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고 원인 지목된 ‘성과 압박’...은행권, KPI 개편하나
고객에 고위험 투자 상품 판매 늘려가는 은행권
금융사고 배경에 은행원들 실적 압박 작용 지적
KPI 배점 부담에 공격적·불건전 영업 행위 빈번
‘상품 판매→고객 보호’ KPI 개편 움직임 감지돼
금융당국 내년부터 은행권 KPI 적정성 점검키로
[뉴스투데이=유한일 기자] 최근 은행권에서 발생한 각종 금융사고 원인 중 하나로 ‘성과 압박’이 지목되고 있다. 은행원들이 승진 심사나 성과급 책정의 기준이 되는 핵심성과지표(KPI)를 채우기 위해 무리한 영업 현장에 내몰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각 은행들은 판매 실적 비중 축소 등 KPI 개선 작업에 돌입했고, 금융당국도 내년부터 적정성 점검을 예고했다.
28일 금융권에 따르면 국책은행과 시중은행 등의 노동조합이 소속된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은 최근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대응을 촉구하는 내용의 성명서에서 “경영진들은 즉시 고위험 상품에 대한 KPI 부여와 프로모션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KPI는 조직 전략 목표 달성에 대한 기여도 개념이다. 회사 직원들에겐 사실상 정기적으로 받아드는 성적표다. 은행권의 경우 예·적금 가입과 대출 실행, 각종 투자 상품 판매 등의 실적이 정해진 비중에 따라 배점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최근 은행권에서 일어난 금융사고 배경에 KPI가 잇따라 거론되고 있는 점이다. 각 은행마다 KPI 세부 구성은 상이하지만, 통상 투자 상품에 높은 배점이 주어진다. 만약 승진 시기 등이 도래한 은행원 입장에선 정기예금 하나 파는 것보다 투자 상품을 파는 게 효율적인 셈이다.
내년 상반기 5~6조원대 원금 손실을 예고한 H지수 ELS 사태도 KPI 부담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 11월 기준 금융권 H지수 ELS 총 판매 잔액 19조3000억원 가운데 은행권이 15조9000억원으로 82.1%를 차지했다. 상대적으로 은행권은 안정성을 추구하는 고객이 많은데, 일부 영업점에서 수수료 이익 제고 등을 위해 무리한 영업에 나섰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노조는 “ELS는 은행들이 오래 판매해 온 상품”이라며 “H지수가 50% 이상 떨어지는 일은 없을 거니 안심하고 팔라고, 경쟁 은행보다 비(非)이자 이익을 더 내야 하니 KPI에도 넣고 프로모션도 하라고 한 것은 명백히 무책임한 경영진의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2019년 불거진 파생결합펀드(DLF) 대규모 원금 손실 사태도 은행권의 단기 실적 문화가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됐다. 당시 금융당국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하나·우리은행은 프라이빗뱅커(PB) 센터의 비이자 수익 KPI 배점을 경쟁 은행 대비 최대 7배 높은 수준으로 부여했다. 사실상 공격적인 DLF 판매를 영업 전략으로 설정한 셈이다.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예를 들어 정기예금 가입이 (KPI) 1점이라고 하면 투자 상품 가점은 이보다 꽤 높이 해뒀다”며 “고객이 100만원을 들고 와 예금을 해달라고 하는 경우에 (점수를 위해서) 조금은 분산해 가입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무리하게 (투자 상품을) 권유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앞서 대구은행에서 발생한 ‘불법 증권계좌 개설’ 사태 중심에도 은행원들의 실적 부담이 자리한다. 대구은행이 KPI 증권계좌 개설 만점 기준을 기존 1계좌에서 2계좌로 강화하고, 개인 실적에도 이를 중복 반영했기 때문이다. 이 결과 56개 영업점 직원 114명이 1600여개에 달하는 증권계좌를 고객 몰래 개설했다.
은행원들의 실적 부담이 공격적·불건전 영업 활동의 배경이 되고, 결과적으로 고객 피해를 야기하는 문제가 되풀이하고 있는 만큼 KPI 개선 필요성이 제기된다. 통상 은행들은 주기적으로 KPI 운용 항목을 조정하는데, 앞으로 고객 보호 부문 배점이 확대 적용될 가능성도 있다.
한 시중은행의 관계자는 “이미 KPI에는 다양한 항목이 만들어져 있다. 없던 내용이 추가된다기보다는 배점에 있어 세부적 내용이 구체화되는 수준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며 “양적 성장만큼 질적 성장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도 특정 금융 상품 판매 실적과 KPI를 연계 시 금융사고 발생 가능성이 증가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에 각 은행 준법감시부서 등에서 KPI가 불건전 영업 행위를 유발하는지 여부를 정기적으로 점검하도록 지도하고, 내년 4월에는 적정성 검사에 돌입하기로 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은행권에 준법 경영 문화가 정착되고 사고 예방을 위한 내부통제가 보다 실효성 있게 작동될 때까지 강도 높은 감독 활동을 지속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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