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투데이=유한일 기자] 새해 들어 은행들이 대출 문을 열었지만 당분간 '대출 혹한기'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금융당국이 가계부채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가계대출 총량 증가율을 지난해보다 낮춰 잡은 데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적용 등 규제 기조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특히 갈수록 은행의 대출 공급 규모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며 ‘선착순 대출’이나 ‘금리 왜곡’과 같은 시장 혼란이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각종 부작용을 낳고 있는 총량 제한 방식으로 가계부채 대책을 전개해선 안된다고 입을 모은다.
10일 금융권에 따르면 주요 시중은행은 지난해 축소·폐지했던 우대금리를 복원하는 등 대출 재개에 나서고 있다. 해가 바뀌며 총량 한도가 재설정돼 대출 여력이 살아난 데 따른 것이다.
국민은행은 지난 3일부터 주택담보대출(주담대)과 전세자금대출 우대금리를 0.2~0.3%포인트(p) 인상해 적용한다. 이럴 경우 기존 대출에 적용됐던 금리가 낮아지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우리은행 역시 신용대출 우대금리를 지난해 0.4%에서 올해 최대 1.0%로 0.6%p 끌어올렸다. 은행은 준거금리에 가산금리를 더해 대출금리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모처럼 대출 시장이 활기를 띄는 모양새지만 불확실성은 잔존해 있다. 금융당국의 규제가 거셀수록 대출 문턱이 높아질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금융당국이 제시한 올해 가계대출 총량 증가율 목표치는 4~5%로 지난해(5~6%)보다 더 빡빡해졌다. 대출 수량 증가를 은행이 조절해야 하나 국내 금융산업 특성상 금융당국의 권고치를 따를 수밖에 없다.
수요 증가로 하반기 총량이 고갈되면 대출 대란은 불가피하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총량을 전년 대비 줄이라는 건 아니기 때문에 큰 혼란은 없을 것”이라면서도 “월별로 쪼개 총량 규모를 관리하며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올해부턴 DSR 2단계가 시행된다. DSR은 신용대출과 주담대 등 모든 가계대출 원리금 상환액을 연 소득으로 나눈 비율이다. 이달부터 2억원 넘는 대출을 받을 때 1년 동안 갚아야 할 원금과 이자 합이 연 소득의 40%를 넘을 수 없다. 차주의 상환 능력을 보며 돈을 빌려주겠단 것이다.
문제는 대출을 둘러싼 규제가 까다로워지면서 연초부터 선착순 대출 현상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영업점이 정해놓은 총량을 확보하려는 수요가 매달 초 몰릴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대출 중단에 따른 학습 효과로 가수요 유입도 배제할 수 없다.
올해 기준금리 인상기가 시작되면서 대출금리도 점차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으로 대출 대란이 벌어질 경우 소비자들의 피해가 불가피하다. 실수요자가 대출을 받지 못하는 규제 역효과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최근엔 신용점수가 높은 사람이 더 많은 이자를 내는 금리 왜곡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금융당국이 은행에 중금리 대출 확대를 주문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선 고신용 차주들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오정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가계대출 총량 규제 시행 후 금리 왜곡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며 “(올해 가계대출 총량) 증가율 자체는 무리한 수준이 아니라고 보지만 금리 왜곡 현상이 나타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음으로 적절한 정책을 강구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출 관리를 통한 가계부채 억제 필요성에 대해서 대체로 공감하면서도, 규제 방식에 변화를 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대출 난민 등 각종 부작용을 초래하는 경직적 규제보다는 실수요자 보호, 나아가 부동산 시장과의 조화 등 종합적 정책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시장의 물량(대출 총량)을 가지고 규제하는 건 굉장히 낮은 수법”이라며 “이런 식으로 하면 왜곡이 왜곡을 낳게 돼 (금융시장) 전체가 엉망이 될 수 있다. 직접 규제하는 것보다 아예 총량 제한을 없애는 게 낫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가계대출을 왜 막느냐를 봤을 때 결국 부동산 시장의 문제”라며 “총량 규제, 금리 인상 등 엄한 데서 왜곡을 추가로 만드는 것 보다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부동산 시장에서 문제를 푸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가계대출 억제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되, 실질적인 대출 상환 능력 등에 대한 심사는 시장 자율에 맡기는 ‘선진국형 여신 관행’이 정착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승석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정부에서 금융위원회 중심으로 DSR 퍼센트(%)를 제시하고 은행들이 지침을 따르도록 하는 건 선진국 중에 우리나라밖에 없다”며 “국가에서 기준을 일원화해 제시하다 보니 부작용이 너무 크다”고 밝혔다.
이 부연구위원은 “현재 DSR 제도가 차주의 상환 능력을 고려한다는 취지는 동의하지만 우리나라는 그 강도가 경기 위축으로 번질 만큼 너무 강하다”며 “자본시장 논리에 맞지 않는 규제는 점진적으로 없애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출 규제나 상환 같은 건 은행이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하는 게 궁극적으로 선진화되는 길”이라며 “금융권도 이에 맞춰 차주의 상환 능력을 파악할 수 있는 기술이나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