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연합사④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부대(주진지)에서라면 식탁이나 샤워는 필수적이고 당연한 얘기이다. 그러나 부대를 떠나서 야외 전술훈련 등을 실시할 때는 모든 것이 부족할 수밖에 없고, 또 군인이라면 야외 현실(상황)에 맞게 적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때로는 행군하다가 길가에 앉아서(악천후 시에는 눈비를 맞으며) 식사를 해야 할 때도 있고, 수면시간이 부족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악조건을 경험하면서 극복하는 것이 강한 군인(군대)이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평시에 흘리는 땀 한 방울은 전시에 흘리는 피 한 방울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모든 훈련은 전시를 대비하여 실전적 훈련이 되도록 하는 것은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공군사관생도 시절, 행군이나 낙하산 강하 훈련 등의 하계 군사훈련을 받을 때 야외에서 땅바닥에 앉아서 식사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했고, 때로는 비를 맞으며 식사를 했었고, 샤워는 꿈도 못꾸었다. 그런데 그런 지시사항을 받은 후에는 공군에서의 이런 훈련 경험이 잘못된 것인가 하고 반문해 보기도 했다. 과연 잘 못 되었을까?)
결국은 사령부 지시사항대로 포대 여건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급조하여 식탁이나 동절기에 야외에서 샤워할 수 있는 시설 등을 마련했지만, 상급부대에서 ‘실전적인 훈련’을 생각했다면 이러한 지시사항들은 현실에 맞게 재검토해야했다. 그리고 혹시 어떤 확고부동한 지휘철학 하에 이런 사항들을 지시했다면 사령부에서는 경량화 개념에 맞게 표준화하여 예산 사업으로 조치하고 예하 포대에서는 필요시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어야 했다.
당시 이런 애로사항에 대해서 대대본부로 건의는 했지만 돌아온 것은 ‘지시대로 하라!!!’ (그러고 보니 방포사가 공군으로 전군하던 초창기의 일화가 떠오른다. 그중 하나가 많은 육공 장교들이 ‘무자재 무지원’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며 ‘무자재 무지원’ 개념을 고려하지 않는 공군과 오공 장교들을 은근히 나약하다고 비웃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맞는 얘기일까? 6.25 이후에 나라가 가난했던 50년대, 60년대의 악폐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다니.... 아무튼 그때는 그랬다.
한편, ‘무자재 무지원’ 개념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이 개념은 극단적인 상황하에서 임무를 수행한다는 투지는 인정한다. 냉병기나 기본적인 열병기를 사용하던 시대의 전투에서는 이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최첨단 무기를 사용하는 현대전에서, 특히 공군에서 무자재 무지원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방포사는 상당회 폐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필자는 그동안 방포사 내에서만 근무하다보니 육군에서 공군으로 전군한 방포사의 분위기가 육군 분위기의 전부인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즉, 방포사가 우물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연합사에서 근무하는 동안 연합사에 있는 육군 장군들의 지휘 방식과 사고방식 그리고 열린 조직문화를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2차 포대장 시절, ‘실전적 훈련’ 개념과 상반되는 지시사항 등을 접하면서 필자는 ‘육군 장군의 사고방식은 모두 이런 식인가’하는 실망스러운 생각을 지울 수 없었는데, 연합사에서 육군 장군들의 행동과 업무 스타일을 접하면서 이런 필자의 생각은 바뀌게 되었다. 연합사에서 보고 겪은 대부분의 육군 장군들은 선이 굵고 유연성이 있었으며, 상식과 말이 통했다.
당시 필자는 1, 2차 포대장과 대대 참모를 마치고 연합사로 가게된 상황이었고, 방포사의 폐쇄적인 문화 속에서 생활하던 필자에게 직속상관인 ‘A 모(某) 장군’과 같은 작전참모부 소속이었던 ‘B 모(某) 장군’의 사고방식과 업무처리 방식은 필자에게 대단히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역시 사람은 보다 넓은 세상을 보고 경험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라고 하면 너무 과한 표현일까? 연합사의 이런 열린 조직문화와 환경에서 필자는 비록 업무는 힘들더라도 기분 좋게 최선을 다해서 근무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필자가 연합사, 합참, 국방부 등에서 만난 많은 유능한 육군 장교(장군)들은 생각의 폭이 상당히 넓고 유연했으며, 상황을 읽고 대처하는 능력, 업무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 부하 장교에 대한 배려 등이 뛰어났다. 필자는 연합사와 합참 등에서 근무하면서 훌륭한 육군(타군 또는 미군) 장군들의 폭 넓고 유연성 있는 업무(또는 지휘) 스타일을 눈여겨 보면서 배우려고 노력했다.
연합사 업무는 해가 바뀌면서 어느 정도 안정된 가운데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기억할 만한 일은 연합사 근무 두 번째 해의 2월 경에 연합사의 한국군 장교(부사령관 이하 장군 및 영관장교)들을 대상으로 ‘TMD(전구 탄도탄 방어)’에 대하여 브리핑을 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많은 장교들이 ‘탄도탄 방어=패트리어트 미사일’이라는 정도의 단순한 개념을 가지고 있을 때였고, 심지어 어떤 고급 영관장교는 ‘미사일에 의한 탄도탄 방어를 믿느냐?’하는 식으로 탄도탄 방어에 대한 불신감도 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탄도탄 방어의 기본 개념부터 관련 무기체계, 지휘 통제체계, 탄도탄 방어의 미래/전망’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한시간 정도 브리핑을 하고 참석자들과 토의를 했는데, 이 브리핑이 인상적이었는지 한국군 장군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다.
(방공포병은 예나 지금이나 임무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이나 미군 내에서 그리 주목받는 병과는 아니다. 오죽했으면 걸프전 초기에 미 육군이 패트리어트 포대를 연합군 비행장에 배치하려고 하자 미 공군 측에서 반대를 했을까? 물론 스커드에 의해서 미 공군 비행장이 공격을 받자 빨리 패트리어트를 배치해달라고 요청하는 촌극이 있긴 했지만. 그러나 이날 브리핑으로 인하여 한국군 장성 및 장교들에게 ‘탄도탄 방어’ 및 방공처의 존재감을 일깨워줄 수 있었다. 그날 브리핑에는 필자가 생도시절 생도대 중대장이었던 윤 모(某) 소장도 참석해 있었는데, 그분도 필자에게 많은 격려를 하였다.)
(다음에 계속)
◀최환종 프로필▶ 공군 준장 전역, 前 공군 방공유도탄 여단장, 前 순천대학교 우주항공공학부 초빙교수, 現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