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16)] 군내 사조직 병폐소동의 진실 ③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던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력 : 2021.07.21 15:24 ㅣ 수정 : 2021.07.22 10:50
육군대학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사조직 문제는 4년 뒤 김영삼 정권때 표면화돼...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알자회‘와 같은 군내의 사조직 문제는 4년 뒤인 1993년 2월25일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이 ’하나회‘ 출신인 서완수 기무사령관에게 "앞으로 대통령과 독대하지 말고 국방부장관을 통해 보고하라"라고 지시하면서 표면화됐다.
나무위키 사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김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임무에 충실한 군인이 조국으로부터 받는 찬사는 그 어떤 훈장보다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실추된 군과 육군의 명예를 바로잡고(…) 다짐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본격적인 숙청에 들어간 건 김 대통령이 취임한지 11일째인 3월8일 이었다. 이 순간까지 군 수뇌부는 물론 청와대 비서진들까지도 김 대통령의 의도를 모르고 있었는데, 몇몇 최측근들과 의논하다 이날 아침에 권영해 국방부장관을 불러 독대를 했다.
"장군들은 정권이 바뀌면 사표를 내지 않느냐?"라고 일단 김 대통령이 운을 뜨자, 권영해 장관은 "대통령이 새로 취임한다고 군인들이 사표를 내지는 않는다"라고 답했고, 김 대통령이 "그럼 군 장성들을 언제 바꿀 수 있느냐?"고 말하자 "대통령이 통수권을 행사한다면 언제든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오늘부로 바로 바꾼다”고 선언했다.
장관이 극비리에 육군본부 기무사 수방사 특전사 등의 동향을 체크하도록 지시를 내린 상황에서 비 하나회 출신인 김동진과 김도윤으로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교체해 버렸다. 이러한 과정이 단 4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 이르러서도 전격적인 군 수뇌부 교체 정도가 하나회 숙청의 신호탄이고 그 과정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챈 이는 군은 물론 청와대 내에도 드물었다. 문민정부라고는 하지만 전두환-노태우 정부를 이어받아 3당 합당으로 김영삼은 대선 후보가 됐고, 하나회 출신 군인들이 즐비했던 당시 민주정의당의 지원으로 당선된 대통령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불과 며칠 단위로 각군 사령관과 사단장급까지 교체하는 일이 4월에 전개되었다. 4월2일 안병호 수도방위사령관(20기)과 김형선 특전사령관(19기) 전역조치, 4월8일 1군사령관, 3군사령관, 2작전사령관 보직해임, 4월15일 하나회 출신 군단장과 사단장 거의 전원을 강제로 전역시켰다.
이러한 수뇌부에 대한 숙청 과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하나회 출신이 군 내 주요 자리에서 물러난 것에 대해 하나회 회원이던 이충석(당시 소장)이 술자리에서 정부가 군을 막 대한다며 술잔을 던지며 소동을 벌이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하나회 숙청에 대한 저항이라고 간주한 대통령과 주요 지도부에 의해 하나회 출신의 주요 장성들은 아예 조기 전역까지 당하며 군을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 ’김영삼‘답게 앞뒤 안가리고 잘라 버려, 무모해보일 정도의 위엄을 과시
김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시행한 하나회 출신 주요 장성들의 기습적인 교체로 군 주요 보직에서 하나회 인사들이 모두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그후에도 하나회 출신은 군 승진인사에서 계속 배격당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런 일이 이어지는 중에 당시 대령이던 백승도가 하나회 명단을 군인 아파트에 뿌리는 사건이 있었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하나회의 깊은 뿌리가 제대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 하나회 명단 살포 건으로 인해 하나회 숙청이 시작되었다는 말들이 간혹 돌았으나, 앞선 내용에 있듯이 하나회에 대한 숙청은 이미 김영삼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진행중이었다.
이러한 하나회 숙청 과정에서 공군참모총장이 합참의장이 되고 국방부 장관까지도 되는 최초 사례를 낳는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하나회‘에 대한 본격적인 숙청에 들어갈 때 당시 ‘알자회’도 발각되었지만, 그 규모가 워낙에 작았고 회원들의 직급도 낮았기 때문에 근신 정도의 가벼운 처분이 내려졌다.
알자회 34~36기중에는 하나회와 중복되는 일부도 있었는데 7월에는 하나회 영관ㆍ위관급 장교들까지 색출해 예편시키거나 좌천시켰다. 가히 전격전을 방불케 하는 숙군 행보였다. 당시 주요 군부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 24시간 비상대기체제를 유지했던 것으로 훗날 알려졌다.
하나회 자체가 군대를 실제로 동원할수 있는 군 장성들의 사조직이었던 만큼 그들이 해체에 반발하여 쿠테타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하나회 해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애써 이루어낸 민주화가 물거품이 될수도 있었던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하나회 출신 군 수뇌부를 제거하는 상황때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군 지도부가 쿠데타 상황까지 경계하며 보름동안 철야 대비를 하기도 했고, 실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숙청 과정에서 쿠데타 설이 돌기도 했다.
특히 하나회를 숙청하고 빈자리에 주요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비밀 유지를 위해 김영삼은 국방부나 군 관련 인물을 배제한 채 최측근들하고만 일을 논의했는데, 이런 인선 과정에서 김영삼의 아들인 김현철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후 김현철은 권력 실세로 우뚝 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권력 실세가 된 김현철은 이후 부패권력의 상징이 되어 몰락하고 말았다.
하나회의 주요 맴버들은 10ㆍ26 직후의 12ㆍ12 구테타 그리고 5ㆍ18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 세월을 누구 못지않게 험하게 보낸 정치인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회를 벼른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김 대통령의 분노는 명료하고 집요했으며, 숙청작업은 쿠데타 가능성에도 상관없이 앞뒤 안가리고 잘라 버려 무모해보일 정도로 무데뽀스러운 위엄을 과시했다. 이러한 과감한 숙청작업은 그야말로 “김영삼답다”는 평도 나돌게 만들었다.
그러나 김영삼의 목적은 하나회의 완전척결이 아니라, 자신에게 반기를 들 만한 세력의 축출이 목적이었다고 보인다. 이것은 방산비리로 처벌받은 노태우계인 이진삼 前육군참모총장과 하나회 인사였던 박세직 前 수방사령관에게 신한국당 공천을 주기도 했던 일화들로 짐작할 수 있다.
사실 하나회 숙청소동이 있었지만 그들 중 우수한 인물들은 후배들에게서 무한한 존경을 받기도 했다. 그들은 차후 보직과 진급을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부하들을 불필요하게 괴롭히거나 뇌물을 받는 행위도 없었고, 상급부대의 부당한 지시에 과감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등 자신감 넘치는 탁월한 리더십으로 부대 발전에 기여했다.
그래서 하나회 자체를 뿌리 뽑으려던 것은 하나회라고 하면 치를 떠는 非하나회 출신 비영남권 군인들이었다는 설도 있었다.
그렇기에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4년전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필자의 동기회는 이 소동을 통해 오히려 동기애를 다지는 계기가 된 것에 흐뭇한 미소가 번져온다.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