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K-Sapience (3)] 빨리빨리 문화: IT강국을 만든 빨리빨리,이제는 승자독식의 부작용

민병두 입력 : 2024.06.18 15:42 ㅣ 수정 : 2024.06.18 17:14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빨리빨리 문화가 형성된 시대 자화상을 적확하게 묘사
빨리빨리 문화의 근원을 둘러싼 다양한 시각 존재...우리 민족의 DNA가 뿌리?
구한말 네 차례 조선을 방문한 비숍은 "조선인들은 게으르고 무기력하다"고 평가
농경사회에서는 영주와 지주에게 수탈 당하는 민중들이 부지런할 이유가 없어
산업화 이전 단계인 농경사회였던 조선의 시간 관념은 서양과 달라, 편견의 원인 돼
쌀농사를 짓는 한민족은 원래 부지런하고 성실하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아
일제 강점기하에 계급제도 해체되고 새로운 줄세우기 이뤄졌지만 역동성을 가질 수 없어
한국전쟁과 물자부족은 '새치기 문화'를 일반화시켜, 급격한 도시화로 경쟁은 격화
빨리빨리에 불을 붙인 것은 산업화와 남북 경쟁, 박정희 시대 국가 총동원 체제의 산물
빨리빨리문화는 고도성장에 기여했지만 대형사건 사고와 같은 그림자도 남겨
변화와 속도를 즐기는 한국인, '경제대국'과' IT강국' 그리고 '금수저사회'를 낳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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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정무위원장을 지낸 3선 국회의원 출신 민병두 보험연수원장이 한국인에 대한 예리하고도 심층적인 분석을 담은 '민병두의 K-Sapience'를 연재합니다. 문화일보 워싱턴 특파원과 정치부장으로 필력을 떨쳤던 언론인이기도 한 민 원장은 K컬처와 K푸드로 세계인을 열광시키고 있는 한국인을 'K-Sapience'라고 규정하고 그 내밀한 세계를 종횡무진 그려낼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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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욕망간의 속도경쟁에 몰두해온 한국은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의 사회가 되었다  [사진=프리픽]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현대 한국인의 특질을 규정할 때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빨리빨리 문화‘를 첫번째로 거론한다. 한때는 한국인의 수치스러운 조급증으로 안팎에 비쳐졌지만, IT 시대를 이끈 원동력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빨리빨리가 원래부터 한국인이 갖고 있었던 유전자라는 관점에서부터, 한국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면서 새로이 갖게 된 형질이라는 주장도 있다. 빨리빨리 문화를 분석할 때 부지런하고 근면성실하다는 것과 속도전, 일등주의는 전혀 다르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나는 그제야 놀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모래 위의 궁궐 같게만 느껴지던 대기업은 점점 번창하기만 했고, 거기 남아 있던 동료들은 계장으로 과장으로 올라가 반짝반짝 윤기가 돌았다. 어떤 동창은 부동산에 손을 대 벌써 건물 임대료만으로 골프장을 드나들고 있었고. 오퍼상인가 뭔가 하는 구멍가게를 열었던 친구는 용도가 가늠 안 가는 어떤 사품으로 떼돈을 움켜 거들먹거렸다. 군인이 된 줄 알았던 동창이 난데없이 중앙 부처의 괜찮은 직급에 앉아 있었으며, 재수마저 실패해 따라지 대학으로 낙착을 보았던 녀석은 어물쩍 미국 박사가 되어 제법 교수 티를 냈다. 나는 급했다. 그때 이미 내 관심은 그런 성공의 마뜩지 못한 과정이나 그걸 가능하게 한 사회 구조가 아니라 그들이 누리고 있는 그 과일 쪽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나도 ‘어서 빨리’ 그들의 풍성한 식탁 모퉁이에 끼어들고 싶었다"(이문열 단편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

 

작품 속의 시간은 1987년 - 1959년 - 1960년 - 1987년으로 이어지는데 부정부패가 심했던 이승만 정부 말기에서, 압축성장을 거쳐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라는 198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작중의 이 독백은 우리 사회에서 빨리빨리 문화가 형성된 시대의 자화상을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서 빨리’ 그들의 풍성한 식탁 모퉁이에 끼어들지 않으면 크게 낙오할 것 같은 사회적 심리와 이를 부추키는 상황은 이 시대의 지배 환경이었고 중심 정서였다. 

 

일각에서는 그 뿌리가 우리 민족의 DNA라며 역사적 연원을 찾기도 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빨리빨리에 젖어들었을까?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여러 역사서와 고서를 뒤져서 조선시대 아니 그 이전부터 우리 민족이 부지런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몇 명의 사가들이 남긴 간단한 인상기를 갖고 우리 민족성을 그려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삼국시대에 대한 기록은 흥이 많다, 음주가무를 즐긴다, 포악하다 등 너무 단편적이다. 그래서 비교적 상세하게 인상기를 쓴 최근세사의 기록부터 살펴볼 수밖에 없다.

 

구한말 네 차례(1894~1897) 조선을 방문하고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 살림출판사, 집문당》이라는 책을 남긴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은 한마디로 게으르고 느리다고 인상기를 남겼다.

 

“한양은 단조롭고 더럽고 죽은 도시다. 사람들은 게으르고 무기력하다. 한양의 산들이 가진 황토색은 진흙벽, 초가지붕, 진흙탕 도로의 색깔과 똑같다. 단색의 도시에 오직 검은색과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걸어다닌다. 때묻은 흰옷을 입고 무언가를 운반하는 짐꾼들, 빈민가 귀퉁이에서 삶을 흘려보내고 있는 활기 없고 더러운 아이들, 고기토막에 힘없이 꼬리를 흔들고 있는 다갈색 개들…”

 

느려터지고 타성에 젖었고 희망이 없는 민족이라는 외국인의 인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1904년에 3개월간 조선에 체류했던 사회주의자 잭 런던은 《전쟁속의 코리아》에서 “지구상의 그 어떤 민족 중에서도 의지와 진취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장 비능률적인 민족”이라고까지 했다. 당시 조선은 모든 것이 문제점 투성이라서 조선인을 보면 쏘아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까지 했다. 일본인이 남긴 인상에는 증오와 편견이 가득 차 있다. “조선인은 세계에서 가장 게으른 민족이다” “조선의 유일한 생산품이 똥, 담배, 이(흡혈 곤충), 기생, 호랑이, 돼지, 파리 뿐이다”고 오키타 긴조는 《이면의 한국》(1905)에서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글을 썼다. 아리랑으로 대표되는 한국인의 정신은 무관심과 무저항, 은둔과 무사안일이라고까지 했다.

 

외국인들이 본 조선 후기의 인상기가 편협한 것은 맞지만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망해가는 조선에서 희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계층 상승의 꿈이 사라진 나라에서 죽어라고 일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면 노력을 하지 않게 되어 있다. 반대로 가능성이 보이면,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에, 아주 빠른 속도로 계층 상승의 가능성이 보인다면 사람들은 빨리빨리 움직일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서부로 서부로, 골드러쉬가 생긴 것처럼. 반대로 희망이 없으면 사회주의 협동농장의 농민처럼 되는 것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영주와 지주에게 수탈을 당하여 자기 수확이 미미하기 때문에 민중들이 부지런할 이유가 없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부르주아 계급이 생겨나면서 일한 만큼 벌 수 있다는 조건이 형성되어 사람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조선이나 유럽이나 일본이나 가릴 것 없이 농경사회에서 농민들의 생활 양태는 비슷했다. 마지못해 일하거나, 저항을 선택하거나 둘 중 하나다. 조선에 대한 인상기를 쓴 외국인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자기 나라의 봉건시대의 마지막을 목도했더라면 똑같이 희망이 없어 나태해질 수밖에 없는 조상을 발견했을 것이다.

 

“한국은 개혁에도 불구하고 단지 두 계급, 약탈자와 피약탈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허받은 흡혈귀인 양반계급으로부터 끊임없이 보충되는 관료계급, 그리고 인구의 4/5인 문자 그대로의 하층민인 평민계급이 그것이다. 후자의 존재 이유는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에게 피를 공급하는 것이다”(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조선조 말에는 희망이 없었다. 5백년 왕조는 무능하고 양반계급은 무위도식으로 일생을 보내고 민중은 동학농민전쟁 같은 민란과 혁명운동에 동참하는 것 이외에는 길이 없었다. 이런 계급 구조가 아니었다면 조선인의 근면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을 것이다.

 

당시 동서양의 시간관념이 달랐던 것도 편견을 갖게 했다. 조선은 아직 농경사회에 머물러 있었고 산업화 이전 단계였다. 농경사회의 시간 개념은 순환적이다. 중국에서 예로부터 연월일을 표기하는데 사용했던 12간지나, 조선시대 말에 정착했던 5일장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동양의 농경 사회에서는 시간은 미래를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순환한다고 생각을 했다. 농경사회 아시아 농민의 시간 감각에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돌고 도는 것처럼 시간도 돌고 도는 것일 뿐이었다. 순환적 시간의식은 불교의 윤회사상, 유교의 극기복례(克己復禮)에 맥이 닿아 있다(한국역사연구회《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을까》, 황병주《근대적 시간의 등장》>.

 

일직선적인 시간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10년 후, 20년 후, 미래에는 무엇을 하겠다는 목표지향적인 개념이 부재했다. 5년 단위로 국가경제계획을 세운다든지, 10년 이내에 달에 사람을 쏘아 올리겠다(미국 케네디 대통령) 등의 시간 개념은 근대국가, 그것도 최근세사인 현대국가에 들어와서 가능해졌다. 일본에서도 메이지 유신을 하고서야 근대화의 시간표를 만들었다. 미군정 하에서 한국 사람들이 시간개념이 없고 약속에 늦는다고 해서 코리안타임(korean Time)이라는 말이 나왔고 일부에서는 이것이 한국인이 게으른 징표라고 하는데 이치에 닿지 않는 얘기다.

 

성숙한 산업사회를 경험한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전국적 전세계적으로 분초를 다투는 시간 개념이 정립되어 있었고, 농경사회에 머물렀던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서는 예외없이 시간 개념의 지체가 있었다. 이것은 부지런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 인식의 문제인 것이다. 산업사회의 시간관과 농경사회의 시간관의 차이다. “시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가시화한 것인데 근대적 시간이 가장 먼저 작동하고 시계를 발명한 스위스에서는 '시간이 금'이었고 그 같은 생각은 유럽에 퍼져나갔지만, 비서구권에서 시간관은 이전 시대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황병주).

 

이러한 제약 요인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은 원래 부지런하고 성실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있는 얘기다. 조선의 주식은 쌀이다. 쌀은 원래 아열대 기후에서 재배가 가능하다. 38도선에 위치한 임진강까지 쌀의 북방한계선을 끌어 올린 것이 우리 민족이다. 비가 부족하고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에서는 쌀의 경작이 어렵다. 물을 끌어들여야 하고, 농사일에 88번이나 손이 간다. 그래서 한자에 논 농사를 짓는 답(畓)에 물 수(水)가 들어가 있으며, 한자 쌀(米)에 여덟 팔자가 두 번이나 들어가 있다. 이런 기후 한계를 가진 곳에서는 부지런하지 않고서 쌀농사를 할 수가 없다. 몬순기후 지대에서 벼 농사를 짓고 사는 농경민족으로서는 부지런함이 필수 요소다. 어느 시한까지 모를 내지 못하면 폐농이요, 어느 시한까지 초벌 김을 매지 않으면 벼보다 잡초가 성해 버린다. 한국인은 긴박하게 살아가게끔 체질화되어 있다. 해가 떠서 해가 지는 동안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기에 해가 뜨는 새벽 시간부터 일했다. 오후에는 날씨가 어떻게 될 지 모른다. 때문에 아침이 빠르다. 아침을 잘 먹어야 했다. 빠른 속도의 식사 습관도 만들어졌다.

 

조선조 말에 연변에서 우리 민족이 쌀농사에 성공했다. 북방한계선인 임진강까지 쌀농사 지대를 확장한 것도 대단한데 북위 41도선인 만주 지역까지 오직 부지런함과 개척 정신으로 경작 지대를 넓혔다. 양반 계급의 수탈이 없는 지역이라는 점도 동인이 됐다. 북위 51도선에서 건앙법(볍씨 단계에서 발효시킨 돼지 오줌에서 얻은 비료를 투입) 쌀 농사에 성공할 정도로 억척스럽고 부지런한 민족이다. 스탈린 치하에서는 강제 이주한 중앙아시아에서도 쌀농사에 성공했다. 미국 이민의 역사에서도 그같은 부지런함은 입증된다. 당시 유대인이 주류를 이루었던 채소 야채 과일상과 경쟁했다. 다른 야채상이 새벽 6시에 문을 열면 한국에서 이민 온 야채상은 새벽 4시에 문을 열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이 부지런하다는 징표는 많다. 하지만 부지런하다는 것과 빨리빨리 한다는 것은 성격이 다른 얘기다.

 

이어서 일제 강점기가 왔다. 구한말 계급제도가 폐지된데 이어서 일제는 기존 계급을 해체했다. 그리고 새로이 줄을 세웠다. 그들이 세운 줄은 역동성을 가질 수 없었다. 3.1만세운동이 있고 난 후 수립된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에 따르면 “일본에 충성을 다하는 자로 관리를 삼고, 친일 지식인을 장기적인 안목에서 양성한다. 친일 분자를 귀족, 양반, 부호, 실업가, 교육가, 종교가 등에 침투시켜 각종 친일단체를 조직케 한다”(이선민 《1919년 일제 문화정치》/ 강준만의 《한국인 코드》에서 재인용)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계층 이동은 거의 없었고 친일파를 등용하기 위한 좁은 문만 있었다. 식민지 체제에서 고급 관료인 고등관, 즉 주임관 이상의 직급에 일본인이 1943년에 86.4%(조선인 516명)이였다. 즉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조선인의 역동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국가를 위해 헌신한다는 개념의 입신양명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식 용어인 출세로 대체된디. 조국을 잃어버렸기에 대의명분인 명예는 사라지고 세속적 성공으로서의 출세만이 남았다. 이런 세속적 풍토하에서 미군정이 들어서서 다시 줄을 세웠다. 친일파가 맨앞에 줄을 섰다는 점에서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통역관과 미국 유학파가 새로이 득세했다. 인생은 줄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한국전쟁은 ‘평등한 가난‘을 선물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와해가 되어 경쟁의 출발점이 같아졌다는 점에서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정한 경쟁이 보장된다면 역동적인 사회, 건전한 시장경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신질서를 수립할 것인가, 어떻게 공평한 사회를 만들 것인가가 과제였다. 조선시대의 인재등용문이었던 과거제도의 현대판인 고등고시가 여전히 출세를 보장했다. 1951년부터 1959년까지 3급(현 5급) 고등고시 합격자수는 239명에 불과했는데 같은 직급의 고등전형 합격자는 3,080명이나 되었다. 정실임용제도로 대부분을 선발했다(한국역사연구회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누군가 뒤를 봐주는 ’빽‘이 있어야 출세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과 그로 인한 물자부족은 만성적인 식량난에 시달리게 했다. 원조물자를 타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치기 문화는 일반화되었다. 서울 가면 눈뜨고 코 베인다, 즉 사기를 당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생활은 각박했고 민심은 흉흉했다. 이런 가운데 한 가지 희망이 있었다면 문자 해독률이 빠른 속도로 높아지고, 초등학교 교육이 의무화되었으며 대학진학률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농지개혁으로 소작제가 폐지되고 자작농이 늘어나면서 희망을 가진 것도 한 원인이고 6.25전쟁 기간 동안 한시적으로로 대학생들의 징집을 연기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높은 교육열이라는 인프라가 만들어졌는데, 일자리는 부족하여 경쟁이 극심한 사회가 만들어 졌다. 피난부터 배급까지, 살아남는 것부터 일자리를 얻고 출세의 대열에 올라서는 것도 빨리빨리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회가 되었다. 

 

게다가 해방으로 귀국한 해외동포와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그리고 이농으로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경쟁은 가중되었다. 좁은 땅덩어리에 내가 살 수 있는 산동네 판잣집의 공간이든, 인력거에 사람을 싣고 나르기 위한 자리 싸움이든 결국 시간 싸움으로 귀결되었다. 공간은 클수록 좋고 시간은 빠를수록 경쟁력이 있다. 대한민국의 인구밀도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 이 좁은 나라에서 한정된 공간에 자신의 기회의 땅을 갖는다는 것은 힘들다. 청계천이나 삼양동 산동네에 내 집을 마련하는 것도, 광주대단지에서 철거민들이 공간을 차지하는 것도 무한경쟁이다. 이규태는 “좁은 땅에 많은 인구가 들어서서 사는 바람에 공간적 여유가 없고 그 좁은 공간에 비집고 끼어드는 것이 생존 조건이 됐다. 공간의 선점을 위해서는 시간의 선행이 필연“이라고 지적했다. 해방 후 90만 명이 살던 서울에서 1965년에는 인구가 350만 명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사회상을 담은  소설가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1966)는 산업화 과정에서 뿌리 뽑힌 이들의 방황과 자기 상실을 그렸다. 면서기도 권력이던 시대에 부정부패와 갑질이 만연했다. 여기에 줄을 타면 속도전에서 승자가 되는 것이고, 올라타지 못하면 패자가 된다. 이런 시대의 모습을 유행가에 담았다. 1965년에 나온 ‘회전의자’라는 노래는 갑질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민초들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보여준다(신봉승 작사, 하기송 작가, 김용만 노래). 이 노래는 1969년, 당대에 가장 인기 있었던 구봉서, 남진, 김희갑, 서영춘, 남정임 등 최고의 코미디언과 가수들이 출연하여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사람 없어 비워 둔 의자는 없더라/사랑도 젊음도 마음까지도/가는 길이 험하다고 밟아버렸다/아아아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돌아가는 의자에 회전의자에/과장이 따로 있나 앉으면 과장인데/올 때마다 앉을 자린 비어 있더라/잃어버린 사랑을 찾아보자고/밟아버린 젊음을 즐겨보자고/아아아 억울해서 출세했다 출세를 했다

 

빨리빨리에 불을 붙인 것이 산업화와 남북 경쟁이다. '한국에 산다는 것은 경쟁한다는 말과 똑 같아졌다. 대학 직장 결혼 모두가 경쟁이다. 일상이 Fighting이다'(다니엘 튜더). 산업화와 함께 ‘고도경쟁과 상승욕구는 한국인을 규정하는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홍대선 《한국인의 탄생》). 남북간의 체제 경쟁도 전 사회가 속도전에 돌입하게 했다. 쿠데타로 집권하고 3선 개헌으로 집권을 연장한 박정희의 입장에서는 성과가 중요했다. 박정희는 엘리트 관료들을 통해서 경제 계획을 수립했고, 수치 등을 통해서 전국민을 산업역군화하는 동원 체제로 만들었다. 1961년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로 세계 최빈국이었는데 수출1위 국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박정희가 4년 안에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하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는데 정주영은 그것을 더 앞당겨서 2년 5개월만에 길을 만들었다. 박정희가 “그래,  임자 할 수 있겠어?”하고 물으면 정주영은 안된다고 말하는 직원들에게  “이봐, 해보긴 해봤어?”라고 추궁했다. 박정희는 주어진 시간과 예산 안에서 그가 말한 도로 병원 교량 등을 제대로 지어낸 기업에게 후한 보상을 해주었다(다니엘 튜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정경유착의 시대였다. 누이 좋고 매부 좋았다.

 

럭키금성그룹의 1970년대 사가에서도 속도주의를 읽을 수 있다.

 

“우리들은 이 나라의 젊은 일꾼들 / 속력을 경쟁하는 보람찬 대열 / 사랑으로 한데 뭉친 동지들이다 / 무궁화의 강토 건설 우리 손으로 / 나라의 자랑이다 럭키금성 / 세계로 뻗어가는 럭키금성”(송영학 《한국기업에서 경영 가치와 믿음에 문화가 미치는 영향》에서 인용)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김우중이나, “마누라하고 자식 빼고 다 바꿔”라고 하던 이건희의 일등주의 속도전은 모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던 박정희 시대 국가 총동원 체제의 산물이다. 

 

북한은 속도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천리마 운동(김정은은 이를 계승하여 만리마 정신을 말한다), 새벽별 보기 운동을 했다. 1945년부터 40년간 북한은 한국보다 앞섰다. 2차 대전 후 일본을 제외하고 아시아에서 가장 앞섰던 국가다. 미 중앙정보부 보고서에 따르면 전후 복구와 중공업의 발전 속도에서 경제적 기반 확립을 하지 못했던 한국보다 10여 년 앞섰다(86 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때까지 우세가 계속되었다). 1963년에는 북한의 71%에 이르는 지역이, 1970년에는 모든 마을과 가정에 전기가 보급되었다(그런데 지금의 위성 사진을 보면 평양을 제외한 북한의 밤은 암흑이다). 1972년 북한을 방문한 퓰리처상 수상자 해리슨 솔즈베리(Harrison Sallisbury)는 북한을 방문한 후 “엄청난 기술과 산업의 성과를 이룩한 국가”라고 했다. 1972년 박정희 밀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도 큰 충격을 받았다( 빅터 차 《불가사의한 국가》). 잘 닦여진 포장도로와 높은 건물, 웅장한 기념비를 보면서 일반 국민에게 알려지면 안된다는 우려를 박정희와 나누었다고 한다. 북한에 뒤져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은 더더욱 속도전에 불을 당겼다.

 

이렇게 해서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람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빨리빨리 문화가 형성되었다. 오죽하면 외국인이 빨리빨리가 한국인의 인삿말인 줄 알 정도였다. 빨리빨리 문화는 한국의 고도성장에 기여를 했지만 어두운 그림자도 많이 남겼다. 1970년의 와우아파트, 1994년의 성수대교, 1995년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그리고 세월호 침몰에 이르기까지 모두 속도전과 대충주의가 낳은 결과였다. 작은 전쟁에서 발생하는 전사자 수보다도 더 많은 연간 8000명 가까이가 교통사고와 산업재해로 사망했다. 삼성전자가 세계 1등 기업이 되는 과정에서 노동자는 백혈병을 앓아 죽는 일이 벌어졌다. 이제는 산업화, 정보화, 민주화에 이어서 인간안보(Human Security)가 중시되는 인간화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는 자성이 있었지만 한국인들의 기억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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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6월 뉴스위크는 '한국인들이 몰려오고있다'를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사진자료=민병두 원장]

 

빨리빨리 문화는 이웃 국가에도 전염되었다. 만만디 문화를 갖고 있던 중국도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콰이콰이문화로 대체됐고 우리가 고속 성장의 부작용으로 겪었던 경험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중국인과 결혼해서 사는 박현숙은 ‘자리 차지하기’(새치기)라는 말이 중국 사회를 설명하는 사회학 용어로 등장했다고 한다.

 

“자고 일어나면 주택정책이나 교육정책이 바뀌어 있고, 또 자고 일어나면 홍위병들이 날뛰며 계급 투쟁 만세를 외치다가, 어느 날은 시장 사회라며 돈 돈을 외치는 세상이 되었던게 중국인들이 겪어 온 현실이라고, 때문에 자기 자리를 지키거나 먼저 차지하지 않으면 누구도 내 자리를 챙겨주지 않는다는 걸 중국인들은 뼈저리게 경험해 왔다는 것이다”(박현숙 '산부인과에서 새치기를 당하다' 한겨레21. 2005년 8월 16일/ 강준만의 《한국인 코드》에서 재인용). 다만 속도전의 원조인 북한에서 날래날래가 일반 인민들의 입에 붙어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정권은 속도를 원하지만 인민의 입장에서는 보상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입에는 달라 붙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주한미 상공회의소장을 지낸 제프리 존스는 ”한국인처럼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적은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다른 나라에서 5, 10년 쓸 것이 한국에서는 1, 2년이 되면 골동품이  된다. 변화에 익숙하며 변화를 좋아하고 또 즐기기까지 한다‘(《우리도 몰랐던 한국의 힘》)고 했다. 변화를 두려워 하지 않는 민족성, 분명 그것은 우리의 장점으로 작동했다. 중국 런민대학교 마샹우 교수는 “한국인들이 부끄러워했고 한때 세계적 웃음거리였던 빨리빨리 문화도 한류문화의 기세에 한몫했다 ’고 할 정도로 한국의 산업에 미친 영향은 방대하다.

 

경제 대국이 되는데, IT 강국이 되는데, 코비드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는데, 한류가 세계 문화가 되는데 어느 정도는 빨리빨리가 작용했다. 이제 한국인은 빨리빨리 없으면 일상에 차질이 생긴다. “맛없는 음식은 참을 수 있더도 늦게 배달되는 음식은 참을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빨리빨리는 우리 생활 전반에까지 침투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경쟁력 있다는 배달 문화, 오죽하면 브랜드를 ‘배달의 민족’이라고 했을까. 실로 빨리빨리의 영향은 전방위적이다. 

 

1960~1990년대에 부모 세대의 희생과 헌신으로 빨리빨리문화의 혜택을 본 집단이 있다. 평평하게 잘 다져진 경기장, 교육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 가난에서 탈출하고픈 개인들의 욕망이 서로 어우러져졌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였다. 누구가 공부만 잘하고 시험만 합격하면 됐다. 평평한 경기장에서 성공을 향한 입장권을 가진 사람들은 사다리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경쟁자를 물리치고 떨어뜨리면서 맨 위에 올라가기 위한 무한 경쟁을 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여러 가지 문제점과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미덕이 있었다면 그 계층 사다리가 있어서 대한민국의 성장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렇게 성공한 고위공무원, 법조인, 의료인, 대기업 직원, 신흥 엘리트 1세대가 자신들이 힘겹게 얻은 우월한 위치를 자식들에게 넘겨주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고 그 결과 계층이동이 닫혔다. 계층 사다리가 걷어차였다.  영화 <기생충>에서처럼 서로 다른 공간에 사는 사람들로 계급화되었다. 그들이 빨리빨리 올라선 만큼 빨리빨리 문을 닫아버렸다. 서민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뚫고 가는 것보다 어려운 세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은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의 사회가 되었다. 조선시대 말(영정조까지 역대 왕조가 세계 13위권의 선진국가였다는 분석이 있다. 사실 유럽의 몇나라와 아시아 3국 정도가 가장 선진적인 국가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무위도식하던 양반들이 만든 계급사회가 나라를 망쳤다. 평등한 출발점에서 빨리빨리 일어선 계층이 신양반 계급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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