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공군 500회 폭격으로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 철교를 단 14회로 폭파시킨 한국공군(중)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1951년 12월, 38도선 인근에서 전선이 고착된 가운데 유엔군은 협상을 통해 전쟁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고 결말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반면 북한과 중공군은 계속적인 증원으로 전투력을 확대하여 고착된 전선에서 양측 세력이 점차 균형을 이루게 됐다.
이로써 지상전에서는 대규모 작전의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진 가운데 연대급 이하의 전초진지 쟁탈전이 반복되는 소부대 전투를 제외하고 거의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따라서 유엔군 지도부는 교착상태에 빠진 휴전회담의 성과를 진전시키기 위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공군에게 적의 전 병참선에 대한 폭격작전을 실시하여 증원을 차단함으로써 현상황을 타개하도록 기대를 걸었다.
■ 적 대공포에 피격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고도 폭격 감행
당시 북한과 중공군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는 많은 군사물자와 장비를 경의선과 만포선을 통해 평양으로 수송했고, 이를 다시 평양에서 중동부 전선으로 보급하고 있었다. 승호리 철교는 평양 동쪽 10km 지점 대동강 지류인 남강에 설치된 철교로서 중국으로부터 평양까지 수송된 보급물자를 중동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북한군 후방보급로의 요충지였다.
미 5공군은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해 이미 기존 승호리 철교의 폭파ㆍ차단작전을 시행했으나 북한은 기존 철교 위치에서 하류 방향으로 북쪽 200미터 지점을 우회해 새로운 철교를 가설한 후 주위에 밀집된 대공방어망을 구축했다. 또한 10개의 교각은 침목을 우물 정자(井) 형으로 쌓아 올리고 그 공간에는 모래주머니를 채워 폭격이나 기총에 대해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건설됐다.
미 5공군은 이 철교를 폭파하기 위해 미 전폭기 B-29까지 동원하여 500회(소티)에 달하는 폭격을 퍼부었음에도 파괴에 실패한 곳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밑져야 본전이란 식으로 이 작전임무를 한국 공군에 이양했다.
임무를 부여받은 공군 10전투비행전대장 김신 대령은 공군 최초의 100회 출격 달성자인 김두만 소령에게 이 임무를 부여했다.
1952년 1월12일 아침 7시 40분 편대장 김두만 소령의 지휘 아래, 2번기 장성태 대위, 3번기 김금성 대위, 4번기 이기협 대위, 5번기 전봉희 대위가 탑승한 F-51 전투기 5기 편대가 강릉기지를 이륙했다.
드디어 편대는 적의 대공포화가 작렬하는 승호리철교 표적의 상공에 도착했고 우선 로켓탄과 기총으로 적 대공포진지를 무력화한 후 500파운드 폭탄 10발을 투하했으나 폭탄이 교각 사이의 모래바닥과 물 속에 떨어져 폭파에 실패했다.
같은 날 오후 2시, 윤응렬 대위가 지휘하는 3기 편대(2번기 주영복 대위, 3번기 정주량 대위)가 재차 폭격을 시도했으나 교각 위의 철로만 손상을 입혔을 뿐 교량 폭파에는 또 실패했다.
첫날 임무에 실패한 김신 대령은 참모들과 숙의 끝에 8000피트 상공에서 강하해 3000피트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당시의 미군 전술로는 철교 폭파가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
결국 조종사에게는 적 대공포에 피격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폭격 명중률을 크게 높일 수 있도록 저고도 폭격 방안인 4000피트 상공에서 강하해 1500피트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1월15일 오전 8시 25분 엄동설한으로 살을 에는 듯한 한파 속에 투철한 감투정신으로 무장한 제1편대장 윤응렬 대위(2번기 정주량 대위, 3번기 장성태 대위)와 제2편대장 옥만호 대위(2번기 유치곤 대위, 3번기 박재호 대위)가 이끄는 6대의 F-51 전폭기는 승호리철교 표적 상공에 도착했다.
먼저 제1편대가 적의 심한 대공 포화를 피해가며 편대장기를 선두로 기수를 목표에 맞춰 진입해 로켓탄을 발사하자 철교의 경간 2개에서 검붉은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이어 제2편대가 표적을 향해 진입하자 1편대는 2편대를 엄호하기 위해 잔여 로켓탄과 기총을 적의 대공포 진지를 향해 발사했고 유치곤 대위가 포함된 2편대는 대공포화의 위협을 무릅쓰고 정확한 조준 하에 폭탄과 로켓탄을 표적에 투하했다.
이때 명중한 2개의 교각 경간이 파괴되면서 철편이 허공에 솟아올라 떨어지고 철교의 중앙에는 2개의 큰 구멍이 생겼다. 이로써 우리 공군은 출격한 지 14회(소티) 만에 승호리 철교를 파괴시키는 놀라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이날 F-51기 6대는 폭탄 12발, 로켓탄 20발, 50밀리 기총 4700발을 사용해 승호리 철교 폭파 외에도 포진지 6개소, 보급품 집적소 1개소, 벙커 3개소, 건물 1개 동을 파괴하는 성과도 거뒀다.
■ 한국 공군의 높은 전투기량과 감투정신을 과시한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은 훨씬 경험 많고 능력있는 미군조차 실패하여 노심초사(勞心焦思) 하던 상황을 신출내기 한국 공군이 해내면서 그 능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고, 작전 성공 이후 오늘날까지도 평양 대폭격 작전, 351고지 전투 항공지원작전과 더불어 대한민국 공군의 쾌거로 늘 회자(膾炙)되고 있다.
배우 신영균이 주연한 추억의 영화 ‘빨간 마후라’는 김신 공군대령과 유치곤 공군대위의 활약이 돋보인 이 승호리 철교 폭파적전을 각색해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한편 2월21일 미 5공군 각 비행단의 지휘관 회의가 있었는데 이날의 전과를 설명한 김신 대령은 이 자리에서 축하 박수 세례를 받았다. 이때 유엔 공군의 출격에 참가했던 한 미군 장교가 다가와서 “아주 반갑다”며 “우리도 거기 갔지만 끝내 한국 공군이 끊었구먼”하고 축하해 줬다.
유엔 공군은 이 철교를 폭파시키기 위해 연일 부대를 바꿔 가며 약 500회(소티) 출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한국 공군에게 넘겼다. 폭파임무 인계 당시에 미군장교 두 명이 한국 공군의 성패 여부에 대해 돈을 걸고 내기를 했었고, 이날 김신 대령에게 반갑게 축하 인사를 던진 장교가 내기에서 이긴 사람이었다고 전해졌다.
승호리 철교 폭파ㆍ차단작전의 성공은 한국 공군의 명예를 걸고 기필코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대공포화가 작렬하는 상황에서 초저공 침투비행을 두려워하지 않은 조종사들의 높은 전투의지에 기인한 것으로 대내외에 한국 공군의 높은 전투기량과 감투정신을 과시한 사례로 기록됐다.(하편 계속)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