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동 참모대 교육② 특별한 인연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공항 건물은 너무 낡아서 마치 우리나라 70년대의 시외버스 정류장을 연상시킬 정도였는데, 승객들이 수하물을 찾는 곳은 공항 내의 공간이 아닌 공항 외부의 노출된 공간에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승객의 가방을 들고 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보안이 허술했었는데, 몇 년 전에 방문했을 때는 현대식 공항으로 바뀌어 있었다.
일주일 정도의 러시아 견학을 모두 마치고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국적기를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모두들 국적기의 쾌적함과 안락함에 환호성을 지른다. 인천으로 오는 그 짧은 비행시간 동안 컵라면을 주문해서 먹는 동기생도 있었다. 모두들 얼큰한 맛이 그리웠을 것이다.
기내식으로 제공된 ‘비빔밥’은 인기 최고였다. 한 가지 재미있었던 사항은 그 시기가 월드컵 축구 경기 기간이었고, 인천까지 비행하는 시간에는 우리나라가 어느 강팀(어느 나라인지 기억이 안난다)과 축구 경기를 하는 시간이었다. 모두들 경기 내용이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예상치 않았던 기내 방송이 나온다. “기장입니다. 현재 월드컵 축구는 우리나라가 1골을 넣었습니다.” 대부분 승객이 한국인이었고, 기내는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잠시 후, 비행기는 인천 공항 활주로에 착륙을 했고 주기장으로 가는 유도로에 진입했다. 이때 다시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온다. “기장입니다. 우리나라가 또 1골을 넣었습니다.” 아까보다 더 큰 환호성이 터졌다. 이래저래 기분 좋은 귀국길이었다. 귀국 후에는 다시 공부와 토의, 발표, 시험의 연속이었고, 그런 가운데 ‘합동작전’이라는 큰 개념이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편 합참대에서는 1년간 공부하면서 각자 한편의 연구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대학원의 석사학위 논문 같은 성격인데, 필자는 주제를 ‘미래전에 대비한 한국의 탄도탄 무기체계 발전 방향(부제 : 탄도탄 및 방어체계를 중심으로)’으로 정하고 심혈을 기울여 연구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연구보고서의 내용은 지난 2년간 연합사에서 배우고 익혔던 ‘탄도탄 방어 작전’이 핵심이 되었고, 여기에 필자가 생각한 개념을 추가하여 연구보고서를 작성했다. 연구보고서 결론의 핵심은 ‘미래전에 대비하고 주변국에 대한 견제 능력을 보유하기 위한 정밀유도무기(탄도탄) 체계 및 탄도탄 방어체계 확보’였다.
이때 연구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답답했던 것은 탄도탄 개발 및 보유와 관련하여 당시 한국이 처한 여러 가지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MTCR’(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 ; 미사일 기술 통제 체제), ‘한.미 미사일 지침’ 등에 의하여 당시 한국이 개발 및 보유할 수 있는 탄도탄의 성능(사거리, 탄두 중량 등)이 제한을 받고 있는 것이었고, 연구보고서에서 필자가 주장했던 탄도탄의 사거리(0,000 km)는 당시 한국으로서는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탄도탄 방어전력은 전무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전에 대비하여 그런 전력(戰力)을 갖추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근 한.미간 협상 결과 ‘한.미 미사일 지침상의 사거리 제한 해제’라는 기사를 보고는, 20여 년 전에 필자가 연구보고서에서 주장했던 ‘결론’이 점차 실현 가능성이 있는 방향으로 접근해가고 있음에 매우 흐뭇하고 뿌듯한 감정을 가졌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합참대를 졸업할 시기가 다가왔다. 합참대를 졸업하는 학생장교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농담이 있다(물론 실현 가능성이 없는 희망사항이지만). 그것은 “1년만 유급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경우는 없다, 그러나 그런 농담을 한다는 것은 모두들 분초를 다투는 실무부대에서 바쁘게 근무하다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교육기관에서 생활하는 것이 군 생활을 하는 동안 결코 만나기 쉽지 않은 경우이기 때문이리라(물론 시험 때는 모두들 괴롭지만).
한편, 합참대를 졸업할 즈음하여 방공포병 장교 중에서 평소 존경해오던 ‘선배 장교’ 한 분이 전역을 하였다. 여기서 잠시 이 선배 장교와 필자와의 특별한 인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선배 장교(이하 J 모 중령으로 칭함)는 팬텀기 조종사였고 생도대 훈육관 / 중대장 시절에는 다른 모든 조종사들이 그렇듯이 J모 중령도 조종사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와 선그라스를 늘 착용하고 다녔는데, 생도들은 J모 중령을 ‘하노버’라 불렀다(1979년에 만들어진 영화 ‘하노버 스트리트’에서 해리슨 포드가 연기했던 미군 폭격기 조종사의 이미지가 J모 중령과 비슷하다 해서 그렇게 불려졌다고 한다).
생도대 훈육관 / 중대장이었던 당시에 소령이었던 J모 중령은 약간 검은 피부에 남자다운 외모를 가진 선이 굵은 장교였다. 간혹 규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생도들은 J모 중령에게 지적 받을 경우 상당히 힘들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J모 중령의 생도 시절 별명은 ‘대통령 하사품’ 이었다고 한다. 왜 ‘대통령 하사품’인지에 대하여 J모 중령에게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사연인즉 대략 다음과 같다.
J모 중령이 공군사관생도 모집 시험에 합격을 하고 가입교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해서 다리를 다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치료 후에 목발을 짚고 다니다가 가입교 일자가 되어 공군사관학교에 도착하였는데, 목발을 짚고 있는 모습을 본 공군사관학교 관계자는 입학을 허가할 수 없다고 하면서 J모 중령을 귀가조치 시켰다고 한다.
황당한 J모 중령은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실의에 빠져 있던 중, 청와대 민원실에 본인의 억울함(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억울한데, 그로 인하여 사관학교 입학마저 거절당했다는)을 풀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고, 당시 청와대 비서실에서는 J모 중령의 편지를 본 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고 한다.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비서실을 통하여) 공군참모총장에게 ‘검토해 보라’는 지시를 하였고, 공군에서는 ‘재검토 후’ J모 중령의 공군사관학교 입학을 허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기가 신입생 입학식 이후 몇 달이 지난 후이므로 1년간 유급 조치 후 그 다음해 신입생 입학시 입학하도록 조치했고, 이에 따라 J모 중령은 1년 후에 후배 기수와 같이 입학을 하게 되었으며, 원래 동기생보다 1년 아래 기수로 졸업 및 임관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에 계속)
◀최환종 프로필▶ 공군 준장 전역, 前 공군 방공유도탄 여단장, 前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現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