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SK하이닉스, '반도체 한파'에 맞서 설비 투자와 기술 초격차로 승부
[뉴스투데이=전소영 기자]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잠시 시장 동향을 살피며 숨 고르기에 들어가는 이도 있지만 더욱 공격적인 사업 전략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도 있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일보후퇴(一步後退)’를 하는 전자보다는 위기를 발판 삼아 도약하는 '이보전진(二步前進)' 방식을 선택했다.
현재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는 먹구름이 가득하다.
글로벌 시장 조사업체 가트너는 올해 세계 반도체 매출 성장이 7.4%에 머무를 것이란 전망치를 지난 7월에 내놨다. 이는 올해 4월 성장률 전망치 13.6%의 반토막 수준이다. 또한 지난해 반도체 연간 성장률 26.3%와 비교하면 4분의 1 수준에 그친다.
특히 가트너는 내년 반도체 시장이 2.5% 감소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까지 내놨다.
리처드 고든(Richard Gordon) 가트너 부사장은 “최근 반도체 부족 현상이 완화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세계 반도체 시장은 약세장에 접어들고 있다”며 “약세장은 내년까지 이어져 내년 반도체 매출이 올해와 비교해 2.5% 줄어들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전 세계 경기침체 영향으로 반도체뿐만 아니라 전체 산업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아 세계적인 기업들도 긴축경영이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국내 반도체 업계와는 거리가 먼 얘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DB하이텍에 이르기까지 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은 경쟁업체보다 한발 더 앞서가기 위한 기반을 다지고 있기 때문이다.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 업체 삼성전자는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실리콘밸리에서 막을 올린 ‘삼성 테크 데이 2022(Samsung Tech Day 2022)’에서 세계 최초로 5세대 10 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급 D램을 내년에 양산하겠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반도체 내 회로간격(선폭)이 좁을수록 한 웨이퍼에서 더 많은 반도체를 만들 수 있다. 이는 생산 효율 향상으로 이어진다. 이 회로간격을 머리카락 굵기의 1만분의 1 수준인 10㎚까지 좁게 만든 D램을 생산한다는 게 삼성전자 계획이다. 현재 경쟁사들의 생산 수준은 4세대 14나노급에 머물고 있다.
또한 삼성전자는 핵심사업인 메모리반도체(D램+낸드플래시) 수요가 급감하고 있는 분위기에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메모리반도체 경쟁업체 가운데 하나인 미국 마이크론은 최근 반도체 혹한기에 못 이겨 설비 투자를 축소하고 감산 체제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에 따라 마이크론은 반도체 생산량을 5% 줄이고 내년 설비 투자는 30% 축소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낸드 플래시 대표 기업으로 손꼽히는 일본 키옥시아(옛 도시바 메모리)도 최근 메모리 생산을 30% 축소하기로 했다. 낸드 플래시는 전원이 꺼져도 저장된 데이터가 사라지지 않는 메모리 반도체다.
경쟁업체의 이와 같은 결정에 삼성전자는 어떤 경영 수순을 밟을 지 업계 관심이 쏠렸다. 이에 대해 한진만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인위적 감산은 없다는 게 삼성전자의 기조”라며 “심각한 공급 부족·과잉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메모리반도체 세계 2위 SK하이닉스도 마찬가지다.
SK하이닉스는 15조원을 투자해 충북 청주 신규 반도체 공장 ‘M15X’(eXtension) 건설을 추진 중이다. 이에 따라 SK하이닉스는 이미 확보한 청주 테크노폴리스 산업단지 내 약 6만㎡(1만8150평) 부지에 M15의 확장 팹(fab·반도체 생산 공장)인 M15X를 예정보다 앞당겨 착공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M15X는 올해 10월 건설 공사를 시작해 2025년 초 완공될 예정이다.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은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면 위기 가운데 미래를 내다본 과감한 투자로 SK하이닉스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며 “이제는 앞으로 10년을 대비해야 하며 M15X 착공은 미래 성장기반을 다지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DB하이텍은 차세대 화합물반도체 'SiC(실리콘카바이드)', 'GaN(질화갈륨)'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SiC는 충북 음성에 있는 상우캠퍼스 내 장비 투자에 나서 이르면 내년 8인치 SiC 전력반도체 양산을 위한 공정 개발과 평가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DB하이텍은 지난달 22일 반도체 설계 전문업체 에이프로세미콘과 손잡고 올해부터 2024년까지 ‘GaN 전력반도체 파운드리 공정기술 개발’을 추진하기로 했다. 질화갈륨을 적용한 GaN반도체는 기존 실리콘 소재 반도체보다 전력효율과 내구성이 뛰어나 차세대 반도체로 주목받고 있다.
DB하이텍은 이번 협력으로 GaN전력반도체 핵심 공정기술을 확보하고 스마트폰과 IT(정보기술) 기기, 전기차 등에 사용되는 차세대 전력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이다.
시장 둔화에는 몸을 사리는 것이 정석이라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 반도체 기업에겐 과감한 전략으로 위기를 극복한 역사가 있다.
예컨대 1990년대 초반 D램 시장에 불황기가 찾아오자 당시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름잡았던 일본 업체들은 투자를 축소하며 몸을 사렸다. 반면 삼성전자는 1993년 6월 경기도 기흥에 세계 최초로 200mm 웨이퍼 전용 5라인을 완공했고 그후 6·7라인 착공까지 나섰다.
이러한 과감한 투자는 추후 PC 시장이 커지면서 D램 시장이 덩달아 호황기를 맞게 됐을 때 삼성전자가 일본 기업을 뛰어넘는 결정적인 무기로 작용했다.
2012년 반도체 시장 위축으로 업계 투자가 줄어드는 분위기가 팽배했지만 SK하이닉스는 오히려 투자를 전년대비 10% 이상 늘리는 야심찬 행보를 보였다. 또한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시장 상황이 계속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지만 반도체 호황기를 염두에 두고 2015년 경기도 이천에 ‘M14’를 설립했다.
이에 따라 SK하이닉스는 2012년 말에 흑자로 돌아서는 데 성공하는 결실을 맺었다. 이에 따라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초호황기였던 2017년부터 M14를 기반으로 2년간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업계 관계자는 “불황기 선제적 투자는 미래 성장 동력이 된다"며 "눈앞 상황만 보고 투자를 아끼는 것은 자칫 미래 성장을 저해한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현재 반도체 기업의 투자는 당장의 실적 개선을 위하기보다는 향후 반도체 호황기에 대비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