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지 답사에서 만난 전쟁영웅들③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반도 마지막 보루인 낙동강 전선의 요충지인 다부동을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 등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이 연합군이 도착할 때까지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이곳을 지켜냈다.
이로 인해 남한은 북한의 적화통일을 막고 추후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당시 한국군의 사활이 걸린 전투였고 결국 수비에 성공했다. 일명 다부동 볼링장전투는 "동양의 베르됭 전투"라고도 불리고 있다.
1989년 4월,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의 날씨는 따사로운 봄날이었다. 하지만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치열했던 전쟁 역사의 현장에서 강의하는 백선엽 장군의 매서운 목소리는 쩌렁쩌렁하였고, 경청하는 육군대학 학생장교들은 엄동설한의 혹한을 느끼게 했다.
특히 당시의 전투 상황을 설명하면서 시간과 장소, 해당 지휘관 및 장병들의 이름을 정확히 제시할 때에는 소름까지 돋았다.
■ 낙동리 부근에서 국군의 대전차포 화망과 미군의 항공지원으로 북한군은 대부분의 전차를 상실
백발의 백선엽 장군은 꼿꼿하게 서서 상황판의 지도와 전투 현장을 연이어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1사단은 성창에서 적과의 접촉을 끊고 8월 3일 오후 낙동리에서 고전하며 낙동강을 도하하여15연대를 인동에, 11연대를 해평동에, 그리고 사단 도하를 엄호하고 철수한 12연대를 낙동리에 배치했다.
이때 사단은 좌측의 미군 1기병사단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우측으로는 1사단을 추격해온 북한군13사단이 낙동리로, 15사단이 구미시로, 3사단이 왜관으로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8월 3일 17시에 북한군 1개 연대가 낙동리의 모래밭에 몰려들어 도하하기 시작했는데, 김점곤 중령이 이끄는 12연대로 저지선을 펼쳐 시간을 벌었다.
그러던 중 4일 사단에 좌인접한 6사단과 전투지경선이 조정되면서 12연대는 사단 예비대로 임무가 변경되어 상림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날 북한군 1개 연대가 12연대가 이동하는 틈을 타 낙정리로 도하하여 11연대를 공격하자 백선엽은 12연대 1대대를 증원하여 막아내고, 6일 궁기동 남쪽 225고지를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결국 도하에 성공한 북한군 13사단은 7일 밤 공격을 재개했다. 이 상황에서도 국군은 힘들게 해평동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백선엽은 여기에 12연대 3대대를 증원하고 같은 연대 2대대를 13연대 지역에 투입하였다. 이날 22시에 강정 나루터로 북한군 15사단 1개 대대가 도하했고, 그 결과 강 건너의 북한군은 급격히 증가했다.
8일 1시에 해평동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과림동으로 후퇴했던 12연대 1대대는 항공지원을 받으며 역습을 감행해 전투 2시간만에 해평동을 탈취한 후, 북쪽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이 13연대의 정면인 남율동 부근에 4일부터 만든 수중가도로 2개 연대와 T-34전차 15대를 도하시켜 9일에는 낙동강 대안의 고지군(201고지, 369고지, 154고지) 등이 돌파되고 말았다.
그러던 와중에 다행스럽게도 14시에 해평동에 이르는 제방을 따라 T-34전차 5대가 남하하다 국군의 대전차포 화망과 미군의 항공지원에 걸려 4대가 파괴되고 369고지 밑의 국민학교에 숨어있던 T-34전차 3대가 대전차 특공조의 활약에 파괴되어 인민군은 대부분의 전차를 상실하였다.
전차 전력을 상실한 북한군은 전술을 바꾸어 금곡리를 우회하여 1사단의 우측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때 국군 2군단장 유재흥 장군이 12일, 'Y선으로 철수하여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려 1사단은 20:00에 이탈하여 전쟁역사에 기록된 혈전의 현장이 될 다부동으로 이동했다. (다음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