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환종의 공군(空軍) 이야기 (61)] 전투발전단, 그리고 다시 공작사로

최환종 칼럼니스트 입력 : 2022.01.10 13:36 ㅣ 수정 : 2022.01.10 13:36

대령 진급후 공작사 방공포병처장으로 부임, '한·미 연합 방공포병 작전 협조 체계' 토대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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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환종 예비역 공군 준장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을지연습이 끝나고 다시 업무에 매진하고 있던 중, 어느덧 진급 심사 시기가 다가왔다. 이미 지나간 과거 얘기니까 지금은 마음 편하게 얘기하고 있지만 그때는 진급심사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진급심사 결과를 발표하는 날이 밝았다. 이 당시에는 전군에 전산망이 잘 구축되어 있어서 거의 실시간으로 진급 발표를 알 수 있었다(중령 진급 발표 때는 몇 시간이나 지난 후에 결과를 알게 되어서 얼마나 힘들었는가). 점심식사 시간이 되기 전에 발표가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많은 선후배, 동기생들이 축하 전화를 해주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

 

그날 오후는 진급 인사 하랴, 받으랴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에 대령 진급반 교육에 입과해서 모처럼 여유롭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연말이 되어서 차기 보직 명령을 받았고, 공군 전투발전단(이하 전발단)의 교리발전과장으로 부임하였다. 사람들은 교리(敎理)라고 하면 무슨 종교 교리를 생각하는데, 군에서 말하는 군사교리(軍事敎理, Military Doctrine)란 군사용어사전에 의하면 ‘군부대와 그 구성원에게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승인된 군사행동의 기본원칙과 지침.

 

이는 권위적인 것이지만 적용시에는 판단이 요구됨.’으로 명시되어 있다.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용어인 만큼 업무에는 많은 군사지식과 높은 집중력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분초를 다투는 현행 작전 업무가 아니기 때문에 비교적 여유를 가지고 업무에 임할 수 있었다.

 

전발단에서 보낸 1년은 교리 업무는 물론이고 대외활동도 꽤 있었는데, 현행 작전부대와는 달리 비교적 여유있게 생활할 수 있었다.

 

전발단에 근무하면서 골프를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골프 시작은 대위 때부터였지만 그동안 가물에 콩나듯 골프를 하였기 때문에 늘 실력은 초보자와 비슷했다. 그런데 전발단에서는 거의 주말마다 운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연습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이때 필자의 골프 실력은 단기간내에 일취월장하였다. (계룡대에는 그곳에 근무하는 군인과 군 가족들을 위한 골프 연습장이 정말 잘 만들어져 있다. 물론 연습은 일과시간 이후에만 한다.)

 

시간은 화살과도 같이 빠르게 지나갔고, 그해 가을에 대령 계급장을 달았다. 대령 진급 예고자(계급은 계속 중령이다)에서 대령으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중령 계급장을 달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그러나 여전히 젊어 보이는 필자의 외모로 인하여 사복을 입거나 할 때는 상대방이 필자를 그저 새파란 중령으로 인식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느끼는 기분은 불쾌하다기 보다는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연말이 되어서 다음 보직 명령이 하달되었다. 차기 보직은 공작사 방공포병처장! 공작사를 떠난지 불과 1년 만에 방공포병처 선임장교에서 처장으로 직책이 변경되어서 가게 되었다. 전발단장에게 전출신고를 하고, 그 주말에 간단하게 짐을 꾸려서 공작사로 이동했다. 부임 초기에는 장교 독신자 숙소에서 지냈고 정식 이사는 약 한달 후에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령 진급 이후에는 거의 1년에 한번씩 보직 변경 및 이에 따른 이사를 했다.

 

이사할 때마다 이사 담당은 모든 군인의 아내가 그렇듯이 필자의 아내였다...(전역한지 벌써 몇 년이 지나갔지만 가을 이사철만 되면 ‘이제는 이사를 안가도 되는구나’하는 생각을 한다. 결혼 후에 이사한 횟수가 20여회가 넘으니 이런 생각을 가질 만도 하다...)

 

공작사령관에게 부임신고를 마치고, 각급 상관들과 동료, 후배들에게 인사하고는 곧바로 업무에 들어갔다. 사무실 업무나 분위기는 1년 사이에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기강이 흐트러진 면이 보여서 처원들에게 주의를 주었고, 이는 곧바로 시정되었다.

 

공작사에서의 업무는 1년 전에 했던 업무들의 연장선에 있던 것이 꽤 있었다. 그리고 몇몇 장교들의 창의적인 업무에 따라 중요한 작전 관련 규정도 적지 않게 개정(또는 수정)을 할 수 있었다. 대령 때는 중령 때와는 달리 비교적 굵직한 업무들을 많이 수행했는데, 그 첫 번째가 공작사 방공포병 처장 임무를 수행할 때였고, 그만큼 업무 성취도는 높았다.

 

그해에 여러 가지 수행했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한·미 연합 업무(탄도탄 작전)에 관한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군은 패트리어트 포대를 창설하는 단계였고, 탄도탄 작전에 관해서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한·미 연합 탄도탄 작전에 관한 시설이나 한미간 상호 협조 체계는 없는 상태였다(탄도탄 작전에 관해서는 미군이 절대적인 자산을 보유하고 있고 실전 경험 또한 많기 때문에 한국군으로서는 미 육군과의 협조가 절실한 형편이었다).

 

한·미 간 상호 협조 체계에 대해서는 당시 한국 공군 방포사령관과 미 육군 00 방공 및 유도탄 사령부(AAMDC, Air & Missile Defense Command, 이하 미 방공사령부) 사령관이 전반기 한미 연합 연습 및 미 방공사령부 방문 때 토의를 해서 상당한 진전을 보았고, 이후 필자는 이 업무에 관한 주무 장교로서 초안을 작성했다.

 

이 초안을 토대로 하여 미 육군 00 방공사령부 방문 및 을지연습때 한·미 방공포병 사령관들이 긴밀한 토의를 하였고, 토의결과 필자가 작성한 보고서 내용을 근간으로 하여 '한·미 연합 방공포병 작전 협조 체계(조직)'를 운영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조직은 후에 ‘한·미 연합 방공포병 작전체계’의 하나로 임무를 개시하였고,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 그해 전반기에 방포사령관 등 0명이 하와이에 있는 미 육군 00방공사령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 방문단에 필자도 포함되었는데, 그 출장은 준비 단계부터 쉽지 않았다. 즉, 당시 최대의 현안이었던 한·미 연합 방공작전 협조('한·미 연합 방공포병 작전 협조 체계’를 포함한)에 대한 토의는 물론, 매 연합 연습 시 마다 대두되었던 업무 협조 문제에 대하여 집중 토의를 하여야 하는데, 제한된 일정에 토의할 내용은 많고, 실무자로서는 조금 답답한 상황이었다.

 

아무튼 제한된 기간 내의 출장은 잘 마무리 되었고, 이때의 한미간 참모 토의를 통하여 여러 면에서 많은 발전을 보았다. 특히 전반기 연합연습과 미 방공사령부 방문을 통하여 한미 방공포병 간에 깊은 신뢰감과 유대감이 형성되었는데, 그런 효과로 인하여 그해의 을지연습(방공포병 분야)은 그 어느 때 보다도 한·미 방공포병간 원활한 협조가 이루어진 가운데 성공리에 마무리될 수 있었다. (다음에 계속)

 

◀최환종 프로필▶ 공군 준장 전역, 前 공군 방공유도탄 여단장, 前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現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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