업으로 이들의 여성임원 비율은 1.9%로 파악됐다. 조사 대상 국가 가운데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최근 국내 기업들에서는 여성 임원 기용이 꾸준하게 늘고 있다.
헤드헌팅 전문기업 ‘유니코써치’가 매출액 상위 100개 기업의 2023년 반기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전체 임원 7345명 중 여성은 439명으로, 6.0%를 차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5년간 국내 100대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2019년 3.5% △2020년 4.1% △2021년 4.8% △2022년 5.6% △2023년 6.0%로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또 올해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가 30대 그룹 내 295개 기업의 올해 1분기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에서도 사내외 이사 및 미등기 임원 1만1321명 가운데 여성 비중은 7.5%인 847명으로 집계됐다. 전년 동기 778명 대비 69명 늘었다.
이에 따라 오너일가가 아닌 여성 기업인의 활약상도 두드러진다.
예컨대 이영희 삼성전자 DX부문 글로벌마케팅센터장 사장은 2023년 정기 인사에서 삼성에서 오너가를 제외하고 최초로 사장 자리에 올랐다. 그는 입사 후 갤럭시 마케팅 성공 스토리를 구축해 브랜드 가치를 제고함으로써 삼성전자 스마트폰이 글로벌 점유율 1위를 기록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알려졌다.
네이버는 2022년 정기 인사에서 글로벌사업 전략·기획을 이끌던 최수연 글로벌사업지원 책임리더(중간 관리자급 임원)를 새 최고경영자(CEO)로 발탁했다. 1981년생으로 젊은 리더인 최 대표는 임기 2년차인 현재 과감한 해외기업 M&A를 통한 외연 확장과 수평적 사내 문화 정착 등 조직을 안정적으로 성장시키고 있다고 평가된다.
기업분석전문 ‘한국CXO연구소’의 오일선 소장은 <뉴스투데이>와 통화에서 “여성 임원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중간관리자 중 여성 임원으로 발탁될 수 있는 후보군이 그만큼 두터워졌고, 퇴직하지 않고 근속하는 여성이 많아졌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 같은 증가 추세의 배경은 2020년 2월 개정된 자본시장법이 대표적이다.
개정 자본시장법 제165조의20(이사회의 성별 구성에 관한 특례)에서는 최근 사업연도 말(2021년) 자산 2조원 이상 상장법인의 경우 이사회 이사 전원을 특정 성별로만 구성하지 못하도록 규정한다.
그간 다수 기업이 남성 이사만을 두고 있었지만 개정 자본시장법에 따라 강제로라도 최소 1명 이상의 여성 임원을 기용하는 효과를 낳았다.
거시적 관점에서 국내 기업 내 여성 임원 비중 확대 흐름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리더스인덱스에 따르면 여성 임원이 없는 계열사는 87곳(29.5%)으로, 여전히 남성 임원만 존재하는 기업도 10곳 중 3곳으로 적지 않다.
게다가 한국 대기업 여성 임원 비중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013년부터 매년 세계 여성의날을 기념해 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남녀 고등교육 격차 △남녀 소득격차 △여성의 노동 참여율 △고위직 여성 비율 △육아비용 △남녀 육아휴직 현황 등 지표를 반영해 유리천장 지수를 산정한다.
대부분의 지표에서 하위권을 나타낸 한국은 올해도 조사 대상에 포함된 29개국 가운데 29위를 기록하며 12년 연속 꼴찌 꼬리표를 달았다.
특히 기업 이사회의 여성 비율은 OECD 회원국 평균 32.5%를 기록하며 2013년 조사 시작 이래 처음으로 30%대를 돌파했으나, 한국은 16.3%로 평균치의 절반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출산·육아 지원 시스템의 한계가 낮은 여성 임원 비율과 무관하지 않다고 진단한다.
오일선 소장은 “우리 사회는 '여성이 출산과 육아로 회사를 관두면 지금까지의 인력 육성을 위해 투자한 비용이 아깝게 되니 남성 직원을 뽑을 수밖에 없다'는 의식이 여전히 팽배하다”며 “여성 인력을 많이 채용하고 이들이 출산과 육아 후 현업으로 복귀해 계속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김대종 세종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한국은 노동 생산성이 세계 꼴찌 수준이고, 여성 임원 비중도 상당히 낮은 편”이라며 “회사에 남을 수 있어야 임원 승진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데 출산·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이 많다 보니 현재로서는 여성 임원들이 많이 배출되기 어려운 구조다. 물론 과거보다는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선진국 대비 여전히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국가 제도의 허점에도 주목하며 기업뿐만 아니라 정부의 역할도 강조했다.
앞서 언급한 여성 임원 할당제의 경우도 의무 규정이다 보니 마지못해 1~2명 기용하는 사례가 상당수라는 지적이다. ‘구색 갖추기’식이 아닌 여성 할당 비율을 20~30%로 확대하는 등 실질적인 정책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실제 노르웨이, 독일,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등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이미 기업 이사회 구성에서 여성 비율을 30~40% 유지하고 있다. 또 유럽연합(EU)은 오는 2026년부터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비상임 이사의 40%, 전체 이사회의 33%를 여성으로 구성하는 제도를 의무적으로 시행하기로 했다.
오일선 소장은 “2004년 처음으로 국내에서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여성 임원 현황을 조사했을 때만 해도 13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수백명대로 증가했다”며 “지난 20여년간 한국의 유리천장은 더디지만, 조금씩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는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대대적인 변화는 최고경영자 한사람만의 의지로는 불가능하다. 정부와 기업이 함께 시스템화함으로써 기업 문화로 정착시켜야 한다. 그 과정에는 20∼30년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