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KT사태로 ‘기업 주도론(論)’ 빛바랜 휴지조각 되면 안돼
정치권이란 외생변수에 휘둘린 KT 경영 공백 심각
소유분산기업에 대한 ‘관치’ 유혹 이제 떨쳐낼 때
케인즈의 ‘하비 로드의 전제’ 믿는 이 거의 없어
‘기업 이끌고 정부 미는 경제체제’ 실천해 보여줘야
[뉴스투데이=김민구 기자] 주주총회가 막을 내린 지 20여일이 지났지만 고성과 욕설이 오간 주총장 여진은 남아 있다. 경영 공백 사태에 주가마저 폭락하자 주총은 경영진 성토장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31일 열린 KT 정기 주총 얘기다. 구현모 전 대표가 사임하고 윤경림 차기 대표 후보자가 사퇴하면서 박종욱 경영기획본부장의 '대행 체제'로 바뀌는 대혼란이 빚어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사진마저 줄사퇴해 이사회 구성원 11명 중 1명만 남았다. 이에 따라 KT가 새로운 이사회를 꾸리고 차기 대표 후보를 정하기까지 5개월 이상 걸릴 전망이다.
촌음을 다퉈야 하는 경영 현장에서 5개월이라는 공백기는 치명타가 아닐 수 없다. 리더십 혼란 속에 KT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있으니 주주들은 분통을 터트릴만하다.
KT 주총의 대혼돈은 매년 5월 미국 네브래스카주(州) 오마하에서 열리는 버크셔해서웨이 연례 주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자본주의의 우드스탁(세계 최대 음악 페스티벌)’으로 불리는 버크셔해서웨이 주총은 주총장에 해마다 3만~4만 명의 인파가 몰리는 축제의 장(場)이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과 버핏의 '오른팔' 찰리 멍거 부회장이 Q&A 세션을 진행한다. 이 행사에는 일선 기자는 물론 금융사 애널리스트, 기관투자자, 소액주주 등 누구나 질문할 수 있다. 심지어 8살 꼬마가 버핏에게 질문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물론 주주총회가 축제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회사와 주주가 기업 미래에 대한 비전과 전략을 공유하고 성과를 정당하게 나눠야 하는 뜻깊은 자리가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 찬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KT 사태는 정치권이라는 외생변수가 민간기업에 개입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윤석열 대통령이 얼마 전 ‘소유분산 기업’ 지배구조 투명성을 강조하고 정부 입김이 강한 국민연금이 KT 대표 선임과정에 제동을 걸면서 KT는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흔히 ‘주인 없는 기업’으로 불리는 소유분산 기업이 대표 선임과정에서 경영 능력이 떨어지거나 도덕성에 문제점이 드러나도 기존 대표를 다시 임명하는 이른바 ‘셀프 연임’을 막겠다는 취지일 수도 있다.
그런데 구 대표는 이러한 가능성에서 한발 물러났다.
구 대표가 이끈 KT는 지난해 ‘디지털 플랫폼 기업(디지코)’으로 탈바꿈한 후 회사 매출을 25조 원대, 영업이익을 1조6901억 원대로 끌어올렸다. KT가 2002년 8월 민영화된 후 20년 만에 놀라운 성적표를 거머쥔 것이다. 또한 그는 지난 3년간 KT를 이끌며 시가총액을 9년 만에 10조 원대로 올려놓는 기염을 토했다.
대표가 경영능력이 탁월하면 연임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게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통하는 상식이다. 기업의 대표 연임을 정부가 일일이 개입하는 것은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갈라파고스 규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소유분산 기업은 ‘주인 없는 기업’이 아니다. 주주가 회사 주인이다. 특히 KT는 외국인 지분율이 43%가 넘는 글로벌기업이다.
KT는 과거 공기업이었지만 2002년 민영화돼 현재 정부 주식이 한 주도 없다. KT처럼 민영화기업에 정부와 국민연금이 이러쿵저러쿵하며 개입하는 것은 심각한 기업경영권 훼손이 아니고 무엇인가.
50여 개 계열사에 5만 명 넘는 임직원과 매출 25조 원에 이르는 거함(巨艦) KT 호(號)가 정치권 입김에 휘둘리니 그룹 리더십이 수 개월간 표류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정치권과 국민연금이 민영화기업을 새 정권의 전리품인 듯 쥐락펴락하는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은 이제 사라질 때가 되지 않았나.
유능한 경영자를 선임하고 평가하는 것은 주주와 이사회에 맡겨야 한다. 기업 경영에 주주가 중심이 되어 기업을 발전시키고 이익을 추구하는 ‘주주자본주의’를 실천하자는 얘기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하면서 ‘민간이 이끌고 정부가 미는 경제체제’를 만들겠다고 대내외에 천명했다.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정부와 관료는 공정하고 유능하다(wise men in authority)’고 주장한 ‘하비 로드의 전제(The Presuppositions of Harvey Road)’가 지금도 유효하다고 믿는 이는 거의 없다. 정부 판단 오류로 비롯된 ‘정부 실패’와 ‘시장 실패’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윤 정부에게 표를 던지고 정부 출범을 환호한 이들에게 보답하는 길은 민간이 이끌고 정부가 뒤에서 도와주는 경제 레토릭을 실천하는 것이다.
민간부문에 경제 자유도를 보장하고 기업 운영에 대한 정부 간섭을 없애야 한다. 자유시장경제와 민간 주도를 외치면서 영면해야 할 관치(官治)의 망령이 관(棺)을 열어 다시 활보한다면 이는 경제발전이 아닌 퇴보로 이어질 것이다. 이는 또한 세계 무대를 누비는 글로벌기업의 탄생을 막는 자살골이다.
한국이 ‘선진국 클럽’이라 할 수 있는 주요 8개국(G8) 편입을 앞둔 가운데 ‘관치’의 유혹을 훌훌 털어내고 이번 기회에 G7에 진입할 수 있는 제도 정비와 민간기업 사기 진작에 나서야 한다.
이것만이 현 정부가 외친 ‘민간기업 주도론(論)’이 휴지 조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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