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순 칼럼] 대만을 3차례 포기했던 미국, 2024년 대선 이후 선택은? (3)
세 번째 사례 :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상호방위조약 파기하고 주둔했던 미군도 철수
최근 트럼프 前 미국 대통령은 선거 유세 과정에서 ‘유사시 대만 지원’ 여부에 대한 질문에 모호하게 답변하고 있다. 미국은 근현대사 속에서 3차례 대만을 포기한 바 있다. 이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대만 국민은 4번째 외면당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하고 있다. 역사를 되돌아봄으로써 중대 국면에 접어든 미국-대만 관계를 조망하는 4편의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뉴스투데이=임방순 前 국립인천대 교수] 미국은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침략하자 즉각 한국에 군사개입을 결정하면서, 동시에 대만 해협에도 7함대를 파견했다. 모두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였다. 미 7함대 항공모함이 대만 해협으로 진입하자 마오쩌둥은 더 이상 대만을 침공할 수 없었다.
제7함대 사령관 아서 스트러블(Arthur D. Struble) 제독은 타이베이를 방문해 장제스 총통과 미·대만 연합방위작전을 논의하기도 했다. 2개월 후인 8월에 미 태평양사령부 예하 공군 제13 항공대가 대만에 진주하면서 미군의 대만주둔 시대가 시작됐다. 이어서 미국은 ‘대만 해협 중립화’를 선언하고 국민당 정부에 재정·물자 지원을 재개했다.
■ 미국은 대만과 ‘상호방위조약’ 체결하고 대만주둔 ‘협방사령부’도 설치
마오쩌둥은 ‘대만 해방’을 뒷날로 연기하고 남부지역의 50만 병력을 동북지역으로 이동시켜 6.25 전쟁 전황 변화에 대비했다. 하지만 대만 해협에서 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중국이 1954년 9월부터 진먼(金門)도와 마쭈(馬祖)도에 포격을 가하고 저장성 타이저우(臺州) 앞바다의 이장산다오(一江山島)와 다천다오(大陳島)를 점령하는 1차 대만해협위기가 발생하자, 미국은 중국의 침공을 막기 위해 대만과 1954년 12월 2일 ‘미·중(대만)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장제스 아들인 장징궈(蔣經國) 前 총통의 평전에 따르면, 장제스는 이 조약을 ‘흑암(黑暗) 중에 비친 한 줄기 서광(曙光)’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조약 체결 이듬해인 1955년 1월 미국은 대만 타이베이시에 미 태평양사령부 예하 대만주둔 ‘협방사령부’(協防司令部, United States Taiwan Defense Command; USTDC)를 설치하고, 사령관으로 미군 중장을 임명했다.
이어 4월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미 공군 제16 전투비행단과 제25 전투비행단이 대만으로 기지를 이전했다. 또한, 미 해군 7함대가 타이베이에 대만연락센터를 개소했다. 1960년대 중반에 대만에 주둔하는 미군은 최대 3만 명에 이르렀다. 냉전 시기에 대만은 공산세력 확산을 저지하는 ‘불침항모’였다.
■ 미·중, 소련 견제에 이해가 일치해 협력 모색하며 ‘상하이 공동성명’ 선언
미국은 1960년대 베트남전 장기화로 경제 상황이 악화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대외군사개입을 줄이면서 군비를 축소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 미국이 주목한 것은 중국과의 협력이었다. 미국이 중국에 베트남과 한반도에서 더 이상 군사모험 주의를 지원하지 않게 하고, 동시에 중국과 손잡고 소련을 견제한다면 바로 미국의 국익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중국 또한 미국의 협력이 필요했다. 중국은 1960년대 초부터 소련과 분쟁이 시작됐고 1969년 전바오다오(珍寶島) 무력충돌을 거치면서 소련을 제1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소련 대항에 이해가 일치한 양국은 서로가 협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요구는 ① 대만과의 국교 단절 ② 대만과의 상호방위조약 폐기 ③ 대만에서 미군 철수 등 3가지였고, 미국은 중국이 제시한 조건을 수용했다. 대만을 포기한 것이다.
1971년 7월 키신저 국무장관이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했고, 이듬해인 1972년 2월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다. 그 결과를 담은 것이 ‘상하이 공동성명’(제1차 미·중 공동성명)이다. 이 성명을 통해 양국은 20여년 간에 걸친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관계 정상화를 천명했다. 주요 내용은 ① 대만이 중국 일부임과 중국인 자신에 의한 대만 문제의 평화적 해결 필요성을 인정하고, ② 정세 추이에 따른 대만주둔 미군 철수를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최대 약 30,000명이었던 대만주둔 미군은 1972년 ‘상하이 공동성명’ 선언 이후 1973년 4월에 12,000명으로 크게 줄었고, 1974년 9월에는 5,800명으로 계속해서 감소했다. 이러한 주둔 규모 감소는 데탕트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가속화돼 1978년 9월에는 753명에 불과했다. 대만주둔 미군 사령관의 계급도 중장에서 소장으로 낮아졌다.
■ 미국,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상호방위조약 파기하고 미군도 철수
1979년 1월 1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중국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체결하면서 대만에 상호방위조약 파기를 일방적으로 통보했으며, 1979년 12월 31일 공식적으로 최종 폐기됐다. 이는 미국이 체결한 양자 간의 상호방위조약 중 최초로 파기된 사례가 됐다. 미국은 이 사실을 마지막 순간까지 대만에 비밀로 했다.
새벽 2시에 이 소식을 들은 대만 총통 장징궈는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대만은 떠나가는 미군을 붙잡아 둘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없었다. 1979년 4월 26일 대만주둔 협방사령부는 마지막 하기식을 거행한 뒤, 5월 3일 사령관 제임스 린더(James B. Linder) 소장이 대만을 떠나면서 전원 철수가 이뤄졌다.
미·중 수교가 1972년 닉슨 방중 이후 6년이 흐른 1979년에 체결된 이유는 대만 문제에 대한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하나의 중국원칙은 수용하되 대만의 실체는 인정하려는 입장이었지만, 중국은 미국에 대만에 무기판매 등 어떠한 개입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국은 소련이 베트남을 지원해 자국의 남쪽을 위협하고 있고 북쪽 국경에서도 소련의 위협이 상존함에 따라 미국과 수교를 마냥 연기할 수 없었다.
■ 중국과 미국은 대만 문제에 하나씩 양보하면서 긴 수교협상 마무리
덩샤오핑(鄧小平)은 대만이라는 작은 영토를 회복하는데 치중할 것인가, 소련의 고립정책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가를 고민하다가 ‘대만 해방’을 연기하고 ‘소련 대항’을 선택하면서 미국의 대만 무기판매를 묵인했다. 미국 또한 중국이 요구했던 대만과 단교를 수용하고 실질적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여, 중국과 미국은 대만 문제에 대해 하나씩 양보하면서 긴 수교협상이 마무리됐다.
미국과 중국은 1978년 12월 15일 외교 관계 수립을 선포하면서 ‘제2차 미·중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일한 합법 정부이며 대만은 그 일부라는 중국의 입장을 인정한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은 대만과 문화, 통상 및 기타 비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갈 것이다”였다. 그리고 이어서 미국은 1979년 4월 대만에 방어용 무기를 판매할 수 있다는 ‘대만관계법’(Taiwan Relations Act)을 국내법으로 제정했다,
미국은 자신의 국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대만을 포기했다. 그러나 대만은 미국과 중국이 수교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안보가 ‘협상 카드’로 취급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미국이 ‘미·중(대만) 상호방위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미군을 철수시켜도 대만은 떠나가는 미국을 원망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대만 국민은 미국에 안보를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새기게 됐다.
◀ 임방순 프로필 ▶ ‘어느 육군장교의 중국 체험 보고서’ 저자. 前 국립인천대 비전임교수, 前 주중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前 국방정보본부 중국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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