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두의 K-Sapience (34)] 한국의 개신교 보수화④ 박정희에서 전두환까지
박정희 시대=개신교의 비약적 교세 확대, 새로 출현한 민중신학은 탄압받아
전두환 시대=불교계 정화에 나서고, 보수 개신교는 전두환 조찬기도회 열어
[뉴스투데이=민병두 회장] 박정희는 어릴 적에 구미에 있는 교회를 다녔다고는 하지만 종교적으로는 모호했다. 육영수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는 이승만 장면 처럼 국가의식을 기독교식으로 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유교 불교, 나중에는 불교 개신교 가톨릭를 초대해서 의식을 치렀다. 박정희 시기를 특징지우는 것은 개신교의 비약적 교세확대이다. 조용기의 순복음 교회 등 초대형 교회가 만들어졌다. 또 한편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탄압을 받았다.
박정희는 취약한 기반을 넓히기 위해서 적절하게 종교를 활용했다. 호국불교가 다시 등장한 것도 불교와의 관계 개선의 결과이다. 반공을 고리로 하여서는 개신교와 우호관계를 유지했고, 전통문화를 매개로 하여서는 불교와 잘 지냈다.
박정희 시대에는 개신교 입장에서 볼 때 불편한 몇가지 조치가 있었다. 이승만은 국기를 ’성화‘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국가주의자인 박정희는 국기와 국가를 ’성화‘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맹세,국기하강식, 국민교육헌장, 영화관에서의 애국가 연주 등이 박정희 시대에 늘 만나는 일상이었다. 거리를 지나가다가도 오후 6시 국기하강식 애국가 연주가 나오면 전 국민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경의를 표해야 했다. 숙연했다. 하루라도 애국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였다. 새벽종소리를 들으며 새마을운동을 하고 반공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시대였다.
단군 신전 및 동상 건립운동을 통해 단군 신화를 부활시켰다. 이승만이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인삿말을 했다면 박정희는 단군 성조로 시작했다. 지금에 와서는 개천절이 아니면 누구도 인삿말에 단군을 거론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대통령을 따라서 각종 훈화에서 단군을 거론하는게 유행이었고, 달력에는 서기와 함께 단기를 병기했다
박정희의 종교 중립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반공주의 개신교는 박정희의 쿠테타와 10월유신을 지지했다. 이미 기독교는 반공의 보루였고 박정희는 그 보루의 세속적 사령관이어서 개신교의 정교일치는 자연스러웠다. 5.16쿠테타를 군사혁명이라고 찬양했던 김준곤 목사는 대통령조찬기도회(1966)에 이어 국가조찬기도회를 잇달아 성사시켰다. 국가조찬기도회는 1953년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복음주의가 대통령을 포섭하기 위해 만든 행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첫 회 부터 “링컨대통령과 같이 은총을 받는 사람” “모세와 같은 능력으로 민족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에게 지혜의 지팡이를 달라”는 기도가 이어졌다. 재선 고지가 불안했던 박정희는 만족스러워 했다.
개신교는 국가조찬기도회를 통해 ‘대표 종교’의 외양을 얻는 효과를 얻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국무위원이 참여하는 조찬기도회는 고위공직자와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교회가 성장하고 번성해 가면서 더 크고 웅장한 교회 건물, 사무실과 기관들을 짓기를 갈망한다. 정부를 비판하지 않아야 재산개발에 대한 승인이 가능할 뿐 아니라, 공개적으로 정부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하면 눈에 띨 정도의 재산 증식이 빨라진다‘(진 매튜스. 당시 한국에서 선교했던 미국인 목사. News & Joy)
개신교는 초대형 대중 전도집회 등 많은 새로운 특권들을 얻어냈다. 반공주의와 개신교가 결합한 대형집회는 교세 확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전국복음화운동(1965 김활란) 빌리 그래함 내한 전도(1973) 엑스폴로74(1974 김준곤) 민족복음화대성회(1977 신현균) 등 수십만명, 연인원 수백만명을 넘는 초대형 예배는 정권의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했다. 교회의 반공 반북 신앙은 정권을 지원했다. 카터 대통령의 미군의 철수 움직임에 대해서도 그가 마음을 돌리도록 하나님에게 기도로 호소했다
군 정신력 강화를 위해 전군 신자화화운동(1969)에서도 개신교가 가장 과실을 많이 얻었다. 군대에서 개신교 장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김준곤은 10월유신을 정신혁명이라고 칭송했고, 전군신자화운동은 세계 기독교의 자랑거리라고 의미 부여했다. 박정희는 1976년 신앙전력화(信仰戰力化)라는 친필휘호를 군 부대마다 하달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군 부대에 좌익의 침투를 우려한 박정희는 반공을 신앙으로 하다 시피하는 개신교가 든든한 후원군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혁명 공약 제1조에서 반공을 첫번째 국시로 표명했다. 자유와 민주가 아닌 반공이 국시였다. 자유와 민주 수호의 결과물로써 반공이 아니라 반공이 우선인 것이다. 개신교도 비슷한 양상을 띄었는데 공산주의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괴물', '악마', '붉은 용' 등으로 묘사했다. 한국전쟁을 겪고, 박정희 시대의 반공주의를 경과하면서 개신교의 선민의식은 한국이 세계 반공 전선 최전방에 서서 사탄과 아마겟돈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자부심을 만들었다.
이승만 시대에 한경직 목사가 중심이었다면 박정희 시대에는 조용기 목사가 새로운 별이 되었다. 박정희 시대에는 너나 없이 “잘살아보세”라는 염원이 지배했다. 산업화 도시화가 시작되면서 그 열망이 퍼져나갔다. 이 시대의 코드에 잘 맞는 것이 조용기의 번영신학이었다. 번영신학은 한마디로 하면 “예수 믿으면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우리가 교회에 가면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번영신학적인 인사이다. 조용기가 교회의 대세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변화이다. 조용기는 질병에 대해서도 적절한 해법(기적의 은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도 조용기의 새마음운동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조용기현상’이 대유행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이제 많은 이들은 조용기와 순복음교회를 롤모델 삼아 선망했고 모방했다. 조용기도 병든 몸의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과 영의 구원이 별개가 아님을 주장했다. 여기에 하나 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갈망까지도 포함되어야 진정한 구원이라고 강변했다. 한경직은 이런 세속적인 갈망은 자칫 영적인 구원을 타락시킬 뿐 아니라, 그런 세속적 갈망이 무속적인 기복성의 발로라고 보았다. 그래서 한경직은 이런 신앙을 ‘이단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김진호)
개신교에서 급속하게 번영신학이 전파되었다. 교회에서 한 설교를 기억나는대로 옮겨 본다. “여러분 성경말씀에 하늘에 재물을 쌓으라 했어요. 어떻게 하면 하늘에 재물을 쌓겠어요. 강남에 땅을 사는게 하늘에 재물을 쌓는 길은 아닙니다. 주식을 사는 것이 하늘에 재물을 쌓은 길은 어니예요. 땅금이 올랐는지, 주가가 내렸는지 분심이 들어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교회에 헌금을 하세요. 하늘에 재물을 쌓으세요. 교회에 헌금을 하면 하나님이 복을 내려줍니다.“
아멘으로 답하는 소리가 나오고 십일조 헌금, 감사헌금이 쌓인다. 교회에 순종하고 봉사하면, 목사에 충성하면 복이 내려온다고 믿게된다. 하늘의 처소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을 하나님이 약속했는데, 지금 내가 부자가 되고, 자녀가 성공하는 현세의 복부터 구하면서 기복신앙화된다. 하나님이 내 아들을 서울대에 합격시켜 주기 위해서 기도가 부족한 남의 아들을 결과적으로 서울대 입시에서 떨어트린다는 사고가 어떻게 가능할까? 기도와 헌금의 반대급부로 하나님이 현세의 복을 내린다면 하나님은 고대 원시 종교에서부터 내려오는 탐욕과 질투의 신과 다를 바 없다.
여하튼 박정희 시대는 개신교의 황금기이다. 무려 교회가 8배 성장했다. 지난 2013년 10월25일 박정희 추모예배에서 한 목사가 이렇게 축사를 했다. “독재니 어쩌니 그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한국은 독재해야 돼, 하나님이 독재하셨어. 무조건 순종하라고 하셨어요”(News & Joy) 하나님의 독재는 성경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박정희 시대의 개신교 부흥에 헌사를 바치고 싶어하는 바람을 읽을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불교에도 혜택을 주었다. 종파교회제도(宗派敎誨制度) 도입을 통한 교도소 포교 참여, 군종제도(군 법사. 1967) 참여를 가능게 했다. 이승만이 형목과 군종을 기독교에만 개방했는데 박정희는 더 넓게 문을 열었다. 1975년 불탄일을 공휴일로 하여 불교계의 숙원을 풀어주었다. 사찰입장료(문화재관람료) 징수를 허용하여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대대적 불교문화재 복원사업(1962 불교재산관리법 제정)을 지원하고, 새마을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전국의 사찰에 도로와 전기를 공급해 주었다.
박정희가 이처럼 공을 들였지만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는 ’불교계 정화‘에 나섰다. 국보위의 수사지시를 받은 합동수사단과 3만여명의 군병력이 전국 6000여개 사찰에 난입하여 2000여명의 스님들을 강제 연행했다. 전국 10·27법난은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 스님이 신군부세력이 요구한 전두환 지지표명을 거부한데서 비롯되었다. 한편 보수개신교는 1980년 8월6일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장 조찬 기도회를 열어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와에 비교하며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 사회악을 제가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많은 시민들이 계엄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지 얼마 안되었을 때 였다.
당시 기독학생들은 양희은의 ‘금관의 예수’를 부르며 하나님의 정의를 구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곤욕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텅 빈 얼굴들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여 거절당한 손길들의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어디에….”
박정희 시대에는 산업화에 따른 양극화, 독재통치에 따른 인권탄압으로 진보주의 신앙운동이 일어나면서 정권과 긴장관계를 형성했다. 안병무 문익환 목사 등이 민중신학 이론을 제공했고 도시민빈선교회 YMCA 기독학생운동 등이 에큐네미칼운동으로 연대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은 ‘민중과 함께 하는 선교’로 전환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출애굽기의 출애굽성화, 갈릴레이의 민중운동에서 영감을 얻어 민중이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담지자라고 보았다. 개신교 에큐메니칼운동은 1987년 민주화 과정에서 역할을 하고 세력을 형성했는데 이것이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위기의식을 가져오면서 새로운 역관계가 형성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미국의 복음주의 근본주의를 살펴본 뒤에 설명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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