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위산업 발전 저해하는 함정사업 계약제도 시급히 개선해야
한국의 방위산업이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방위사업청은 방위산업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지속적인 제도 개선과 함께 법규 제·개정도 추진 중이다. 그럼에도 방위사업 전반에 다양한 문제들이 작용해 산업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뉴스투데이는 제도개선 효과와 함께 이런 문제들을 심층 진단하는 [방산 이슈 진단]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 방사청 방위사업정책국, 개선안 마련했으나 최근 정책심의회서 부결돼
[뉴스투데이=김한경 안보전문기자] 폴란드 국방부가 지난달 27일 K2전차 980대, K9 자주포 648문, FA-50 48대 등 한국산 무기를 대거 구매하는 기본계약(Framework Agreement)을 체결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처럼 역대 최대 규모의 방산수출이 성사되면서 K-방산이 비상하고 있지만 유독 함정사업을 담당한 방산업체들은 만성적인 적자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방위산업진흥회의 경영분석 자료에 따르면, 함정사업은 최근 6년간 통계에서 지속적인 적자가 누적되고 있는 상태다. 2020년 기준 방산업체 전체 평균 영업이익률은 3.7%이나 함정업체의 경우 –6.79%로 함정사업의 적자폭은 오히려 악화됐다. 이처럼 함정사업의 적자가 계속되는 원인은 선도함 개발업체에 대한 양산 보장 없이 2번함부터 최저가 경쟁으로 내몰리는 함정사업 계약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제도상 문제를 개선하고자 방위사업청(이하 방사청) 방위사업정책국은 입찰가격이 결정변수로 작용하는 ‘적격심사’를 능력평가에 기반한 ‘제안서 평가’로 바꾸는 함정사업 계약제도 개선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 개선안은 지난달 22일 열린 방사청 정책심의회에서 부결됐다. 개선안의 부결로 이달에 입찰 공고될 울산급 배치-Ⅲ 3, 4번함 건조사업은 지난해 2번함처럼 최저가 입찰의 전철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현행 함정사업 계약제도는 기본설계부터 선도함까지는 업체의 함정건조능력 위주로 제안서 평가를 하지만 후속함부터는 가격 위주로 평가하는 적격심사를 하고 있다. 적격심사는 단순 최저가 경쟁의 폐해를 보완하고자 나온 방식으로 기술능력과 이행실적 등 조건을 만족할 경우에 한해 최저가를 선택한다. 그러나 조건을 엄격히 적용하지 않으면 결국 가격이 수주를 결정하는 구조가 될 수밖에 없고, 지난해 2번함 수주가 대표적 사례라고 업계는 말한다.
■ 선도함 개발업체 고정비 높아 저가 경쟁인 후속함 입찰에서 매우 불리
일반적으로 방위사업은 경쟁을 통해 체계개발 업체를 선정하면 체계개발을 수행한 업체가 양산도 담당하게 된다. 그래야만 체계개발에 들어간 업체의 비용을 양산 과정에서 보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정사업은 양산 물량이 제한돼 선도함을 개발했더라도 양산에 해당하는 후속함부터 경쟁하는 제도를 적용해왔다. 이로 인해 수많은 설계·연구 인력을 유지하며 선도함을 개발한 업체도 경쟁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선도함 개발업체는 선도함 1척을 수주하자고 전문 인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님에도 최저가가 아니면 후속함 수주가 어려우니 적자만 늘어나게 된다. 지난해 업체의 연구개발(R&D) 투자현황을 보면 항공유도(3,271억), 화력(2,042억), 탄약(1,737억), 기동(1,479억)에 비해 함정은 92억원에 머물러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이 통계는 함정업체들이 자체 R&D에 투자할 여력이 거의 없음을 보여준다.
함정사업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2번함부터 바로 경쟁시키는 현재의 방식은 문제가 많다”면서“최소한 선도함 개발업체가 2번함까지는 건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개발 과정에 들어간 비용 회수와 설계·연구 인력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현행 계약 제도는 설계·연구 인력을 보유한 선도함 개발업체는 고정비가 높아 저가 경쟁 위주의 후속함 입찰에서 생산능력만 보유한 업체에 비해 매우 불리한 상황이다.
게다가 최근 방사청 함정사업부는 입찰 공고가 임박한 울산급 배치-Ⅲ 3, 4번함 건조사업에 지난해 2번함 입찰 당시 수주된 가격으로 기초 예비가격을 내겠다는 언급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HJ중공업, 삼강M&T, 강남 등 5개 함정업체 중 선도함 개발 능력이 거의 없는 일부 업체만 입찰에 참여하라는 얘기와 같다.
■ 선도함·2번함 한 업체가 담당하고 후속함도 건조능력 위주 경쟁해야
미국·일본 등 선진국은 국가전략산업인 함정사업의 관리를 위해 2개 조선소만 유지하며 교대로 물량을 배분하고 있고, 유럽은 물량이 많지 않아 1개 조선소로 통합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5개 업체가 난립하면서 최저가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이런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동안 계약제도 개선을 추진해온 방사청 방위사업정책국은 정책심의회에서 개선안이 부결된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전해진다.
이와 관련, 방산업체의 대형화·통합화를 주창해온 최기일 상지대 교수는 “선진국처럼 M&A를 통해 업체 수를 줄여야 한다”면서 “5개 업체의 방산 부문을 물적 분할해 하나의 대형 조선소를 만드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함정사업에 정통한 한 예비역 해군제독은 “기동·화력 등 타 분야는 체계종합업체가 통상 1∼2개”라며 “업체별 건조능력을 감안해 주력 함형을 구분해 발전시키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방사청을 비롯한 업계 및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 함정사업 계약제도가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는 주장이 쇄도하고 있다. 특히 2번함의 경우 선도함의 연구개발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입찰이 이뤄지는 상황이므로 선도함 개발업체가 2번함까지 건조하고, 이후 후속함 건조도 가격 경쟁보다는 함정 건조능력 구비 여부에 중점을 두고 기술 경쟁을 하는 방향으로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정조대왕함 진수식에서 “제2창군 수준의 국방혁신을 통해 과학기술 강군으로 도약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또 “방위산업을 첨단 전략산업으로 육성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정부가 지향하는 방향과 기존 방위사업 제도의 괴리감을 생생히 목도하고 있다. 언제까지 정책 방향과 제도의 현실이 따로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업체들만 애를 태워야 하는가? 이제라도 정부가 제도 개선에 적극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