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의 심호흡] 홍일립의 ‘국가의 딜레마’와 차기 대선주자 관전법

이태희 편집인 입력 : 2021.02.24 15:03 ㅣ 수정 : 2021.02.24 15:50

죽여야 내가 사는 원형경기장 바닥에 추락한 한국정치/‘국가의 딜레마’는 정치에 대한 ‘사실주의’를 해결의 실마리로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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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투데이=이태희 편집인] 한국 정치의 파편화(fractionalization)는 심각한 소통단절을 낳고 있다. 정당은 당리당략에, 개인은 사적이익에 함몰돼 있지만 입으로는 자신만이 정의의 대변자라고 울부짖는다. 사실은 실종된 채 거짓만 난무한다. 구미에 맞는 유튜브 뉴스만 편식, 거짓은 확대재생산된다.

 

거짓과 거짓이 충돌하면 타협점이 없다. 내 주장만이 진실이자 정의이고 너의 주장은 모두 거짓이자 협잡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런 전제를 받아들일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를 죽여야만 나의 거짓이 참으로 인정받는다. 

 

■ 거짓에 함몰된 정치, 대의 정치 ‘본래 기능’ 작동 안돼

 

보수와 진보는 이런 원형경기장 바닥으로 추락한 지 이미 오래이다. 한국정치가 이처럼 미개한 전쟁에서 조금씩 탈피, 진화의 궤도 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사실 복원’이 전제돼야 한다. 적어도 사실을 두고 다툰다면, 상대방의 목소리에서 경청할 대목을 찾을 수 있다.

 

어떤 정치가나 개인도 심지어 신성불가침의 단어인 국가조차도 공공선이나 정의의 독점자가 될 수 없다는 ‘비루한 사실’을 자각할 때, 대의 정치는 파편화라는 괴물의 껍질을 깨고 이익조율과 공공선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작동시킬 수 있다.

 

이 점에서 홍일립이 최근 펴낸 ‘국가의 딜레마(국가는 정당한가)’(사무사 책방 刊)는 유용한 책이다. 국가의 ‘비루한 알몸’을 통찰해낸 정치사상서이다. 알몸(사실)을 깨닫고 나면 누구도 큰 소리칠 수 없다. 특정 정치가나 이념을 신격화한다면 그게 노예의 길 혹은 바보의 길임을 자각하게 된다. 

 

■ 한국의 현행 헌법에 동의한 자는 30%에 불과

 

저자는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로버트 달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달은 국가라는 신화를 해체한다. 국가의 토대가 되는 헌법과 법률에 실제로 동의한 국민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달에 따르면 미국헌법은 1781년 제정되고 20여 차례에 걸쳐 수정되는 동안 제대로 된 국민동의를 받은 적이 없다. 뉴잉글랜드 상인, 제퍼슨 같은 대농장주, 친영 왕당파, 자영업자, 소농 등 5대 세력간 타협의 산물일 뿐이다. 다수가 배제된 소수에 의한 대표체제이다.

 

사실 달 이전에 19세기 미국의 무정부주의자 라이젠더 스푸너는 더 극단적 메스를 가했다. ‘미국헌법은 일부 부유한 백인남성이 약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암묵적 양해사항’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민주주의의 전범으로 칭송받는 미국헌법이 실제로는 소수 강자 간의 일방적 야합이라는 주장이다.

 

한국헌법도 동일한 딜레마를 안고 있다. 홍일립은 “현행 1987년 헌법질서는 독재 청산과 대의 민주주의 부활의 계기를 마련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승자독식 다수제, 과잉 중앙집권제, 엘리트 중심의 대의제를 특징으로 하는 ‘소용돌이 집중제’의 결함을 지니고 있다”면서 “이러한 내용상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정당성 여부”라고 지적했다.

 

국민 다수가 동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정당성이 없다는 것이다. 우선 현행 헌법 개정 당시 1968년 이후 출생자는 투표권이 없었다. 고로 동의한 바가 없다. 1987년 당시 헌법 개정에 동의했던 인구의 30% 정도는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현행 헌법에 동의한 국민은 전체의 30% 수준에 불과하다. 이처럼 지금의 헌법과 국가는 언제 어디서나 정당성(legitimacy)위기에 봉착한 상태이다.

 

■ ‘국가주의’는 시대의 욕망이 만들어낸 거짓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 국민은 국가의 정당성에 대해 일말의 회의도 품지 않는다. 왜 그럴까. 국가의 비천한 기원을 망각했거나 아니면 원래 무지한 탓이다. 국가기원에 대한 플라톤이나 순자의 자연발생설은 목가적이지만 사실을 알려주지 못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구성원들이 합의해준 리바이어던(괴물)이 바로 국가라는 홉스의 사상도  사회계약의 탈을 썼으나, 실제로는 절대군주에게 바치는 헌사에 불과하다.

 

필자는 최초의 국가 창건자는 ‘사기꾼’이었다는 루소의 학설에서 사실의 흔적을 발견한다. “사기꾼이 나타나 공동의 땅을 자기 땅이라고 우기면서 사회적 불평등의 구조를 직조했다”는 설명이다. 사기꾼은 소유물을 보호해줄테니 자신에게 절대 권력을 달라고 요구한다. 순진무구한 원시인들이 사기꾼의 제의를 수용하면서 불평등의 기원인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국가란 원래 대중을 기만함으로써 탄생했고, 그 태생적 본질로 인해 대중을 끊임없이 속이려는 본성을 작동시킨다. 애국심은 바로 그 핵심기제이다. 물론 애국심은 타인에 대한 봉사와 자기 희생과 같은 미덕을 낳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역사 속에서 국가가 애국심을 미끼로 삼아 대중을 조종했던 사실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역사 속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국가론도 결국은 시대적 산물에 불과하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17세기 영국내전의 참혹상 속에서 피어난 고육지책이다. 피비린내나는 살육을 거둬들일 강력한 통치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게르만 민족과 독일 언어에 종교적 신성성을 부여하면서 애국심을 고취시켰던 피히테의 국가주의는 나폴레옹의 무력에 짓밟힌 19세기 프로이센의 정치상황을 반영한다. 프랑스 르낭이 피히테와는 달리 인종이 아니라 ‘문화적 민족주의’를제시한 것은 1870년 독프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 지식인이 만들어낸 고뇌의 산물일뿐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오펜하이머는 국가란 폭력을 동반한 강자의 지배체제라는 ‘늑대국가론’을 주장했으나, 이는 침략의 아픔을 겪어온 폴란드 굼플 로비츠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이다.

 

전쟁과 분쟁이 격화되던 시절에 지식인들은 대중 혹은 통치자의 입장에서 국가의 단면을 부각시키면서 그 단면을 전체라고 강변했을 뿐이다. 특히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의 천황주의 등은 ‘국가가 폭력적 지배자로 전락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경고한다. 이런 위험성은 사기꾼이나 강도패거리의 두목이 창건자가 되는 국가의 본성에서 비롯된다. 국가의 타락은 내면화된 유혹이다.

 

■ 선악의 이분법에 빠진 반국가주의자들의 자기모순

 

이러한 국가의 비루한 본성은 ‘반국가주의자’들을 탄생시켰다. 스푸너는 ‘강도국가론’을 주장했다. 그가 볼 때, 정의란 개인의 자연권을 지키고 타인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는 데 있다. 하지만 고대농경사회에 한 패의 강도 무리가 출현, 약탈을 한 뒤 국가조직과 법을 만들어 영구적 지배를 정당화시켰다. 그게 국가의 시원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도 ‘폭력국가’를 신념으로 삼았다. 국가란 노동계급의 재산을 세금 명목으로 강탈해 관리들에게 분배하는 조직이다. 그 폭력은 국가의 합법성을 통해 미화된다. 톨스토이는 국가의 지배보다 무정부상태가 바람직하다고 판단, 비폭력평화주의의 길을 걸었다.

 

미국의 자연주의자 소로가 주창한 ’시민불복종‘도 비슷한 맥락이다. 징세를 포함한 국가의 행정권력을 전면 부인, 불복종을 그 수단으로 제안했다. 톨스토이나 소로는 국가를 부인했지만 국가체제를 전복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평화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국가 타도에 나선 실천적 반국가주의자들은 곧 자기모순에 빠졌다. 국가를 비판하면서 더 폭압적인 국가시스템을 구축했다. 마르크스와 레닌이 그들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착취적 성격을 비판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진화의 방향으로 제시했으나, 더 강력한 ’괴물국가‘를 탄생시켰다. 프롤레타리아의 대변자를 자처한 극소수의 공산당 핵심들은 훨씬 중앙집권적인 국가 통제 시스템을 창조해냈다.

 

필자 홍일립은 반국가주의자들의 실패가 인간 본성에 대한 도식적 이해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그들은 인간이 선과 악이 뒤얽힌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악의 무리‘인 소수와 ’온순하고 선한 다수‘라는 이분법에 사로잡혀 정치권력을 선악의 척도로 재단했다”는 것이다. 

 

■ 사익과 파당 정치로 전락한 대의민주주의

 

21세기의 지배적인 국가론은 물론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의 사상적 출발점은 개인의 맹목적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국가주의’나 그 대척점에 선 ‘반국가주의’와는 다르다. 인간의 복합성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 희망을 던졌다.

 

이와 관련해 루소는 중요한 사상가이다. 공공선 혹은 공통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반의지’와 개별적 사익의 집합체에 불과한 ‘전체의지’를 구별한다. 개별적 사익만 추구하는 ‘신민’은 주권자가 될 수 없다. 일반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시민’이 주권자가 된다. 주권자들은 공평한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이 같은 ‘인민주권’과 ‘법치’가 민주주의의 핵심 기반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국가체제의 딜레마는 일반의지에 따르는 인간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한 때 직접민주주의의 이상향으로 꼽혀왔던 아테네 민주주의가 사실은 ‘성인 남성’의 당파적 이익의 향연에 불과했다는 점은 상식에 속한다.

 

대의제 민주주의로 넘어가면 더 심각하다. 시민의 주권을 위임받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그리고 주권을 위임한 시민 중 ’일반의지‘에 따르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입으로는 공공선을 떠들지만 기실은 사익이나 파당의 이권을 추구할 뿐이다.

 

이 같은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민주주의 국가의 통치자와 그 추종자들은 ’거짓말‘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정치가들을 평가하는 시민들도 마찬가지 형편이다. 진정한 공공선의 관점에서 정치행위를 평가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이다. ‘전체의지’ 에 함몰돼 있기 때문이다.

 

■ 정치 엘리트가 주인이고 시민은 들러리?

 

슘페터는 루소나 밀이 부르짖었던 고전적 민주주의를 헛된 꿈으로 규정하고 ‘엘리트 경쟁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어차피 일반의지를 추구하는 시민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깔고 ‘전문적 식견’을 가진 엘리트가 정치주체로 활동하면 된다. 권력욕으로 충만된 엘리트들은 국가나 사회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의사결정을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공공선은 달성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게 슘페터의 입장이다.

 

슘페터의 관점은 민주주의의 현실에 근접해 있다. 하지만 대중의 힘을 과소평가한다는 한계를 갖는다. 엘리트 정치인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대중의 지지나 광기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프랑스 사회심리학자 구스타브 르봉은 군중의 광기에 주목했다. 개인은 합리적일 수 있지만 개인의 집합체인 군중은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존재에 대한 숭배, 그 존재의 권력에 대한 공포감등의 사회심리를 공유한다. 군중에게 일반의지란 생경한 이물질에 불과하다. 하버마스 등은 이성적 사유능력을 가진 개인들인 ‘공중’에 의한 공론장이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시켜 줄 수있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지만, 정치현실에 대한 설명력은 르봉의 비관론이 더 높다.

 

저자에 따르면, 결국 정치와 국가를 구성하는 핵심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영국 역사가 액튼 경의 지적처럼 통치행위에는 특정계급만 부적합한 게 아니라 모든 계급이 부적합하다. 단일성과 일반성으로서의 국민은 실재하지 않는다. 고로 정치선동가들이 강조하는 국민의 뜻이란 자신들을 추종하는 일부 유권자의 의사에 불과하다. 하버마스 표현에 의하면 국민은 언제나 복수로 출현한다. 따라서 국민은 선악으로 나뉘지 않는다. 선악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국민’이 있을 뿐이다.

 

■ ‘사실’을 기반으로 정치인 주장을 의심하는 태도 필요

 

현대인이 맹신하기 쉬운 법치도 사정은 비슷하다. 공공선을 담아낸 헌법이나 법률은 존재한 적 없다. 법은 한시적이고 파당적이다. 인치도 뒤섞인다. 밀에 따르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법은 원래 없다.

 

국가와 정치가 더디게나마 진화하려면 ‘비루한 알몸’을 자각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유력주자들은 경쟁적으로 공공선을 주장하고 저마다 국민의 뜻임을 역설하고 있지만, 그 국민은 당파의 일원에 불과하고 공공선은 당파의 이익이 아닌지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있다.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정치인의 말과 행동이 내포한 진의를 의심하는 태도야말로 국가와 정치의 정당성을 높여나갈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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