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정무위원장을 지낸 3선 국회의원 출신 민병두 보험연수원장이 한국인에 대한 예리하고도 심층적인 분석을 담은 '민병두의 K-Sapience'를 연재합니다. 문화일보 워싱턴 특파원과 정치부장으로 필력을 떨쳤던 언론인이기도 한 민 원장은 K컬처와 K푸드로 세계인을 열광시키고 있는 한국인을 'K-Sapience'라고 규정하고 그 내밀한 세계를 종횡무진 그려낼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축구 한·일전은 민족혼을 불태우는 경기다. 스포츠가 전쟁이라면 축구는 그 중에서도 가장 전쟁에 가깝다. 심리적 연대를 형성하기가 용이하고 ‘우리’라는 결속감을 갖게 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거리 응원을 통해 느껴진 ‘우리’라는 연대감은 축구가 얼마나 위대한 스포츠인지를 확인하게 한다. 한국의 축구는 스포츠 민족주의의 중심이고 특히 한·일전은 가장 중심적인 한국인의 정서이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한국과 일본이 처음으로 역사적인 대결을 벌였다. 중국이 출전을 포기함에 따라 대한민국과 일본의 승자가 아시아 대표로 스위스행 티켓을 거머쥐게 되는 상황이었다. 전범국가 패전국가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보통국가가 되어 출전자격을 확보했다. 한국은 UN의 승인을 받아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두 나라의 경제 상황은 달랐다.
일본은 한국전쟁 3년 간 후방보급기지 역할을 하면서 전후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반면 한국은 휴전선이 고착되는 정전협정으로 국민들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기근과 전쟁과 인플레이션으로 국민생활은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이승만은 정부 출범 후 일본을 상대로 한 담화(1948.10.22)에서 우리는 과거를 잊으려고 한다며 정상적인 통상관계 수립을 희망했다. 일본이 이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주장(1949)하고 나서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북침통일을 외치는 이승만과 불편한 사이였다. 미국은 일본의 재건을 통해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와 대결한다는 방침을 세웠기 때문에 '한·일국교정상화'를 바랬다. 미국은 대일강화조약을 맺은 지 한 달 후에 1951년 10월 도쿄에 있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에서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 첫 예비교섭을 주선했다. 한·일 두 나라가 화해해야 반공전선이 튼튼해질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는 ‘안보는 미국, 경제는 일본’이라는 요시다 독트린을 만든 장본인이다. 일본은 1955년 부터 1971년 까지 당시로서는 세계 역사상 가장 높은 기적의 실질성장률을 기록했다. (1968년에는 독일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되었다) 요시다 시게루는 재일동포들을 ‘뱃속의 벌레’라며 이들에게 일본국적을 주지 않는 것이 회담의 목표라고 국회에서 공언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터졌다는 첫 보고를 받고 집안에 조상신을 모시는 제단 앞에서 “하늘이 내려주신 축복”이라며 감사해 했던 인물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요시다 발언에 불편한 이승만은 1952년1월18일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1953년 10월15일 제3차 한·일회담 때 일본 측 수석대표인 구보다 간이치로는 노골적으로 일본인들의 속마음을 드러냈다. “일본도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일본은 35년 동안 (한반도의) 산을 푸르게 바꾸었고 철도를 부설했고 논을 개간하고 많은 이익을 한국에 주었다”며 “결과적으로 일본의 36년 통치는 한국인에게 유리했다”고 주장했다. 일본인의 망언은 한국인들의 민족감정을 자극했다. 축구 한·일전은 제2의 독립전쟁이 되어버렸다.
이승만은 통치자의 입장에서 무조건 승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 스위스 월드컵 당시의 규정은 홈앤드어웨이 방식으로 예선전을 치르게 되어 있었는데 일본을 증오했던 이승만은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는 왜놈들이 한국 땅을 다시 밟지 못한다“며 서울예선을 반대했다. 만약 정부 수립 이후 서울 땅을 밟은 일본군(당시 언론은 팀이라는 표현에 익숙하지 않아서 군이라고 했다)에게 첫 한·일전에서 일본에게 패배한다면 그 후과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축구인들의 월드컵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다. 강점기 36년의 성적을 보더라도 마지막 4년은 조선군이 전일본대회에서 네번이나 우승했다. 재일교포와 축구인들은 승리할 자신이 있다며 이승만을 설득했다. 예선 두 경기를 모두 일본에서 치르더라도 승리할 수 있으니 출전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한국의 날씨를 핑계로 대고 일본에서 두 경기를 모두 치르는 것으로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 FIFA의 승인을 받았다.
스위스월드컵 최종예선 / 후지산 무너지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의 선수들은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한·일전에서 패배한다면 돌아오지 못하고 바다에 빠져 고기밥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일본에 가도 좋다만 만일 패한다면 현해탄(대한해협)에 몸을 던지거나 고기밥이 되라” (이승만, 장택상 대한체육협회장) 이승만에게 출국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유형 감독가 선수들은 그 다짐에 사인을 했다.
1954년 3월1일 한국군이 일본을 향해 떠났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총독부가 모든 운동경기를 금지하고 한국 전쟁 기간 동안에도 운동을 할 수 가 없어서 과거 경평 축구 대항전에 뛰었던 선수들로 30대 이상이 12명, 20대가 6명이었다. 3.1만세운동이 있었던 때로 부터 35년 되는 날, 대한민국만세! 소리를 뒤로 하고 부산수영비행장에서 일본 행 비행기에 올랐다.
3월7일 일본 도쿄 하늘에 태극기가 처음 게양되고 우리나라의 애국가가 최초로 울려퍼졌다. 이 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후원금을 모금했던 재일동포들의 성원이 없었다면 경기 참석 자체가 어려웠다. 역도산도 비밀리에 후원을 했다. 신격호 등 교포사업가들도 자금을 댔다. 관중의 절반은 재일동포였다. 일본에 기항해 있던 한국 해군 200명도 응원전에 합류했다.
이유형 감독은 ”무엇보다 정신력에서 지면 안된다“고 독려했다. 도쿄에 내린 큰 눈으로 운동장은 진흙탕이고 얼음이 얇게 깔려있었다. 추운 날씨. 슬라이딩을 하며 온몸으로 공격을 막으면 차가운 얼음물을 몸 전체로 뒤집어 쓰며 체온을 빼앗기는 탓에 거의 동사상태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추위를 녹일려고 축구화에 고춧가루를 넣고 달렸다. (재일 코리아 스포츠 영웅 열전. 오시마 히로시 지음/ 최초의 한일전. 국영호 지음) ”경무대에서 비상한 관심을 갖고“ 지켜 본 예선 1차전에서 한국군은 5대1, 지금껏 깨지지 않는 역사상 가장 큰 스코어 차이로 대승했다.
3월14일 2차전이 열렸다. 일본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경기는 거칠었다. 한국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쓰러져도 심판의 호루라기는 울리지 않았다. 한국군이 2대2로 비기고 있는 가운데 김지성 선수가 이빨이 다섯개나 나가는 부상을 당했다. 다시 일어선 김지성의 얼굴을 발로 가격했다. 김지성은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경기장에는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아리랑을 선창했다. 민족의 영원한 노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한민족이라면 여기에 담겨있는 정서를 안다. 요동치는 감정이 거짓말처럼 차분해졌다. 지난 36년 간의 기억, 혼란스러운 마음이 일순간 경기장을 스치고 지나갔다고 국영호는 기록했다.
양대석 아나운서는 솟구치는 감정을 꾹꾹 눌러서 중계를 했다. “고국에 계신 여러분. 현장에 계신 동포 여러분. 한국 축구대표팀이 힘을 낼 수 있도록 응원해주십시오”, "우리 선수들은 지금 일본에 맞서 페어플레이로, 불굴의 정신력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반드시 갚아주어야 합니다. 반드시 이 점수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일본을 누르고 스위스에 갈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삼천만 동포 여러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국영호)
동아일보 3월16일자는 “이날 운동장에는 3만명이라는 관중이 운집하여… 스타디움의 중앙부에 휘날리는 태극기 밑에는 한국해군 3백명이 흰 모자를 열광적으로 흔들면서 도라지 타령과 아리랑을 소리높이 부르며 이채로운 응원을 보냈다“고 전했다. 재일동포 한 명은 일본에 거주한 이래 처음 맛보는 행복이라고 했다. 재일교포 2세 여성들은 일본어로 연신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제는 어깨 피고 다닌다. 해방의 기쁨을 다시 맛보았다“고 너나 없이 말했다. 3월16일 신주쿠에서 축하연이 거하게 열렸다.
부산 범일동에서 시청까지 시가행진을 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으로 산을 만들고 사람으로 바다를 이루었다. 미군 야간열차로 밤새 달려 다음날(3월23일) 아침 8시45분 서울역에 내렸다. 군악대가 환영 영주를 하고 오색테이프가 하늘을 뒤덮었다. 서울운동장에서 범 정부 차원의 시민 환영대회가 열렸다.
경무대에 선수단이 도착하자 이승만 대통령 부처는 ”일본 사람을 무엇으로서 간에 물리친데 대하여는 기쁜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다“며 기뻐했다. 정상희 선수단장은 “우리 선수들은 왜놈들이 발악적으로 경기에 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치단결하여 최선을 다하여 싸웠다”고 말하였다.
스포츠 보도에 중립은 없다.
이승만 시대의 국제스포츠는 우리가 국제올림픽위원회에 단독으로 가입한 것을 빼면 1954년의 한일축구전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너무 가난해서 스포츠 정책을 세울 수도 없었다. 최초의 한일축구전을 길게 소개한 것은 여기에 우리나라 스포츠 민족주의의 원형이 다 담겨있기 때문이다. 애국심으로 하는 응원, 교포들의 성원, 대대적인 환영식과 카 퍼레이드, 승리를 국위선양과 동일시하는 정부와 언론, 자국 중심주의로 경기를 보도하는 언론 등등.
한일전은 라디오로 생중계된 최초의 경기였다. 1948년 민재호 아나운서가 런던올림픽 녹음편집 중계를 하면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은....”으로 시작한 첫 문장은 한일축구전에서 자리를 잡았다. 경기가 시작될 때, 한국군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한국군이 골을 넣었을 때, 한국군이 승리했을 때 아나운서는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을 호명했다.
최초의 한일 축구전 1차전. 전반 22분 물 끓는 소리, 칙칙 거리며 끊어지는 소리 사이로 양대성 아나운서의 들 뜬 목소리가 들렸다. ”대한민국 삼천만 동포 여러분 기뻐해주십시오. 우리 선수가 동점골을 넣었습니다…” 전국의 전파상과 라디오가 있는 가정집에 만세 소리가 울려퍼졌다. 동점골에 이어 34분 역전골을 넣었다. “대한민국 삼천만 동포 여러분 한국이 역전골을 넣었습니다“ ‘삼천만’ ‘동포’ 이런 단어에는 민족공동체의 애환이 배어있었다. 삼천만이라는 말이 전해지는 순간, 사람들의 심장은 뛰고 오그라 들었다. 2차전 때는 원활한 중계 방송을 위해 경선전기(경전)에서 각 가정에 특별 송전을 했다.
“도쿄에서 보내는 흥분된 아나운서 목소리는 거리의 확성기에서, 다방의 라디오에서 울려나왔고, 이래서 거리의 확성기와 다방의 라디오 앞에 모여든 관중으로 흥분한 숨소리에 찼다. 아나운서의 방송 소리가 그치고 마이크를 통해서 물 끓는 듯한 박수와 환호성이 잠시 동안 들려오고난 후에는 또 다시 아나운서의 굵직한 음성이 ‘대한민국 동포 여러분‘하고 우리 선수의 새로운 득점을 예고하는 소리가 라디오에서 나온다. 이렇게 라디오가 우리 동포를 힘있게 부르면 이에 호응하듯이 벌써 박수와 환호성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후에 반드시 승리의 쾌보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쾌보는 또한 멀리 선수를 해외에 보내고 승부를 걱정하던 동포들의 안도의 표정이기도 하다”(조선일보 1954.3.9)
1970년대에도 늘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은 호명됐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이역만리 말레이시아의 수도 콸라룸푸르입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이미 예고해드린 바와 같이 잠시 후....” 방송장비가 워낙 낙후된 시절이라서 중계방송이 자주 끊겼는데 그때마다 여자 아나운서가 나와 “여러분은 지금 한국과 말레이시아의 축구 중계를 듣고 계십니다.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 정신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잘 살기 위한....” 홍보방송이 이어졌다. (송기룡. 사커 키드의 생애/라디오 축구중계)
스포츠 보도와 중계는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어서는 안된다. 전혀 다른 보도저널리즘을 갖고 있다. 일방적이어야 한다. 전적으로 우리 선수 중심, 우리 팀 중심이어야 한다. 마치 요즘의 정치유튜브와 같다. 그럴수록 독자와 시청자가 붙는다. 아군, 중원 공략등 전쟁의 문법과 어휘를 그대로 따온다.
전쟁에는 적과 동지만이 있을 뿐이다. 과거에 비해서 해설이 전문적이 되어가고 그럴수록 시청자가 호응한다. 그래도 전제는 아군의 승리를 향한 보도여야 한다. 대한의 건아들, 조국의 딸들이 자랑스럽게 올림픽 경기에서 메달을 따고 태극기가 게양되면 흥분은 극에 달한다. "후지산이 무너집니다" 같은 표현은 일본에서 승리했을 때 자주 나온다. TV시대가 열리면서 아군이 승리하는 장면은 보여주고 또 보여주고 반복을 한다. 종이신문은 그 기쁨을 문자로 전달해야 하기에 더 자극적인 문장을 사용한다.
스포츠 민족주의의 절반이 정부, 국가간의 경쟁과 대립으로 형성된 것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언론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오락의 측면에서 긍정적인 지점도 있고, 때로는 국민통합의 역할을 한다. 수많은 영웅이 탄생하고, 비극적 종말을 맞기도 한다. 어렵고 힘든 시절을 경과한 피압박 민족일수록 공동체적 환희는 극에 달한다. 언론의 스포츠민족주의는 때로 파시즘이나 국가주의에 이용되기도 한다. 정권은 이를 활용하면서 부추킨다.
스포츠 민족주의 현상을 다룬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뽈을 차라』(천정환 지음, 푸른역사)에서 1독립신문 1면에 실린 논설(1896.12.3.)을 소개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조선이 암만 하여도 나라가 안 되겠다고 하여도 우리는 말하기를 조선이 암만 하여도 나라가 되겠다고 하노라." 사설에서 조선이 당당한 근대적 독립국가가 되리라 낙관한 근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토론 방법을 배워 서구 사람 못지 않게 민주적으로 당당히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가 바로 문제의 축구였다. 관립 영어학교 학생들이 오후면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데 달리는 거나 투쟁심 등 그 활달한 고동이 일본 학생들보다 "백 배 낫고" 미국·영국 아이들과 "비스름하다"는 것이 나라의 장래가 밝다는 증거로 들었다. 스포츠 저널리즘의 문법을 차용해 보면, 대한민국은 이때 1988서울올림픽과 2002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예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