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내 사랑, 아파트-1편
국회 정무위원장을 지낸 3선 국회의원 출신 민병두 보험연수원장이 한국인에 대한 예리하고도 심층적인 분석을 담은 '민병두의 K-Sapience'를 연재합니다. 문화일보 워싱턴 특파원과 정치부장으로 필력을 떨쳤던 언론인이기도 한 민 원장은 K컬처와 K푸드로 세계인을 열광시키고 있는 한국인을 'K-Sapience'라고 규정하고 그 내밀한 세계를 종횡무진 그려낼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뉴스투데이=민병두 보험연수원장] 1971년 남진의 히트곡 ‘임과 함께’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년 살고 싶어….” 로 시작한다. 도시로, 서울로 밀려 들어온 시민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가 그려져있다. 그 이면에는 만원이 된 서울을 점령하고 있는 무허가 판자촌, 꼬방 동네의 삶에 대한 피로감이 배어있다. 노래에서 꿈꾸는 ‘그림같은 집’의 주택 형태는 단독주택이다.
1982년 윤수일의 ‘아파트’가 히트를 친다. 우선 노래 제목 자체가 파격이다. 사랑 슬픔 이별 고향과 연관된 제목이 일반적이던 시대에 그냥 일반명사 ‘아파트’를 사용했다. 아파트가 부유층의 선망이 된 사회적 배경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제목이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 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 그리운 마음에 전화를 걸면…’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기보다는 도시적 삶이 베이비 부머(1953~1961년생)들에게는 중심 정서가 되었고, 아파트가 여러 주택의 종 가운데에 우월적인 종(1978년 주택건설 실적에서 아파트가 단독주택 보다 앞서가다가 1982년에는 단독주택 18%, 아파트 57%의 건설 실적을 보인다. 2021년 총주택 중 아파트는 63.5%)으로 올라서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1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식민지 시대의 아파트
우리나라에서 아파트라는 단어가 맨 처음 소개된 것은 1925년이다. 조선건축회의 기관지, <조선과 건축>의 ’건축잡보‘ 란에 ‘동윤회의 아파트먼트’라는 제목으로 3층 콘크리트 아파트 건설계획이 소개되었다. 실제로 같은 개념의 아파트가 5년 후에 지어진다. 경성 미쿠니상회 아파트로 미쿠니 직원들을 위한 기숙사 형태의 건물이다. 1927년 이상 시인이 졸업한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공대 전신) 졸업작품전에도 ‘아파트먼트 하우스’가 등장한다.
서대문 지역에 만들어진 유림아파트(충정로 3가 250-6번지)는 회사 직원이 아닌 일반인을 상대로 건설된 최초의 국내 아파트다. 건축가의 이름을 빌려 토요타 아파트로도 불리웠는데,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가장 오래된 아파트로 철거 후 재건축의 길을 걷고 있다. 이처럼 아파트가 등장하면서 [신동아] 1933년 5월호에 새로운 주거 형태를 다룬 기사가 게재된다.
”아파-트 멘트(apartment) 영어. 일종의 여관 또는 하숙이다. 한 빌딩 안에 방을 여러 개 만들어 놓고, 세를 놓는 집이니, 역시 현대적 도시의 산물로 미국에서 가장 크게 발달되었다. 간혹 부부생활하는 이로도 아파-트 멘트 생활하는 이가 있지만 대개는 독신 샐러리맨이 많다. 일본서는 아파-트 먼트 하우스를 약하야 그냥 ‘아파트’라고 쓴다“
1930년대는 1차 아파트의 시대이다. <경성의 아파트 / 박철수 외 3명 지음/ 집 펴냄> 조선시대 한양의 인구는 10~20만명 사이였는데, 일본의 군수산업화 영향으로 식민지에서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1940년 97만명에 이르는 도시가 되었다. 총독부는 주택정책을 새로 세우게 되고, 일본에서도 미국과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도입된 아파트가 식민지로 이전된다.
근대 아파트의 역사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 시작한다. 당시 파리는 구불구불하고 미로 같은 골목으로 구성되고 생활하수가 넘치는 도시였다. 도로는 혁명 당시에 시민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기에 가장 적합했다. 진압이 용이하지 않았다. 산업혁명에서 성공한 영국이 최초의 만국박람회에서 국력을 과시하는 것을 보면서 파리도 만국박람회를 앞두고 도시개조 필요성을 느꼈다.
1853년부터 1870년까지 17년간 파리 시장을 지낸 조르주외젠 오스만 남작은 파리를 개조했다. ‘오랜된 불결함을 현대적인 우아함’으로 교체했다. 구역을 정비하고 넓은 거리를 가로수와 함께 조성하고 길을 따라서 주상복합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파리의 아파트들은 1층 가로수 길을 따라 상가가 조성되었고, 6층 높이 정도의 발코니가 있는 아파트는 적절한 일조량과 적당한 정도의 채광, 좋은 조망과 통풍을 제공했다. 아울러 고층에는 서민들이 들어서는 등 사회경제적 혼합(social mix)을 이룬 생태계를 갖추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현대적 아파트로 다시 태어나게 한 인물은 스위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다. 그는 사람이 사는 기능만 했던 집의 개념에 반기를 들고 ‘집은 인간이 살기 위한 편안한 기계’라고 재정의했다. 크루즈(유람선) 같은 구조물을 생각했다. 대단위 주거지, 공간 절약형 건축법등을 연구했는데 산업화 이후 대두한 주택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였다.
그는 “주택을 대량생산하려는 마음가짐, 대량생산주택에 살고자 하는 마음가짐, 대량생산 주택을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시대”라고 했다. 단독 주택 대신에 아파트를 고층으로 짓고 지상의 모든 공간을 자연 녹지로 만들어 공공에 제공하자고 제안했고, 실제로 2차대전으로 도시재건을 해야 하는 프랑스 정부의 의뢰를 받아 마르세유에 1600명이 거주하는 공동주택을 지었다. 유니텔 다비시테옹은 현대 아파트의 효시이다. 인간을 중심에 둔 건축철학으로 수직도시를 꿈꿨던 그는 이 아파트 안에 세탁소 탁아소 옥상정원 및 수영장등 커뮤니티 시설을 배치했다.
• 한국전쟁 이후의 주택난
대한민국 아파트 원년은 1956년이다. 중구 주교동에 중앙산업이 주거동 형태의 아파트를 건설했다. 1957년 성북구 종암동에 종암아파트가 세워지고 1960년 넓은 의미의 아파트가 서울에 75개동, 전국적으로 750여개가 세워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종암아파트 준공식에 직접 참석해서 “국민이 싫어하더라도 아파트를 많이 지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만 해도 아파트는 화장실이 거주공간과 함께 있고, 김장독을 묻을 수가 없고 연탄가스로부터 안전한가 등의 일반인의 불만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지 못했다.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다는 것은 아파트를 주거혁명으로 정부에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빈민촌과 주택난 문제를 심각한 사회문제, 나아가서 체제 안정의 문제로 인식했다. 불순분자들이 꼬방동네에 숨어들면 공산주의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서울을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판잣집으로 도배가 되어 ‘좌익의 온상’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무허가 건물과의 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판자촌 문제는 최대 현안이었다. 서울시 인구는 1946년 115만 명, 1960년 245만 명, 1970년 543만 명(전체 인구 중 18%) 1980년 836만 명(22%)으로 늘어났다.
1962년 우리나라 최초의 단지형 고밀도 아파트인 마포아파트 준공현장에서 박정희는 ”현대식 시설을 갖춘 마포아파트의 준공은 생활혁명을 가져오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본 아파트가 혁명한국의 한 상징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고층아파트라는 ’현대적 시설을 수단으로 불합리한 구악의 일소, 생활혁명을 통한 청신한 기풍의 진작, 집단공동 생활양식으로 표상되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공태세 강화 등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박정희를 대신하여 김현철 내각 수반이 대독한 치사는 “본 아파트가 장차 주민들의 낙원을 이룸으로써 혁명 한국의 한 상징이 되기를” 바란다고 끝을 맺었다. 주민들의 낙원,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당시 북한은 경제 재건에서 남한을 앞서고 있었는데 ’인민의 낙원‘이라는 체제 선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북한은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 공습으로 초토화된 평양 재건에 착수하면서 소련으로부터 도입한 조립식 건축기법과 시멘트 공법으로 다수의 공동주택(아파트)을 건설했다. 당시 평양의 인구는 40만명에 달했지만 도시 전체가 쑥대밭이 된 상황이어서 이런 공동주택을 건설이 용이한 점도 있었다. 남한보다 아파트 건설이 일찍 시작되었으며 1960년대에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아파트를 공급했다. 한국의 초기 시민아파트는 여기서 영향을 받은 지점도 있다. 체제 경쟁으로 주택 문제를 이해한 것이다.
가장 먼저 아파트 공급이 대량으로 이뤄진 것은 소련 및 동유럽이었다. 공업화와 도시화를 진행되면서 ‘크바르치라’(아파트)를 다량으로 공급했다. 사회주의식 평등 체제에도 부합했는데 아파트 외관만을 보면 구분이 안될 정도로 비슷하게, 평등하게 지었다. 하지만 아파트는 저질 주택의 대명사로 전락한다.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위성국 시민들은 1989년 독립 혁명 당시에 “라스나마에(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이제 그만!” 이라고 외쳤다.
5.16 쿠테타 세력의 의도와 달리 마포아파트 단지의 초기 입주 실적은 형편없었다. 파이프는 겨울이면 얼어 터지기를 반복했고, 연탄보일러로 바뀐 난방 설비는 가스중독 사고에 대한 우려가 커서 모르모트 6마리와 주택공사 건축부장이 하룻밤을 자는 생체실험으로 안전성을 입증해야 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입주를 완료했는데 이에 대해 주택공사는 “김치독과 된장독을 어떻게 할 것인가로부터 시작된 마포아파트는 일반에게 아파트도 살 만하다는 것을 최초로 강하게 인식시켰고, 여기서부터 한국의 아파트 시대가 그 막을 열었다”고 자평했다.
• 단지형 아파트 시대의 서막-마포아파트
“10년 전 결혼하던 무렵부터 서구의 아파트 생활을 퍽 동경했습니다. 그러기에 혁명 후 매머드 아파트 단지가 마포에 세워졌을 때 아무 주저 없이 입주했습니다. 편리한 설비와 함께 더위와 추위를 몰랐던 생활에 젖어 5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보냈고, 작년 여름 이사를 나올 때 다정했던 이웃과의 눈물 어린 헤어짐과 함께 아파트 생활에서만 얻을 수 있는 가지가지의 즐겁고 아름다웠던 생활의 추억을 잔뜩 안고 나왔습니다.
어쨌든 현기증이 날 정도로 옆으로 다닥다닥 조막손이 모양 퍼지는 판도(판자집 도시)보다는 하늘로 높이 솟고 넓은 땅에 나무나 화초를 심고 분수를 만들고 어린이놀이터를 마련하는 것이 훨씬 여유 있고 좋지 않습니까. 격증하는 인구에 다음 세대는 좋던 싫던 아파트 생활을 면할 길 없는 시기가 올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건전한 전통을 이 새로운 역사 속에 심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1년 내내 샤워로 피곤을 풀며 먼지에 쌓인 몸을 녹이면서 아파트에 사는 즐거움을 흥얼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며 여러 번 방을 옮겨 볼 생각을 했지만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그 대자연의 혜택(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한강과 황혼)을 용감히 버리지 못하는 미련이 있습니다“
”아파트 자체에 설비되어 있는 목욕조, 웨스턴 토일렛, 응접실, 키친에서 직접 던질 수 있는 쓰레기통,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 그릇을 닦을 수 있는 싱크대가 얼마나 더 실질적인 생활에 유용한 것인가“
웨스턴 토일렛(좌변기) 등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사용법도 잘 몰랐고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변기를 함께 쓰는 불편함을 토로하기도 했으나 이는 편리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당시의 콩트에서는 아래층과 윗층의 같은 위치, 침실과 화장실에서 사람들이 층층으로 있는 것에 대한 상상을 그리는 등 아파트는 새롭고 신기한 것이었다.
주택공사가 목표한 대로 마포아파트 준공을 통해 아파트 시대의 막을 열었다. 생활과 생태계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아파트의 단지화는 한국에서 특별하게 볼 수 있는 주택 생태계이다. 아파트 담장 안으로만 한정되는 단지형의 집단적 공간 구획과 단지내 주민들의 배타적인 연대의식 고취, 단지를 경계로 하는 기반시설의 극심한 편차 등을 대두시킨 사건이 곧 마포아파트 단지의 준공이었다. 쉽게 말해서 이웃 개념이 바뀌었다.
마포아파트는 권력의 강력한 정치적 요구와 건축가들의 욕망이 적극 결합하며 만들어졌다. 건축가들은 처음 하는 고층아파트 설계를 모두들 신이 나서 했다. 주택공사는 현대 아파트 건설의 효시인 르 코르뷔지에의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참고했다고 한다. ‘녹지 위의 고층 주택’(tower in the park)이라는 르 코르뷔지에의 개념을 도입했지만 녹지는 없었고 코르뷔지에는 고려하지 않았던 대규모 단지만 있었다.
• 이호철 ‘서울은 만원이다‘.
1966년 동아일보의 연재소설로 인기를 모았다. 1967년에는 최무룡 감독, 김지미와 김희갑 주연의 <서울은 만원이다>가 개봉되었다. 무작정 상경, 실업, 빈민, 노동착취, 전쟁미망인 등의 단어로 서울은 점철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빈민촌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윤치영 서울시장은 1963년 부터 1965년 사이에 서울 후암동, 대방동, 이촌동 등지의 도시빈민을 쓰레기차에 싣고 가서 갈대밭에 버렸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뿌리를 내린 곳이 목동이었는데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전두환 정권 당시 88올림픽을 앞두고 목동 신정동 일대를 공영개발한다고 하여 그들은 다시 쫓겨났다.
1966년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이 방한했을 때 남산 자락과 청계천 일대의 판잣집(하꼬방)이 TV를 통해 미국에 방영되면서 “이건 나라 망신이다”라는 여론이 만들어졌다. 박정희 정부는 당연히 상황을 좋지 않게 여겨 판자촌을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김현옥 서울시장 지시하에, 각 구청들은 판자촌 등 무허가 건축물의 현황을 파악한 후 대부분을 철거하고 시민아파트들을 짓게 했다. 청계천 주민들은 상계동 허허벌판으로 쫓겨났고,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졌던 김현옥 서울시장은 경기도 광주(성남)에 판자촌 주민들을 이전시키는 광주대단지조성사업을 1968년에 시작했다. 판자촌이 있던 자리에는 시민 아파트를 건설했다.
당시에는 판자촌이 철거된 산등성이에 자고 나면 아파트가 올라오던 시대여서 ‘벌떡 아파트’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판자촌이 있던 곳에 아파트를 지었으니 대부분 위치는 산 가장자리였다. 아파트 단지를 지을 만한 평지는 당연히 지가가 비싼 탓에 예산 문제로 국유지인 산 가장자리에 짓게 된 것이었다.
북한에서만 천리마 속도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남한에서도 속도전이 있었다. 박정희에게는 재선이라는 중요한 이슈가 있었다. 업적이 필요했다. 이때 건설된 시민아파트 중에 와우아파트도 있었다. 와우아파트 위치는 홍대거리 뒷산인 와우산 자락에 있었다. 정해진 기간 안에 아파트를 뚝딱 지어내야 하는 데다 원가도 턱없이 낮았고 그나마도 중간에서 업체들과 공무원들이 떼먹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에 와우 아파트를 비롯한 각종 시민아파트는 당연하게도 날림 중의 날림 건축이었다.
와우아파트는 1969년 12월 26일에 완공되어 입주가 시작되었는데 해빙기가 되면서 땅이 녹자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기둥도 내려앉고 결국 한 동이 산 아래쪽으로 넘어지듯이 무너져 판잣집 세 채를 덮치면서 산산조각났다. 이 사고로 70여 명이 매몰 당해 와우 아파트 입주민 33명과 잔해에 깔린 판잣집 주민 1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당하는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이 사고로 ‘불도저 시장‘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이 사직했다.
시민아파트는 정부의 기대와 달리 새로운 생활혁명의 근거지이기는 커녕 슬럼화되고 있었다. 1960년대 말까지 건설된 아파트는 호화 아파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1970년 전국의 아파트는 주택 수의 0.77%. 서울에서는 3.9%의 비중을 차지했는데 시민아파트 70% 가까이가 보수가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결국 쓸 만한 아파트는 계속 보수해서 쓰고 못 쓸 정도가 된 아파트는 하나씩 철거했다. 이때 남은 와우 시민아파트도 철거되었다.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 사고는 5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대한민국 주거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 중산층=아파트라는 공식
이 사고 탓에 아파트를 불신하는 감정이 팽배해지자 박정희 정부는 시범아파트라는 이름으로 중산층을 겨냥한 새로운 형태의 아파트를 짓기로 했다. 더 높고 더 쾌적하고 안전한 아파트를 지어서 중산층 핵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도시주택 유형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는 마침 수출입국 정책으로 사상 유례가 없는 경제성장을 맛보고 월남전 특수로 중산층이 형성되던 시기였으며, 1960년대 중후반에 지가가 두 차례 크게 폭등하면서 돈이 출구를 찾고 있었다. 1960년대까지 이촌동-노들섬은 드넓은 모래벌판이었다. 이 백사장을 메워 1968년 공무원아파트가 준공됐고 1970년 한강맨션아파트가 지어졌다. 국내 최초로 준공 이전에 모델하우스를 지었고, 프리미엄(웃돈)이 붙은 아파트 단지로 연예인들이 입소문을 타고 입주했다. 중산층을 위한 최고급 주택 시대가 열렸다. 장동운 대한주택공사 총재가 1968년 일본 출장 중에 일본 신문 광고의 80% 이상을 차지한 분양광고를 흝어보다가 ‘하이츠’와 ‘맨션’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최초로 견본주택(모델하우스)를 통해 분양했는데 정일권 당시 국무총리는 한강맨션 기공식에서 장동운 총재를 만나 “장 총재, 꼭 봉이 김선달 같구먼. 한강 모래 팔아 돈 버는 것 같아”라는 농담을 건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실제로 공유수면 매립을 통한 택지 조성은 이후 강남 개발에 활용되며 건설업자들에게는 황금의 땅이 되었다. 한강둑 정비사업을 통해 조성한, 주인 없는 공유수면은 건설업자들에게는 일확천금을 가능하게 하는 기회가 되었고, 민간에 재정을 투입할 수 없었던 정부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아이디어였다.
가장 큰 고민은 공사비였다. 대한주택공사가 꺼낸 카드는 모델하우스를 짓고 주택을 선분양해 건설 비용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모델하우스는 와우아파트 사건으로 인해 유포된 아파트 불신감을 불식시키는 데에도 유용했다. 지금은 선분양이 일반적이지만, 후분양이 당연하던 당시엔 공급의 대전환이었다. 대한주택공사는 택지비를 제외하면 분양 광고비 800만원과 모델하우스 건립비 200만원만 쓰고 건설 비용을 전혀 들이지 않았다. 선분양, 모델하우스 등 오늘날 아파트의 문제점은 이때 잉태되었다
• 한강맨션-반포 주공아파트
한강맨션의 고급화는 평면에 집중됐다. 우선 27~55평형으로 공간을 기존 아파트 대비 확 넓혔다. 32평형 이상에선 중산층 수요에 맞추고자 부엌 근처에 식모방을 조성했다. 당시 농어촌에서 서울로 상경한 젊은 여성들이 부유한 가정에서 식모로 일하는 일이 많았다. 담장을 설치하고 초소와 경비원을 배치했고, 차별화를 위해 미술계에 외벽 색깔도 자문했다(식모방은 1980년대까지 존재하다가 여성 일자리의 증가와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의식의 변화로 사라졌다).
특히 50평형대는 매우 호화스러운 주택이었다. 현재의 9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당시 5급 공무원의 1972년 기준 1호봉 월급은 1만7300원이었다. 한강맨션의 분양가는 27평형이 340만원, 51평이 645만원이었으니 호봉 상승 없이 단순 계산해보자면 27평형을 매입하려면 약 16년, 51평형을 사려면 약 31년이 필요했다.
한강맨션아파트를 기점으로 공공주택으로서의 아파트 단지가 시장에서 욕망을 부추기는 대상이자 경쟁적으로 거래되는 상품으로 급격하게 변화했다. 정부 재정 부담 없이 선분양 수입금으로 건설 비용을 충당하는 방식이라고 하지만 투기자본을 이용한 정부의 주택공급 정책이었다. 오늘날 불로소득과 부동산 투기의 원천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 주택정책이 공공재 중심이 아닌 시장 중심의 경로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최초의 단지형 고층 아파트다. 1971년 10월 준공되었다. 높이는 12층으로 당시 우리나라 아파트 중에 가장 높았다. 입주할 때 엘리베이터 걸이 엘리베이터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상가에는 처음으로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했다. 수도 꼭지를 한번 돌리면 냉수와 온수가 쏟아지는 첨단 아파트였다. 연탄난방이 아닌 보일러를 땐 수증기로 중앙난방을 했다. 단지 내에 수영장과 분수가 있었다. (에스컬레이터와 수영장은 전시적 성격이 강했다) 가장 큰 40평형이 212만원에 분양되었는데, 두 달 만에 1000만원을 넘어섰다.. 박정희도 준공 후 시찰을 했을 정도로 중산층 아파트는 대박을 터트렸다
1971년 부터 74년까지 지어진 남서울아파트(반포 주공아파트)는 강남이 새롭게 등장한 중산층과 부유층의 주거지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계기이자 강남개발의 실질적인 시작점이다. 단지의 출발점에는 잡음도 적지 않았다. 1,490가구를 모집했던 이 단지에 수천 명의 사람이 몰렸고 경쟁률은 5.6대1로 치솟았다. 높은 관심만큼 편법과 불법도 성행했다. 경찰 수사도 뒤따랐고 당첨자도 다시 가리는 소동이 벌어졌다.
반포주공아파트는 아파트와 중산층의 친근 관계를 만들었다. 당시 주택을 소유하고자 하는 대기업 종사자들은 주택융자를 받을 수 있었다. 커다란 혜택이었다. 아파트=중산층이라는 등식이 만들어졌다. 별다른 금융정책이 없던 때라 보조금이 지불되지 않는 상태에서 융자금 상환능력은 금융 지원의 중요한 전제조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지불능력이 있는 계층만이 아파트에 거주할 수 있었고, 중산층을 대상으로 주택공급 물량을 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구 중산층인 자영업자를 대신하여 신중산층인 고위 공직자, 전문직 종사자, 대기업 간부 등이 그 혜택을 보았다.
• 압구정-사회적 신분 상승의 종착역
1976년 압구정동에 현대아파트가 지어졌다. 약 15만 평이 넘는 넓은 대지에 총 6,335세대가 지어졌다. 한국의 아파트 문화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대한민국 민영 아파트 대중화의 스타트를 끊은 아파트 단지이다. 이촌동에서 자신감을 얻은 현대의 정주영회장이 야심차게 뛰어든 사업이다. 가장 큰 특징은 대한민국 유일의 '아파트만으로 이루어진 동' 이라는 것이다. 즉, 압구정동은 일반 주택이 전무한, 오로지 아파트로만 이루어진 국내 유일의 행정구역이다.
당시에 정부는 민간아파트에도 공공자금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주택건설촉진법, 아파트 지구로 지정된 곳에서는 아파트 이외에는 다른 유형의 주택을 일절 건설할 수 없도록 강제하는 제도로 아파트 대량생산을 뒷받침했다. 반포동 압구정동 청담동 도곡동이 아파트지구로 지정됐다.
1976년에는 경기고가 이전하는 등 강북 명문고의 강남 이전이 시작됐다. 강남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민간업체의 아파트 건설 붐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1969년 만든 한남대교(제3한강교)와 1970년 개통한 경부고속도로는 한강의 기적과 대한민국의 상징이 되었으며, 여기서 잘 보이는 곳에 고급주택을 지어야 한다는 정권의 강박증이 있었다.
영동지구가 점점 시가지의 면모를 갖추면서 한강변과 경부고속도로에 인접한 압구정동은 강남의 노른자위 땅으로 급부상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혁신적인 디자인이나 고급스러운 시설을 도입한 건물이 아니다. 이곳이 한국에서 손꼽히는 고급 아파트 단지로 자리 잡은 것은 1978년 7월의 특혜분양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건설사는 아파트의 상당수를 정부 관리, 국회의원, 대학교수 등 고위급 인사들에게 주변 집값의 50% 수준으로 특혜 분양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이 사건은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고급 아파트의 대명사처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건설회사의 이름을 따른 아파트 이름이 유행처럼 늘어났다.
1980년대 후반에는 현대아파트를 중심으로 압구정동 고소득층 주거지에 커다란 문화적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해외로 조기유학을 떠났던 ‘압구정 키드’와 함께 미국 교포 2세들이 모여들면서 이곳은 젊은이들이 소비적 욕망을 분출하는 해방구가 됐다. 명품 거리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로데오거리가 형성되고 ‘오렌지족’이라는 신세대가 등장했다.”(이영범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 동아일보)
• 과일 채소 단지에서 아파트 단지로 상전벽해
강남은 한국 최초의 신도시이다. 서울시가 1962년 5월29일 국가재건 최고회의에 20년 후 서울시의 인구를 500만으로 늘리겠다며 강남을 후보지로 제시했다. 서울대 사대 지리학과과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 위촉으로 ‘서울지역확장을 위한 기초조사’한강 이남 14개면을 상대로 조사를 벌였다.
1965년 제2한강교(양화대교)가 완공되기까지 한강 교량은 1900년 준공된 한강철교와 1917년의 한강인도교(제1한강교) 광진교(1936년) 밖에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강남북 사이의 교통은 주로 나룻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강남 주민들 다수가 강북 시민을 위한 과수, 채소 등을 재배하였고, 이를 시내에 판매하기 위해 자주 한강을 건너야 했다. 당시 한강 나룻배는 대개 목선이었고, 이를 모터보트로 미는 방식으로 운행하였다.
모터보트 영업자들은 넘쳐나는 수요를 감당하기에 바빠 모터보트를 제때 정비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대형 참사가 1962년 9월 한남동 앞 한강 나룻배 전복 사고였다. 1962년 9월 한남동 나루터에서 승객 60여 명을 태우고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신사리[현재의 강남구 신사동]로 건너가던 소형 나룻배가 나루터에서 전복되는 대형 사건이 터졌다.
그랬던 강남이 강남 시대가 열리면서 특권계급화되었다. 강남 일대에 대형 고급 아파트단지가 즐비하게 늘어선 198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사회 저명인사들의 거주지 선호에 괄목할 만한 변화가 생겼다. 1978년 동아연감 인명록을 기준으로 서울시내 저명인사 가운데 80%가 강북에 거주했다.
그러나 11년이 흐른 1989년에는 그들의 54%가 강남지역에 살게 되었다(강병기, 1989). 당시 서울시 전체 인구 가운데 강남 거주자 비율이 48%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파워 엘리트의 주거지 이동이 보통 사람들보다 더 빨리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1970년대 말 부의 이른바 빅4, 종로 용산 성북 서대문에 저명인사는 불과 27%밖에 남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그 이후 계속 가속화하였다.
중앙일보 <조인스 인물자료 분석>에 따르면 2001년 서초, 강남, 송파의 이른바 강남에만 서울시 파워 엘리트 48%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게 되었다(김창석. 2002), 특히 의료인, 금융인, 기업인, 법조인 등 프로페셔널 직군 종사자들의 한강 도하 추이가 두드러졌다. 서울의 최상류층이 강북의 단독주택으로부터 강남의 아파트로 대거 이동한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압구정 1동은 거의 모든 직업에서 파워 엘리트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행정동으로 집계되었다. "아직도 강북에 사느냐?"가 시대의 유행어가 될 무렵, 강남구 압구정 동 현대아파트는 사회적 신분상승의 종착역으로 여겨질 정도였다(김형국). 이렇게 해서 강남은 특정한 방식의 도시적 삶과 욕망을 표시하는 기호가 되었다. 도시성의 중요한 특징으로 고급 고층 브랜드 아파트, 재산 증식 수단으로서의 아파트의 환금성, 중상계급이 선호하는 정치적 보수성 등을 모두 내포하게 되었다.
한국의 아파트는 무엇을 남겼을까?
첫째, 아파트가 콘크리트 도시의 상징이고 인간 소외를 부추겼다는 것이 가장 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은 섬으로 살 수 없으며 더불어 사는 존재인데, 고층 아파트의 주거 형태는 서로가 남남으로 살게 했다. 소필지 조직이 사라지면서 골목길 등 도시 생태계가 파괴되었다. 도시의 자율조정은 소필지에서 일어나는데 아파트 단지가 일단 들어서면 변신이 거의 불가능하다. 도시의 동맥경화다. 특히 급격한 인구감소가 진행되면서 앞으로 아파트 재건축도 힘들어지겠지만 재건축은 기존의 아파트 단지 원형을 따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확실히 도시의 자율조정은 어려워졌다.
1970년대 초 작가 최인호는 아파트에 사는 인간의 외롭고 고독한 내면관계를 다뤘다. 그의 소설 <타인의 방>은 아파트 이웃 간의 관계를 불편하게 묘사했고, 1990년대까지도 소설가 이외수는 아파트를 ‘인간 보관용 콘크리트 캐비닛’이라고 비하했다. 공동체 관념이 희박해지고 이웃개념을 상실하고 사회적 교류를 상실했다고 보았다. 1970년대 박완서의 초기 단편은 자신과 이웃의 단란한 가정 이면에 존재하는 위선과 모순을 발견하고 이웃의 시선에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주인공들을 보여주었다. (도시 공간의 게토화와 불안의 정동-박완서의 아파트 소설을 중심으로-이양숙, 서울시립대).
이러한 현상은 같은 아파트에서 자라나 같은 학교를 다니고 사설학원을 다니며 성장한 아파트 키즈들에게는 다르게 비쳐질 수 있다. 아파트가 소외된 공동체가 아니라 이웃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또한 한국형 아파트가 브랜드화되고 고급화되면서 체육시설과 도서관이 들어서는 등의 변화가 생기고 일정한 정도의 이웃관계가 아파트 단지내에서도 형성되었다. 캐슬형 아파트에서는 자녀와 재테크를 위한 정보공동체 기능까지 제공한다.
둘째, 아파트 단지화는 가장 한국적인 특징이다. 또한 계층화와 차별화의 기제로 작동한다. 외국인들은 아파트 단지가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 이상이 사는 고급 거주 지구라는 것에 놀란다. 구미권 선진국이나 일본에서는 아파트 단지를 쉽게 찾아볼 수 없다. 2차대전 이후 20~30년간 복지국가 시대를 경과하면서 도시 어디에서나 공원이며 녹지, 생활체육시설, 도서관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어 굳이 한국 처럼 자족적인 환경을 지닌 아파트 단지를 만들 이유가 없었다.
아파트가 대규모 가구가 함께 사는 단지화가 되면서 아파트 담장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한 구조로 바뀌었다. 도시를 연결된 공동체가 아니라 단지로 구분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 학교와 우체국 등 각종 공공기관이 있으며 독서실, 헬스, 실내골프, 목욕탕 같은 편의시설도 있다. 아파트의 한국화, 토착화가 만든 생태구조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재산과 기여로 아파트 안의 커뮤니티 시설을 지은 만큼 배타적이 된다.
관리비만 내면 기본적인 집 관리를 관리사무소가 해주는게 장점으로 부각되었다. 유례없는 장시간 고된 노동에 지쳐서 집에서는 쉬고 싶어하는 한국인들이 유독 단지식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다. 개인 주택은 집에 무슨 고장이 생기면 집 주인과 세입자 간에 갈등이 발생한다. 아파트는 다르다. 택배가 안전하게 전달되고, 겨울철 눈청소를 경비원들이 해주며 넉넉한 주차 공간이 있어서 이웃과 분쟁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한국인들은 이미 아파트의 생활양식에 적응하였다. 한국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되었다. 단지화는 필연적으로 아파트의 브랜드화로 이어졌고, 브랜드는 아파트의 정체성이 되었다. 한국의 아파트는 세계 도시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산물로 발전했다.
1990년대 말부터 e편한세상 래미안 등 아파트의 브랜드화가 시작되었는데, 2001년 롯데캐슬은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2023년에는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THE PLACE 73)라는 주상 복합 아파트 광고가 등장했다. 그런 광고를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브랜드 가치를 높게 한다는 생각에 저항감이 없어졌다. 아파트의 브랜드가 개인의 품격을 담보하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물론 이전부터 이러한 천박함은 늘 있어왔지만, 적어도 이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난 일은 없었다. 같은 단위의 지역에서도 이제는 어느 아파트의 단지에 사는지가 중요해졌다.
아파트의 브랜드가 개인의 품격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입주한 구성원들은 스스로 자신의 단지 주변에 성곽을 쌓아나갔다. 그것은 같은 단지의 아이들끼리만 어울리게 한다거나, 입주민이 아니면 출입을 금지한다거나 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아이들은 빌거, 연거(빌라 거주, 연립 거주) 같은 말로 친구들을 차별화했다. 우편번호로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이른바 '우편번호 정체성'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이런 토양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서열 체제로 인식하는 삐뚤어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라났다.
1970년대에 '반포족'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반포주공아파트 사는 사람들이 전화를 받을 때, ”예 반포입니다“라고 했던 데서 만들어진 말인데 드라마에도 등장했다. 반포 사람들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문화인데, 브랜드화로 이어진 단지화는 이제 아예 대놓고 차등화를 내세우게 되었다. 단지화는 이처럼 도시를 단절하고 소셜믹스를 어렵게 하며 부동산 투기를 부추키는 요인이 되었다.
셋째, 아파트가 이승만과 박정희가 표방한 대로 ‘생활혁명’이 되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군사정부는 “고식적이고 봉건적인 생활양식에서 탈피하여 현대적인 집단공동 생활양식을 취함으로써 경제적인 면으로나 시간적인 면에서 다대한 절감을 가져와 국민생활과 문화의 향상을 이룩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 중앙난방 욕실 온수공급 싱크대와 거실 등으로 조직된 아파트는 생활상의 편익을 제공해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남자 성인 중심의 가옥이 세대간, 젠더간에 평등해졌으며 식사의 민주화, 청소의 민주화를 가져온 점이다. 이것은 군사정권이 기대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전통적인 우리의 주거는 성리학적 철학의 토대 위에 지어졌다. 남녀의 영역이 구분되어 사랑채와 안채가 따로 있고 세대별로도 세대간에 위계가 분명했다. 조선시대 전통 한국은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공간적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사랑채, 안채, 별당채, 행랑채, 부속채 등으로 구분된 내부 공간에서 으뜸은 역시 사랑채였다. (김종현, 2005: 한옥공간연구회). 전통 한옥은 젠더나 세대의 측면에서 다분히 남자 성인 중심이었다. 한옥의 공간은 궁극적으로 가부장적 권력구조를 재생산하는 공간이었다.
주택 내부공간에서 성적 불평등의 감소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곳은 다름 아닌 부엌이다. 전통 한옥이나 단독주택에서 여성이 조리하던 공간은 위치나 크기 면에서 대단히 열세였다. 전통 한옥에서 부엌은 여자만의 공간이면서 특히 며느리의 공간이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초 아파트 주거양식에서 부엌은 '주방'으로 승격했다. 주방은 무엇보다 입식으로 설계되어 주택 내 다른 공간과 높이가 마침내 일치되었다.
또한, 난방이 분리되어 주방은 취사 전용 공간이 되었고, 급배수가 합쳐진 싱크대도 설치되었다. 과거에 지저분했던 부엌은 "실험실처럼" 정리되었고, 식사공간도 따로 분리되었다. 중산층이나 상류계층 주부들이 아파트에서 직접 부엌일에 종사하게 된 상황에서 그들은 부엌의 기능이 과학적으로, 부엌의 구조가 현대적으로 설계되도록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함한희).
그 결과, 부엌도 주택에서 어엿한 내부공간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고, 가족구성원 모두에게 평등하게 열린 공간이 되었다. 밥을 먹으려면 누구든 부엌 옆 주방으로 직접 이동해야 했던 것이다. 과거에는 사람이 붙박이고 밥상이나 다기와 같은 가구가 이동했는데, 붙박이는 대체로 남성이었고 운반자는 여성이었다. 말하자면 자연스럽게 전통가옥에서는 자연스럽게 남성이 여성의 상전이었는데 아파트 거주문화에서는 이제 남성도 신체가구를 이용할 스스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그 앞에서 가족구성원 모두가 남녀노소 불문하고 상대적으로 대등해진 것이다(전남일).
아파트에서 부엌 못지않게 남녀간, 세대간 평등화 추세를 보여주는 공간은 화장실이다. 24평형 정도의 소형 아파트에도 화장실이 두 개 설치되어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맞벌이부부가 늘어나면서 동시에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늘어나자, 소형 평수라도 화장실을 두 개 정도는 갖추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학교나 직장에 다니는 자녀까지 감안하면 여러 개의 화장실은 현대 생활의 필수조건이 되어 버렸다. 화장실 한 개를 바라보고 매일 아침 장유유서, 남녀차별을 지켰던 과거의 단독주택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이처럼 아파트 실내 공간 가운데 부엌이나 화장실, 목욕탕 등이 더욱 중요해지는 현실은 아파트 입주 결정권이 여성 쪽으로 대거 이동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이는 양성평등이라는 시대적 대세의 반영이다. 아파트 내부공간은 가족구성원 사이에 보다 평등한 사회관계를 지향한다. 성리학적 세계관을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의 아파트는 젠더나 세대와 관련된 한국사회 역학관계의 변화에 대해 항상 능숙하게 적응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남자 성인 공간의 축소다. 우선, 안방이 부부 공용의 공간으로 변했고, 남성의 공간이었던 사랑방은 접대와 가족 단란공간인 거실로 흡수되었다(전남일), 전통주택에서의 좌식 생활이 아파트의 입식생활로 바뀐 것도 양성평등의 관점에서는 일단 진보다.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2004)는 ‘아파트 공화국’(원제 서울, 거대한 도시, 빛나는 도시)에서 아파트를 단순한 주거시설이 아닌 현대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일종의 내시경으로 간주한다. 아파트를 알면 한국사회의 일상에서 부터 총제적이고 구조적인 특성을 볼 수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여성의 자궁경부암이 급속히 감소했는데, 아파트 거주 확산에 따른 샤워나 목욕이 일상화된 덕이다. ’생활혁명‘이 가져 온 긍정적 변화 중의 하나다.
인터넷 강국이 된 비결도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의 급속한 확산에서 찾는 분석이 있다.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공동주택 비율이 늘어나면서 초고속 통신망의 보급도 수월해졌다는 것이다. 자체적인 경비 조직과 방범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도 생활양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960년대만 해도 보릿고개와 춘궁기를 겪어야 하는 가난한 시대였다. 당시 옷 도둑 신발 도둑 각설이들이 넘쳐나서 불안해 했었는데, 아파트는 이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 주었다. 가정 주부들의 외출이 용이해졌고 이는 여성의 지위 향상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넷째, 여성의 경제적 지위 향상과 관련한 물음이다. 일본에 이어서 아파트는 복부인을 탄생시켰다. 민족문화백과 대사전에 따르면 ‘1970년대 이후 부동산 개발 열풍 속에서 부동산 투기에 몰두하여 금전적 이익을 도모한 여성’이 복부인이다. 이에 1970년대 초반에는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서울의 강남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강남 일대의 토지는 집중적인 투기대상이 되었으며, 투기를 통해 일확천금을 손에 쥔 땅 부자들이 속출했다.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충분했던 일부 가정주부들이 이러한 개발 열풍과 투기에 뛰어들어 투기열과 인플레를 더욱 심화시켰다. 투기는 토지에 국한되지 않고, 1970년대 중반 이후로는 아파트로 번져갔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투기의 상징적인 대상이 되었고, ‘복부인’이라는 신조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언론에 의해 ‘투기를 위해 복덕방을 수시로 출입하는 상류층 부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된 ‘복부인’은 이후 부동산 투기의 대명사로 대중화되어 국어사전에도 등재되게 되었다”
여성학자인 최시현 연세대 국학연구원 학술연구 교수는 2021년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에서 부동산이 여성의 일로 인식되고, 여성들이 부동산에 몰두하게 된 과정과 이유를 여성 담론으로 분석한다. 아파트 광고(“사람들은 집에서 꿈을 키웁니다. 남편의 성공, 가족의 건강과 화목, 그리고 아이들의 미래, 그 모든 것이 잘되기를 바라는 당신”- 2002년 한 아파트 건설회사의 아파트 지면 광고)는 부동산에 대한 여성 담론의 단편이다. 집은 '여자 소관'이라는 역할론, 좋은 집과 행복한 가정을 연결하는 담론은 무수한 일상 대화 속에서 재생산되면서 집을 갖고자 하는 열망, 즉 주택 열망은 젠더 수행과 강하게 결합한다.
급격한 산업화는 남성이 밖에서 근무하고, 여성이 집안일을 하며 아이를 돌보는 구조를 고착화했다. 여성은 남편이 받은 월급으로 생활하면서 저축하고 재산도 불리는 '알뜰 주부'가 돼야 했다. 자본주의에서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저금, 투자, 증여와 상속 등 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 저금과 증여·상속은 상대적으로 남성이 우위를 점했지만, 투자만은 부동산 때문에 여성에게 유리한 기회가 주어졌다. 여성은 '집사람'으로서 집에 관해 더 많은 능력을 발휘할 것을 요구받았다.
집이 곧 부동산으로 여겨지자 여성의 지위 이동 가능성이 열렸고, 집은 경제적 자산이자 자본이익을 만들어내는 수단이 됐다. 부동산이 가족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고 집값 상승으로 가치가 높아지자 돈을 만져본 여성들은 부동산으로 자신의 생산성과 경제적 생존력을 증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부부 관계에서 권력의 변화를 경험하기도 했다.
허영란은 ‘역사의 시련과 억척스런 역사의 탄생’에서 가정경제를 거의 전적으로 여성이 관리하는 책임에 대해서 분석한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도 여성은 가정을 지키는 어머니로서, 산업화에 공헌하는 노동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여성은 ‘복부인(福婦人)’으로서 가족의 경제적 상승을 추구하고 실현시키는 당사자였으며, 자녀 교육을 위해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어머니였다. 이처럼 여성이 담당하는 가족 지위의 재생산 활동은 선진 공업국보다 후발 공업국에서 좀 더 강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확실히 구분되어 있지 않는 사회 여건일수록 여성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억척스럽고 유별난 한국 여성’은 이러한 시대적 필요에 따라 탄생하였다.
산업화와 도시화, 그에 따른 가족 관계의 변화는 전통적인 남존여비 의식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규범적 질서를 크게 약화시켰다. 남녀유별에 대한 강박관념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의존적이고 소극적인 아내보다는 가족 전체를 통솔하는 어머니상이 오늘날까지 여성의 이미지를 지배하고 있다. 어려운 생계를 돕기 위해 노동에 종사하는 동시에 빠듯한 살림살이를 유지하는 책임도 주부가 맡아야 했다. 주부가 가정 경제를 거의 전적으로 관리하는 현상은 살림을 알뜰하게 꾸리지 않으면 가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원인이 있지만, 살림을 유지하고 부흥시키는 책임을 여성에게 변함없이 지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섯째, 성냥갑 아파트에 대한 비판이다. 공급측면에서 볼 때 고층화와 고밀화는 주택 한 채가 차지하는 토지면적을 절대적으로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어서 주택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게다가 신속하고 저렴하게 주택을 공급하려면 아파트를 규격화하는 방식이 유리했다. 같은 설계, 설비와 자재를 여러 건설현장에서 돌려가며 쓸 수 있었고 무난한 스타일(성냥갑)의 범용성 주택을 찍어내는 시대가 되었다.
1982년 부터 주택공사는 ‘주택 기본 설계’를 매년 발간했는데 아파트의 공장 역할을 맡았다. 이것이 서울의 스카이라인과 건축미를 압살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08년 3월 부터 서울시가 디자인서울을 표방하여 아파트의 모양이나 층수를 다양하고 개성있게 짓도록 규정하여 300가구 혹은 5개동 이상의 주상복합은 디자인과 높이를 각각 두가지 이상의 타입으로 짓도록 했다.
여섯째, 미국인 인류학자 렛은 우리나라의 소위 '아파트 경비'가 사실상 '하인(servant)'의 역할을 당연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장바구니 받아들기, 화분 옮겨심기, 손가락 다친 아이들 반창고 붙여주기, 자전거 옮기는 아이들 도와주기, 친절하게 불평과 험담 들어주기, 메시지 보관과 전달 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아파트 경비원들은 입주민을 부를 때 남자의 경우 '사장님 아니면 '선생님 그리고 여자는 '사모님'으로 호칭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야단치는 것은 절대 금기라고 한다. 이는 하인이 결코 상전의 자녀를 나무라는 법이 없던 유교적 전통사회의 관행을 떠올리게 한다.
줄레조 역시 자신이 인터뷰한 아파트 경비 아저씨들의 업무가 건물의 공용 공간 관리나 유지 등 고유 업무에 한정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전한다. 그의 관찰에 의하면 심부름꾼의 일이 비공식적으로는 경비인의 업무에 포함된다' 는 것이다. 실제로 아파트 경비원을 지낸 사람의 증언을 들어보면 ”주민들 주머니에서 월급이 나온다"는 이유로 경비원을 마치 '몸종 부리듯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아파트 경비원의 주요 임무는 도난방지 및 입주민 사생활 보호다.
아파트 주민들의 갑질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비원들의 이야기가 사회적 이슈가 됐고, 이들의 이야기는 ‘임계장이야기‘(임시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 조성진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로 발간되었으며 임계장이 머슴 취급받지 않는 나라는 가능한가라는 사회적 질문을 던졌다.
이 밖에 가구와 인테리어 등 한국 사회의 문화 전반을 바꾼 것도 아파트다. ”한옥과는 달리, 그림을 걸 수 있는 혹은 걸어야 하는 공간이 많아져서 미술시장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우리나라 미술시장에서는 1950년대 한옥시대만 하더라도 추사의 글씨나 대원군의 난초 그림이 최고 인기였다. 1960년대 들어와 양옥이 늘면서 서예와 사군자 대신 이상범 변관식 노수현 등의 동양화가 유행했다. 1970년대 후반 강남지역에 대형 고급 아파트가 늘면서 동양화 시장이 급속히 위축되는 대신 추상화 계열의 서양화가 새로운 트렌드로 급부상했다. 2000년대 이후 타워팰리스 등 초고가의 대형 아파트가 들어서자 이번에는 고가의 외국작품이 앞 다투어 유입되기 시작했다“<헤럴드 경제 2007.8.21>
이렇게 해서 아파트는 한국 사회 건축의 지배종이 되었다. 그 사이에 골목이 사라졌고, 이웃도 변했다. 재래시장 대신에 마트가 들어섰다. 남은 주택은 대부분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 대기중이다. 주택의 경로가 정해져 버려서 다시 이를 돌리기가 어려워졌다. 거주 생태계의 새로운 조성도 쉽지 않다. 급격한 인구 감소가 불러 올 아파트의 공실, 슬럼화는 지방에서부터 충격으로 다가와 수도권까지 덥칠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내가 사는 아파트는 예외일 것이라며 더 좋은 아파트를 계속하여 선호할 정도로 아파트 사랑은 한국인의 DNA가 되었다.
참고자료/ 기사로 작성하다 보니 일일이 각주를 달지 못했는데 아래 서적을 참고했음을 밝혀둔다.
<아파트공화국> 발레리 줄레조 / 후마니타스<아파트: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 박철수 /마티<아파트 한국사회: 단지 공화국에 갇힌 도시와 일상> 박인석 / 현암<경성의 아파트> 박철수 등 / 집<아파트의 문화사> 박철수 / 살림출판사<아파트게임: 그들이 중산층이 될 수 있었던 이유> 박해천 / 휴머니스트<아파트, 신뢰를 담당> 유나연 / 행복에너지<곽재식의 아파트 생물학> 곽재식 / 무지 그림<부동산 약탈 국가> 강준만 / 인물과 사상사<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종암에서 힐탑까지)> 장림종 공저 / 효형출판<아파트에 미치다:현대 한국의 주거사회학> 전상인 / 이숲<도시의 생존> 에드워드 글레이저 등 / 한국경제신문<강남의 탄생> 한종수 계용준 강희용 / 미지북스<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최훈<아파트 사회학> 서정열 / 이담<한국 주거의 사회사, 한국 주거의 미시사, 한국 주거의 공간사> 전남일<나는 남편에게 아파트를 선물했다> 이진화 / 엄마코끼리<아파트 속 과학> 김홍채 / 어바웃어북<강남에 집 사고 싶어요: 강남 거주 30년 워킹맘의 교육, 투자 이야기> 오스틀로이드 지음<부동산 공화국 경제사> 전강수 / 큰글씨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