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포대장⑤장마철 대란을 겪고 받아든 중령 진급 통보
[뉴스투데이=최환종 칼럼니스트] 사령관 순시를 무사히(?) 마친 포대는 다음날 저녁부터 훈련을 시작할 때와 똑같은 절차를 거쳐서 이틀 동안 야간에 이동하여 원진지로 복귀했다.
포대원 전체가 긴장하면서 준비했던 ‘야외 전개훈련’이 성공리에 끝났고, 훈련을 모두 마친 포대는 정비 및 휴식을 위하여 임무해제를 부여 받았다. 이 훈련을 마치면서 포대는 필자가 처음 부임했을 때의 ‘오합지졸’에서 조금씩 발전해 나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훈련 기간중 1일 수면시간이 평균 2시간 남짓했던 필자는 퇴근한 그날(토요일) 오후부터 긴장이 풀어지면서 그대로 쓰러져 잠에 빠져 들었다.
어느 덧 장마철이 되었다. 잔잔한 에피소드가 계속되는 가운데 포대는 비교적 안정된 상태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8월 초순의 어느 날! 야간 대기를 하고 난 후(그 당시는 포대장이 며칠 간격으로 포대에 야간 대기하면서 작전 임무를 수행했다.), 포대원들의 출근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행정지역에서 포대 간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용인 즉 산 아래 쪽의 개울이 전날 내린 비로 물이 불어서 차량 운행은 물론 사람이 개울을 건너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하긴 포대에도 밤새 뇌우가 치면서 비가 많이 오긴 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못했다. 그러나 여러 간부의 말을 종합해보니 상황이 심각한 것 같았다. 포대 간부들은 작전도로를 이용한 출근은 못하고 포대를 한참 돌아서 부대 인근의 지방도로를 거쳐 어렵게 포대에 도착했다. 그날 오후에 ‘작전 임무’를 마친 필자는 포대 주임원사와 같이 그 ‘개울’까지 가보려고 산을 내려갔다.
산 중턱까지 내려가자 갑자기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길이 없어진 것이다. 정확히 표현하면 작전도로는 형태만 남아 있고, 도로상의 흙이 간밤의 비에 대부분 쓸려 내려가서 바위와 큰 돌들만 남아 있었다. 사진에서나 보았던 미국의 ‘그랜드 캐년’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지프를 세워 놓고 주임원사와 운전병과 같이 산길을 걸어서 내려가는데, 말이 산길이지 흙은 없고 바위와 큰 돌만 드러나 있는 험한 바위산 같은 그런 길이었다. 이런 험악한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도 쉽지는 않았는데, 얼마를 걸었을까, 문제의 ‘개울’에 도착했다.
또 다른 비현실적인 장면이 눈앞에 보였다. 평소에는 개울물이 무릎까지 찰까말까 할 정도였는데, 그 개울이 빗물에 불어서 (조금 과장하면) 한강이 되어 있었다. 이 정도 수위와 물살이면 사람은 고사하고 큰 트럭도 자칫 전복될 위험이 있었다. 건너편에 있는 간부에게 큰 목소리로 몇 가지 지시를 하고는 다시 포대로 올라갔다. 평소 같으면 퇴근이지만 작전도로가 이 모양이니 대책부터 세워야 했다.
한편 작전도로가 끊기면서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대두되었는데, 큰 문제 중의 하나가 인근의 큰 도시에서 가져오는 부식 추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해결하기는 했지만 당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묵묵히 견디어낸 부대원들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 폭우 때 우리 포대 지역뿐만 아니라 전방의 다른 여러 부대에서도 피해가 있었고, 일부 부대는 인명 피해도 있었다.)
그날 오후에 여단 작전참모와 통화를 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도로 복구가 장기화 될 경우, 포대 작전 및 생존 능력은 ?”, “작전 수행에는 지장 없습니다. 다만 부식류 부족이 예상되는데, 고립되더라도 현재 보유하고 있는 식량으로 외부 지원 없이 한 달 정도는 버틸 수 있습니다.” 최악을 고려한 답변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도로 복구에는 보름 정도 걸렸고, 포대는 이내 정상적인 부대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날부터 약 보름간은 작전도로 복구 작업에 집중했다. 이때는 도로 손실이 워낙 커서 공군의 타 부대에서 불도저 등 중장비와 인원을 지원받아서 복구 작업을 했다. 작전도로 복구작업을 마치고 약 보름 만에 퇴근 할 수 있었다. (그때 관사에는 집사람과 나이 어린 두 딸만 있었다. 관사 주변에 민가도 별로 없던 그 골짜기 관사에... 그때를 생각하면 열악한 환경에서 묵묵히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던 집사람에게 감사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물론 산간도서 격오지에서 생활했던 육.해.공군.해병대의 모든 군인 가족들이 그랬겠지만...)
장마철 도로복구 작업이 끝나자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것은 가을에 있는 ‘유도탄 사격대회’였다. 정말 넘어도 넘어도 계속 산이다! 왠 산이 이렇게 많은지.
어느 덧 9월이 되었고, 이제 포대의 모든 능력을 유도탄 사격대회에 쏟아 부어야 할 때가 되었다. 전반기 야외 전개훈련때 경험한 내용에 더하여 세부적인 계획수립과 보강훈련을 시행했다.
한편, 유도탄 사격대회가 시행되기 얼마 전에 중령 진급 심사 및 발표가 있었고, 필자는 그저 묵묵히 부대관리에 전념하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진급심사 결과만 기다리고 있었다. 중령 진급자 발표가 있던 날은 대대본부에서 유도탄사격대회에 대비한 작전조원 사전 평가(포대장 포함)가 있었다.
진급예정자 발표는 오후로 알려진 가운데 필자는 초조함을 잊고자 작전조원 사전평가에 몰두했다. (공군에서 장교 진급은 소령까지는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으면 거의 100% 진급한다. 따라서 공군에서는 중령 진급 심사부터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는데, 진급자 발표 당일에 작전조원 평가를 받고 있으니 필자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그런데 평가가 모두 끝나고 오후 3시가 넘었는데도 발표 소식이 없다. 지금은 스마트폰 등 통신기기의 발달로 국방부에서 진급자 발표가 나면 거의 실시간에 전군(全軍)에 결과가 배포 되는데, 그때만 해도 산골짜기에 있는 포대나 대대는 그런 정보의 전파가 매우 늦었다.
그날 대대본부에는 진급 발표 내용이 상당히 늦게 전파되었고(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 전파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진급자 발표 소식이 너무 늦게 전달되어서 필자는 진급에서 누락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때의 답답한 심정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아무튼 그날 상당히 늦게서야 필자가 중령으로 진급했음을 알게 되었고, 대대장에게 ‘진급’했음을 보고했다. 그때 시간이 퇴근 시간을 훨씬 넘었고,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대대장이 따라주는 군납 위스키를 한잔 마시고 부대로 복귀 출발했다.
중령 진급의 기쁨도 잠시였다. 유도탄 사격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고 계절은 이미 가을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계절상으로는 가을이지만 이곳은 강원도 부대와 마찬가지로 이미 동절기에 접어들었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강원도 부대 때와는 다르게 눈이 그렇게 많이 내리지는 않았다. (다음에 계속)
◀ 최환종 프로필 ▶ 공군 준장 전역, 현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전문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