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순 칼럼] 대만을 3차례 포기했던 미국, 2024년 대선 이후 선택은? (2)

김한경 안보전문기자 입력 : 2024.03.04 10:05 ㅣ 수정 : 2024.03.04 10:05

두 번째 사례 : 중국공산당에 호의 보이기 위해 대만을 제외한 태평양 지역 방어선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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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트럼프 前 미국 대통령은 선거 유세 과정에서 ‘유사시 대만 지원’ 여부에 대한 질문에 모호하게 답변하고 있다. 미국은 근현대사 속에서 3차례 대만을 포기한 바 있다. 이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대만 국민은 4번째 외면당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하고 있다. 역사를 되돌아봄으로써 중대 국면에 접어든 미국-대만 관계를 조망하는 4편의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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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임방순 前 국립인천대 교수] 마오쩌둥이 신중국 건국을 선포한 후 제일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은 장제스가 스탈린에게 넘긴 만주의 이권을 되찾아 오고, ‘대만 해방’을 위해 소련으로부터 해·공군의 지원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마오쩌둥은 이를 위해 1949년 12월 16일부터 1950년 2월 17일까지 2개월 동안 모스크바에 머물렀다. 

 

스탈린은 만주 이권을 마오쩌둥에게 돌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마오쩌둥은 훗날 이 회담에 대해 “호랑이 입속에 들어가 있는 고기 덩어리를 다시 꺼내는 일이었다”라고 회상한 바 있다. 정상회담이 해를 넘기며 1개월 동안 계속되자 미국은 중공과 소련 사이에 뭔가 불협화음이 있음을 감지하고 중공과 소련의 이간을 시도했다.

 

미국은 중·소 간 사이를 벌리기 위해 중공에 대만이라는 카드 던져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Dean Acheson)은 마오쩌둥과 스탈린이 담판하던 시기인 1950년 1월 12일 워싱턴 내셔널프레스 클럽 강연에서 “미국의 태평양 지역 방어선은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을 거쳐 오키나와로 연장되는 선에서 필리핀으로 연결된다”라며 소위 ‘애치슨 라인’을 밝혔다. 그는 “미국은 현재 대만에 대해 특별권리 혹은 군사기지의 건립을 추구할 의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중국 정세에 대해 무력간섭할 뜻이 없다”라는 요지의 연설도 했다. 

 

미국이 왜 극동방위선에서 대만과 한국을 제외했는지 현재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아태전략연구소사이어티 편집부’가 발간한 ‘Another & Final Withdrwal of US Forces Korea’라는 저서에서는 ‘애치슨 선언’은 “‘중공이 미국과 손잡고 소련에 맞서 준다면 대만이나 남한 정도는 중공에 넘겨줄 용의가 있다’라는 미국의 거래 제안이었다”라고 분석한다. 즉 중·소 간에 사이를 벌리기 위해 중공에 대만이라는 카드를 던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애치슨의 연설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담판 중인 마오쩌둥을 겨냥한 것이었다. 제정 러시아가 중국 헤이롱장(黑龍江) 성 일대와 연해주 땅을 뺏어간 것처럼 ‘소련이 사회주의 국가가 된 후에도 여전히 영토를 탐내고 있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보이고 있다’라고 폭로하면서, 양국을 갈라놓으려는 의도였다. 

 

소련의 몰로토프(Molotov) 외상은 연설이 나온 며칠 후 마오쩌둥에게 “애치슨 연설의 목적은 소련과 중공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것”이라면서 반박 성명을 내자고 요구했고, 마오쩌둥은 난처했다. ‘애치슨 연설’은 당시 중·소 관계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마오쩌둥과 스탈린 모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결국 신화사 사장 명의로 격을 낮춰서 애치슨 연설을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소련은 중공에 만주 이권 돌려주고 추가로 요청한 해군 함정 등도 지원 

 

소련은 미국의 ‘애치슨 라인’ 발표 이후, 중공이 미국과 손잡을 수 있다고 우려하며, 마오쩌둥의 요구대로 만주의 이권을 중공에 돌려준다. 당시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영국 등 서방과 관계를 강화하겠다고 소련을 압박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1945년 8월 14일 장제스와 체결한 ‘중·소 우호 동맹조약’을 파기하고 마오쩌둥의 요구를 수용해 ‘新중·소 우호 동맹조약’을 맺는다. 

 

미국이 대만 포기 의사를 표명하면서 중공에 호의를 보여 중공·소련을 이간시키려는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오히려 소련·중공 밀착이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소련으로부터 만주의 이권을 회수하고 관계도 공고히 한 마오쩌둥의 다음 목표는 ‘대만 해방’이었다. 마오쩌둥은 ‘대만 해방’을 위해 12개 군단의 약 50만 병력을 투입해 화동군구(華東軍區)를 창설하면서 천이(陳毅)를 ‘대만해방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또한, 스탈린에게 해군 함정과 공군 전투기 제공을 거듭 요청했다. 스탈린은 최초에는 중국에서 철수하고 있는 미국을 자극해 다시 개입할 수 있다는 우려로 지원을 거부했지만, 마오쩌둥과 ‘新중·소 우호 동맹조약’을 체결하면서 1951년 봄 이전까지 중공이 요구하는 해군 함정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섬인 대만에서 고립무원의 상태로 중국 인민해방군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미국은 대만의 안위보다는 중국이라는 대륙을 장악한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섬에서 저항하고 있는 대만 국민당은 미국으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일방적으로 희생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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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순 프로필 ▶ ‘어느 육군장교의 중국 체험 보고서’ 저자. 前 국립인천대 비전임교수, 前 주중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前 국방정보본부 중국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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