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36)] 부대이전사업을 통해 얻은 보람과 애환(중-1)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1.12.22 15:52 ㅣ 수정 : 2022.01.04 09:03

수방사령관은 임기가 끝나면 주요보직을 거쳐 거의 대장으로 진급하는 황금급 핵심 직책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밴드
  • 페이스북
  • 트위터
  • 글자크게
  • 글자작게
image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나무위키에 따르면 “원래 수방사령관은 하나같이 군에서 인정받은 사람이 차지한 직책”이라고 했다. 

 

1961년, 초대 김진위 장군부터 ‘자랑, 즐거움, 보람’이라는 구호를 제창한 9대 박세직을 거쳐 10대 최세창 장군까지는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소장급이 임명되었다. 1984년, 11대 이종구 장군부터는 ‘수도방위사령관’으로 호칭이 바뀌며 중장급으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특히 노태우, 최세창, 이종구, 고명승, 김진영, 구창회, 김진선 등 12.12에 기여했던 하나회 출신 및 관련된 인물들이 수방사령관직을 독식했으며, 임기가 끝나면 주요보직을 거쳐 거의 대장으로 진급하는 황금급 핵심 보직이었다. 

 

그러나 장태완 수경사령관처럼 12.12사건 때에 신군부를 반대하며 자기 소신을 지키다 밀려버렸다거나, 본인 내지 부하가 사고를 쳤다든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운이 없었던 박남수, 신원식, 김용현, 구홍모 등의 수방사령관은 대장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전역했다. 

 

또한 준장 및 소장급이 임명되던 청와대 국방개혁비서관으로 추천받은 김선호 수방사령관(육사 43기)은 청와대 비서관에 중장급이 보직되어 군 위상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등의 이유로 임명을 고사하다가 자진 전역했다. 

 

이와 같이 현재는 수방사령관 출신들의 대장 진급은 예전 같지 않다. 전통으로 야전에서 진급 보증수표인 5군단장은 기본에, 1군단장에도 확실히 밀렸고, 심지어 예전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3군단장이나 8군단장 출신에도 슬슬 밀리는 상황이다.

 

거의 10년 동안 대장 진급자가 나오지 않다가 2020년 9월 인사에서 33대 수방사령관 김정수(육사42) 장군이 대장 진급에 성공했다. 

 

image
▲ 김도균 소장이 국방부 대북정책관으로 남북 장성급 회담시 악수를 하는 장면과 문재인 대통령에게 35대 수방사령관 취임신고후 기념촬영 모습 (사진=연합뉴스)

 

현재 35대 수방사령관으로 임명된 김도균(육사 44기) 소장은 국방부 대북정책관을 지내며 북한과의 9·19 군사합의를 주도했다는 사실만으로 ‘중장으로 파격 승진’하여 임명됐다.

 

김 중장은 사단장을 지내지 않고 곧바로 군단장급인 수방사령관에 임명된 최초의 사례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수방사령관으로서 김 중장의 대북 협상 경험과 유관 기관과의 협업 능력, 위기관리 능력을 고려했다”고 했다. 

 

하지만 군 관계자는 “수방사령관은 전시에도 연합사령관이 아닌 한국군의 직접 지휘를 받는 직위”라며 “사단장으로서 1만명도 지휘해보지 않았는데 4~5만명의 군단급 병력을 어떻게 지휘할지 의문”이라고 했다

 

또한 북한의 GP 총격 사건으로 9·19 군사합의 실효성에 의구심이 드는 상황에서 군사합의를 주도한 김도균 장군을 중장으로 승진시킨 데 대해서도 군 안팎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있었다. “정권 코드에 맞는 일을 하면 무조건 잘된다는 신호 아니냐”라고 토로했다. 

 

게다가 북한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창린도 도발이나 GP 총격 사건으로 사실상 군사합의가 유명무실화된 상황에서, 오히려 그 합의를 주도했던 인사를 파격 승진시켰다는 지적도 있었다.

 

image
▲ 15대 수방사령관 구창회 장군(육사18기)와 16대 김진선 장군(19기) (사진=연합뉴스)

 

16대 수방사령관으로 취임한 김진선 장군은 ‘충성, 명예, 단결’을 강조

 

필자가 수방사령부에 보직되어 근무할 당시의 사령관은 구창회 장군(육사 18기)이었다.

 

구 사령관 역시 과거 12.12사건 때에 출동했던 9사단장 노태우 장군의 참모장으로 근무했으며 하나회 출신으로 황금급 핵심 직책이었던 수방사령관직을 거쳐 보안사령관직을 수행한 후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노태우 대통령에게 수방사 이전 계획을 별도로 보고하고 재가를 받았던 구창회 사령관 후임으로 역시 12.12사건과  긴밀하게 관련되었으며 장군으로 진급하여 7사단장을 마친 김진선(육사 19기) 장군이 1990년 10월에 16대 수방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김 장군은 과거 동대문운동장에서 3군 사관학교 체육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중령이었는데, 당시 대통령도 참관했던 축구 경기에서 특전복 차림으로 운동장에 뛰어들어 육사 선수들에게 불리하게 편파 판정을 한 심판을 이단 옆차기로 차버릴 정도로 승부 근성이 강한 군인이었다.

 

특히 김진선 사령관은 12.12사건 때에 중령으로 수경사 상황실장직을 수행하면서 9사단 등 하나회가 주축이 된 군부대 출동을 묵살하고, 당시 수경사령관 장태완 장군에게 보고를 안할 정도로 하나회와 관련된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에 5공화국 시절의 당연한 수순을 밟아 수방사령관으로 보직되었다.

 

그는 부임 직후 대통령께 충성하는 것이 군인의 기본자세임을 힘주어 말하며 당시 수방사의 구호였던 ‘충성, 명예, 단결’을 강조했다.

 

‘충성’은 전투중에 적에게 포위되어 피탈 위협이 있을 때에 진내사격을 요청하는 것은 아군 포탄에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자아본능과 충성심의 교차로에서 당연한 조치이며, ‘명예’는 다수가 인정하는 군인다움이고, ‘단결’은 운동을 통해서 육성될 수 있다고 훈시했다.

 

비록 12.12사건시의 행동은 역사의 재평가를 받고 있지만, 3군 사관학교 체육대회에서의 행동이나 부임 후의 첫 강조사항들을 볼 때 저돌적인 근성과 야전 군인다운 순수성을 느낄 수 있었다.

 

image
▲ 좌측 수경사와 수방사 장병들의 과거 복장과 우측 1990년 이후 육군 타부대와 동일한 얼룩무늬 전투복으로 변경된 복장으로 최근 김도균(육사 44기) 수방사령관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설명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부대이전 사업 전에 복장 개정을 통한 '아스팔트 군인물 빼기'로 야전부대화

 

일반적으로 육군 장병들의 근무지를 말할 때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로 비교한다.

 

오늘날과 같이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당시 한강 이북의 많은 부대들의 주둔지 주변은 대부분 비포장도로였다. 이동이나 행군 및 훈련 시에는 비포장도로를 이용해야만 했고 바람이 불거나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흙먼지를 마시며 온몸이 뽀얗게 흙먼지를 뒤집어써야 했다.

 

반면에 수방사나 한강 이남의 부대에서 근무하는 장병들은 그나마도 아스팔트 도로를 활용하다 보니 비교적 깨끗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었다.

 

따라서 전방 야전부대에 근무하는 장병들은 수방사나 주요 도시에 근무하는 장병들을 ‘아스팔트 군인’이라고 호칭했고 은근히 그곳에서 근무하기를 선호했다. 

 

중령시절 수경사령부 상황실장과 최전방 격오지 7사단장을 역임했던 김진선 수방사령관은 부임하자마자 수방사의 야전부대화를 강조했다.

 

마침 육군이 미군 복장과 유사하게 밋밋한 국방색에서 위장 효과가 있는 얼룩무늬 전투복으로 변경되고 있었는데, 이 기회를 활용하여 위의 사진과 같은 카키색의 수방사 근무복장을 얼룩무늬 전투복으로 변경하며 ‘아스팔트 군인물 빼기’로 수방사 야전부대화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김 사령관은 부대이전 사업을 진행하기 전에 육군 최초로 수방사부터 신형 얼룩무늬 전투복을 입기 시작한다며 수방사 근무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기존의 카키색 복장을 애호하던 많은 수방사 장병들의 불만을 해소시켰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댓글 (0)

- 띄어 쓰기를 포함하여 250자 이내로 써주세요.

- 건전한 토론문화를 위해,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비방/허위/명예훼손/도배 등의 댓글은 표시가 제한됩니다.

0 /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